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나가히사도리(1/2)천하인들 사이에서 농락당한 다이묘

마츠나가쿠도리

마츠나가쿠도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마츠나가쿠도리(1543년~1577년)
출생지
나라현
관련 성, 절, 신사
다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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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전국시대 미요시나가 케이는 긴키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장악했습니다. 이 나가케이를 도운 것이 마츠나가 히사히데입니다. 히사히데는 궁극적으로 야마토 수호 다이묘가 됩니다. 그리고 히사히데의 남자가 마츠나가 히사도리였습니다. 그러나 히사히데, 쿠도리 부모와 자식은 미요시가와 내전 상태에 들어갑니다. 불리한 상황에 놓인 마츠나가가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산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마츠나가가는 오다가에 몰려 갑니다. 이번에는 그런 마츠나가 히사도리를 보겠습니다.

마츠나가 히사도리의 아버지, 마츠나가 히사히데

마츠나가 히사도리의 아버지,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미요시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다만, 대대로 미요시가를 섬기고 있던 것은 아니고, 미요시 나가 케이의 유필(비서)로서 현지 등용됩니다. 거기에서 나가요시의 세력 확대에 수반해, 유필로부터 봉행, 한층 더 군세를 이끄는 무장으로 재각 하나로 출세했습니다. 나가케이도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재능을 높이 사, 무로마치 막부나 조정과의 절충을 실시하는 등 한팔로 편리합니다. 
그런 미요시가 중신인 마츠나가가에 마츠나가 히사도리가 태어났습니다.

마츠나가 히사시의 출생으로부터 가독 계승

마츠나가 히사토루는 천문 12년(1543), 미요시 나가 케이의 가신이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嫡男로서 태어납니다. 쿠도리가 태어난 전년은, 아버지의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미요시나가 케이의 무장으로서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의 정토를 실시하고 있던 시기이며 후년, 마츠나가가는 야마토국의 수호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마츠나가 히사시는 일찍부터 아버지를 따라 정력적으로 일을 해 나갑니다. 자료 위에서는 에이로쿠 3년(1560) 가와치국(현재의 오사카부 동부)에 있던 관심사에 금제를 내건 것이 처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쿠도리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해내고 20세가 된 에이로쿠 6년(1563) 12월, 종오위 시모우에몬령에 서위를 받은 후, 가독을 양도해 야마토국 다문산성주가 됩니다. 야마토국을 다스리면서, 쿠도리는 미요시가를 지지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미요시 나가 케이의 죽음과 의각의 계승

마츠나가가가 섬기고 있던 미요시 나가요시는, 기내를 중심으로 한 천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이로쿠 6년(1563)에 나가케이 유일한 친자였던 미요시 요시코가 사망합니다. 이때 나가요시는 아이에게 앞서서 충격을 받아 컨디션을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미요시가는 나가요시 조카, 미요시 요시츠네가 후계에 정해졌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쿠도리에게 가독을 양도한 것은 이 미요시 요시츠네의 후계 결정 직후였습니다. 미요시가 내부는 세대 교체를 실시합니다. 혹은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죽은 미요시 요시코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시코 색을 불식하기 위해서 가독을 양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7년(1564)에 컨디션을 무너뜨리고 있던 미요시나가 케이는 죽었습니다.
에이로쿠 8년(1565) 5월 1일.
미요시가 뒤를 이은 미요시 요시츠네는 역시 마츠나가 가문을 이은 마츠나가 히사도리를 데리고 상경합니다.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속견해, 두 사람은 요시테루로부터 각각 이름의 한자를 배령합니다. 쿠도리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한자 「의」의 편향을 받아 마츠나가 요시히사로 개명했습니다(이후도 마츠나가 히사도리의 이름으로 통일합니다).

에이로쿠의 변

그런데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속견한 불과 반월 후인 5월 18일.
미요시 의계는 군세를 이끌고 다시 요시테루의 관을 방문합니다. 이 때 뒤따랐던 것은 장로였던 미요시 장일을 대표로 한 미요시 3인중, 그것과 마츠나가 히사토루였습니다. 미요시가는 장군의 관을 둘러싸면 강소에 이릅니다. 내용은 미요시가를 배제하려는 장군 근신의 처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소의 도중부터, 미요시가는 관에 밀려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토벌합니다. (에이로쿠의 이상)
이때 마츠나가 히사토루는 장군으로부터 받은 요시나가의 이름을 쿠도리에게 되돌린 것으로 합니다.

미요시가의 내분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에이로쿠의 이상으로 사망했습니다. 요시테루를 토벌한 미요시가는, 아와쿠니(현재의 도쿠시마현)에서 익은 요시테루의 종제, 아시카가 요시에이(아시카가 요시유의 아들로 나중의 14대 장군)를 차기 장군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시카가 요시키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후의 15대 장군이 되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입니다. 요시아키는 야마토국 흥복사에서 스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츠나가가가 다스리고 있는 야마토국의 무릎 밑입니다. 형의 요시테루가 미요시가에 의해 살해된 일로, 동생의 요시아키도 생명의 위험을 기억합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비호를 요구해, 히사히데도 승낙하는 편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사히데로부터 보증을 받은 아시카가 요시아키. 요시아키는 사망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가신들에게 안내를 받고 야마토국을 탈출했습니다.

이것에 격노한 것이 미요시가의 장로, 미요시 장일입니다. 미요시가는 다음 장군에 숨이 걸린 아시카가 요시에이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차기 장군의 자격이 있는 요시아키의 도망은 대실태였습니다. 미요시 장일은 미요시가 당주인 미요시 요시츠네에게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책임을 묻도록 몰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미요시의 계승은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미요시 장일은 의계가 있는 이모리야마성에 나가면, 미요시 요시츠네를 방황하고 유폐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츠나가 히사토벌의 목숨을 냈습니다.
여기에서 미요시 장일을 중심으로 한 미요시가와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중심으로 한 마츠나가가의 내전에 돌입합니다.

미요시가와 싸우게 된 마츠나가가는 열세였습니다. 야마토국의 수호 다이묘였지만, 현지의 소령주(국인중)인 츠츠이 준케이 등은 미요시가에 붙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킨키의 다이묘에게 반 미요시를 불렀습니다. 그 때문에, 다음 영록 9년(1566) 6월부터 모습을 받았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발자국은, 여기로부터 1년간 사라집니다. 일설에는 그동안 미노, 오와리(현재 기후현, 아이치현 서부)의 다이묘가 된 오다 노부나가와 협상을 했다고도 합니다. 라고 하는 것도 오다 노부나가는 올해, 야마토국의 국인중이나 사찰에 마츠나가가에 붙어 미요시가에게 저항하도록 서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독을 양도했다고는 해도 마츠나가의 중심 인물인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희미하게 모습을 지운 것입니다. 남겨진 현당주인 마츠나가 히사토루는 다문산성에 농성해 미요시가와 계속 싸웠습니다.

오다 가문의 지배하에

미요시가와 마츠나가가가 내전 상태에 들어가 3년. 에이로쿠 11년(1568)이 되어도, 미요시가는 야마토국에 주둔해 마츠나가가를 감시합니다.

마츠나가 히사도리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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