마츠나가히사도리 (2/2)천하인들 사이에서 농락당한 다이묘

마츠나가쿠도리

마츠나가쿠도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마츠나가쿠도리(1543년~1577년)
출생지
나라현
관련 성, 절, 신사
다문성

다문성

관련 사건

그런데 같은 해 가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유한 오다 노부나가가 가미오에 성공합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스스로의 딸과 비장의 다기 「99헤어 가지」를 내밀었습니다. 마츠나가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가신으로서 오다가에 속하는 유력 다이묘로서 다이와국의 수호 다이묘를 인정받습니다.

또한 오다 노부나가는 오다가나 무로마치 막부의 가신을 야마토국에 파견합니다. 파견된 군세는 약 2만. 이 오다가의 군세와 마츠나가가는 협력하여 미요시가나 미요시가에 붙은 츠츠이 준케이를 구축합니다.

세력을 회복한 마츠나가가. 당주인 마츠나가히사도리는 야마시로국 오야마자키에 금제를 내걸고 있는 것으로부터, 위기를 벗어 세력을 회복한 것이 엿볼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야마토국의 대부분은 다시 마츠나가의 세력하에 머물러 연말에도 밀려온 12월 24일.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기후성에 방문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부동국행의 칼」이하의 여러 명물을 헌상해 오다가의 패권의 일각을 담당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기후성에서 회담하고 있는 동안. 미요시가는 병력을 재편성하고 교토에 진격하고 있습니다. 에이로쿠 12년(1569) 1월 4일, 교토에 있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미요시가의 습격을 알고 혼코지에 세워 굳혔습니다. 그리고 막부의 가신과 저항해 미요시가를 돌려주고 있습니다. 미요시가는 이를 통해 기내를 버리고 완전히 시코쿠로 철수했습니다. (혼코지의 이상)

이 사건을 아는 오다 노부나가와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호설 속을 무리하게 밀어 현장의 지휘를 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츠나가가는 미요시가로부터, 오다가로 안장 바꾸어 야마토국을 계속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오다가로부터의 이탈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쿠도리 부모와 자식은 미요시가와 내전 상태에 들어간 후, 오다가에 속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츠나가가는 여기에서 오다가의 전투에 참가합니다.

모토가메 원년(1570) 4월, 오다 노부나가는 와카사국의 국인 무토가를 토벌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에치젠 와카사국(현재의 후쿠이현)에 출진. 앞면은 무토가의 토벌이었지만, 목적은 에치젠 국 아사쿠라가의 토벌이었습니다. 이 오다가의 군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필두로 기내의 다이묘 국인 영주도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치젠국가나가사키까지 오면 키타오미의 아사이 나가마사가 배신 끼워 쏘고 있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미쿠니 쿠기타니 영주인 쿠리키 모토츠나를 설득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퇴로를 확보. 오다가는 교토로 물러갈 수있었습니다. (가나가사키의 퇴구)

그리고 2개월 후인 6월 말, 오다가와 도쿠가와가는 누나가와에서 아사이 아사쿠라가와 격돌(누나가와의 싸움). 이때는, 마츠나가 히사히데, 쿠도리 부모와 자식은 참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스가 타이샤에 모여 참배한 후, 야마토국의 국인중 토벌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누나가와의 싸움 직후에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교토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9월, 시코쿠로 물러났던 미요시가가 섭진국으로 진군, 노다성 후쿠시마성에 처치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토벌군을 만들어, 섭진국에서 성에 처치하고 있는 미요시가를 토벌합니다. 이 미요시가의 침공을 듣고, 마츠나가가는 처음, 나라에 있는 다문산성에서 가와치국의 신키산성으로 군을 이동. 한층 더 신키산상으로부터 오다가의 군에 합류했습니다. 『니조 연승기』에 의하면 종군하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도리는 대진 중에 신체를 부수고, 시부키산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속에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싸움의 서전에 해당해, 불리가 된 오다가는 미요시가와 화목. 화목의 표시로서 오다 노부나가가 맡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딸을 노부나가의 양녀로 한 후 미요시 나가지에게 아내가 했습니다.

이렇게 2년 정도 오다가에 속해 있던 마츠나가가.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미요시가와 화목을 실시한 근처에서, 마츠나가가는 오다가를 이탈합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다가에 속해 있던 기내의 다이묘국인중의 성을 공격했습니다. 또,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도 오다가를 떠나 반오다의 세력에 가담한 것으로, 새로운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됩니다.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

오다 가문의 재산하에

텐쇼 원년(1573년) 4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한 반오다 세력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요시아키를 지지해 주력이었던 카이쿠니(현재의 야마나시현)의 다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의 싸움 직후, 죽습니다. 다케다가가 서쪽으로 오는 것을 예측해 거병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가에 추방됩니다.

12월에는 오다가에 반기를 들고 있던 마츠나가가도 다문산성을 포위합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다문산성을 새겨주고 항복했습니다. 마츠나가 히사도리는 기후성에 가서 항복을 바라고 나왔습니다.

마츠나가가는 신키야마성으로 옮겨 오다 가가신의 사쿠마 노부모리, 이어서 야마토국 수호 다이묘가 되는 하라다(塙) 나오마사의 여력에 들어갑니다. 야마토국은 야마토의 국인중이었던 츠츠이 준케이와 하라다 나오마사를 중심으로 운영되게 되었습니다.
이 오다가의 신체제 아래, 텐쇼 3년(1575) 7월에 마츠나가 히사토루는 토우시 원승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용왕 산성으로 옮겼습니다.

오다가 산하에서의 재이탈과 마츠나가가의 마지막

텐쇼 4년(1576) 하라다 나오마사의 여력이었던 마츠나가가는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에 참가했지만, 텐노지 전투에서 패배. 하라다 나오마사는 전사, 한때는 마츠나가 히사도리도 전사했다고 소문이 흘렀을 정도였습니다.

야마토국을 지배하고 있던 하라다 나오마사가 토사하면, 오다 노부나가는 츠츠이 준케이를 새로운 통치자에게 둔다. 또, 오다 노부나가는 마츠나가의 상징이었던 다문산성의 파각을 결정, 그 해체에는 마츠나가 히사도리도 더해졌습니다.

텐쇼 5년(1577), 오다 노부나가에 추방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반오다 세력을 형성, 중국 지방의 모리가나 이시야마 혼간지, 에치고국(현재의 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의 결집에 성공합니다. 마츠나가가는 혼간지 공격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만, 마음대로 이탈해 반오다 세력에 가담합니다. 마츠나가야, 다시 한번 배신입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가문에 혐의가 있었던 것일까,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파견된 마츠이 아리센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10월, 오다가는 신키야마성에 휘말리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둘러싸고 자해에 몰아넣습니다. 그 전초전에서 야나기모토성에 처하는 마츠나가히사도리도 자해에 몰렸습니다.

미요시가에 있어서 알몸 일관으로부터 수호 다이묘에 영달한 마츠나가 히사히데. 그 히사히데의 히토오 마츠나가 히사도리는 아버지와 함께 미요시가와 싸웁니다. 거기에서 오다가로 안장 교체해 위기를 벗었습니다만, 결국은 그 오다가에 의해 마츠나가가는 멸망했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마츠나가 히사도리 부모와 자식은 전국 시대, 재간 하나로 파란의 시대를 달려갔습니다.

다문산성

다문산성(타몬야마조)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지어진 히라야마성입니다.다문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성내에 다문천(불신시천왕의 1명)을 모시는 것보다 다문산성이라고 명명됩니다. 현재의 와카쿠사야마 중학의 장소에 위치해, 도다이지나 흥복사를 눈 아래 바라보는 성으로서 야마토국을 지배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에이로쿠 8년(1565)에 나온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의 서한을 루이스 플로이스의 『일본사』에 인용된 것으로 다문산성은 알려지게 됩니다.

루이스 드 아르메이다는 초대를 받아 성내를 보고 서한에 적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공가의 저택이나 사원 등이었던 사용되지 않았던 초석이나 이시가키를 사용해, 두툼하게 하얀 흙담, 와와부키의 건물, 혼마루의 존재와 현재의 성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이로쿠 2년(1559)에 축성이 개시되어, 에이로쿠 7년(1564) 완성되어 마츠나가가의 거성이 됩니다. 그런데 오다가를 배신한 마츠나가가는 텐쇼 원년(1573) 말에 항복해 성은 오다가에 인도되었습니다. 오다가의 가신으로 야마토 수호로서 들어간 하라다 나오마사가 성주로서 들어갔습니다만, 텐쇼 4년 5월에 나오마사는 토사. 야마토국은 하라다 나오마사에서 츠츠이 준케이로 통치가 이행했기 때문에, 텐쇼 5년(1577년)에 다문산성은 파괴되었습니다. 성이 있던 기간은 불과 16년간. 건물과 인테리어는 교토의 니조 신고쇼에 이축되어 석재의 대부분은 츠츠이성, 고리야마성에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다문산성이 있던 장소에는 중학교가 있어, 성의 명잔으로서 비석이 서 있습니다.

마츠나가 히사도리의 기사를 다시 읽으십시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