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삼인중 (2/2)미요시가 삼두 정치
미요시 삼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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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기
- 이름
- 미요시 삼인중(년)
- 출생지
- 도쿠시마현
그런데 미요시가가 옹립하고 있던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미요시 나가요시는 종종 충돌을 반복했고 요시테루는 두 번 정도 나가요시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에이로쿠 원년(1558)에 쌍방은 화해하고, 나가요시는 요시테루를 세우게 됩니다. 미요시나가 케이에 옹립되는 일로 교토로 돌아온 아시카가 요시테루. 하지만 요시테루는 납득하지 않았습니다. 장군의 권위 회복을 향한 독자적인 외교를 실시해 갑니다. 새롭게 미요시가 당주가 된 미요시 요시히토와 미요시 3인중은 복권을 향한 움직임을 하는 요시테루를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요시나가 케이의 죽은 다음 에이로쿠 8년(1565).
미요시 요시히코, 미요시 3인중은 군세를 따라 장군의 저택을 둘러싸고 강소에 이르렀습니다(고쇼마키). 강소의 내용은 장군을 둘러싸고 미요시가에게 적대하는 장군 가신들의 추방입니다. 그런데 미요시가는 강소에서 둘러싸고 있던 장군의 저택에 처치되어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백낮 살해합니다(에이로쿠의 이상).
관에 빠진 것은 미요시가의 의도적인 것과 사고라고도 생각되고 있습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죽은 것으로 장군 부재가 됩니다. 미요시가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체제를 모색합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와의 내전
미요시 요시카미와 미요시 3인중에 의해 주도된 에이로쿠의 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습격되어 죽었습니다. 장군 부재가 된 미요시가는 다음 장군을 시코쿠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시카가 요시에이(아시카가 요시유의 아들로 요시테루의 종제, 나중의 14대 장군)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에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입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나라 코후쿠지에서 스님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한 것이 마츠나가 히사히데입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죽은 미요시나가 케이에게 일찍부터 섬기고 삼인중의 1명, 미요시 장일과 미요시가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나가요시로부터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을 맡고, 나가요시가 죽은 후에도 야마토국 수호 다이묘로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다스리는 나라의 무릎 전, 코후쿠지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있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형의 요시테루가 교토에서 백일살당한 것에 위기감을 기억하고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보호를 요구합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도 요시아키에게 보증을 하는 취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보호되는 것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 요시아키는 그 직후, 죽은 요시테루의 가신들에게 안내를 받고 흥복사를 도망냅니다. 미요시가에게는 다음 장군을 아시카가 요시에이라고 생각했을 때, 장군이 될 수 있는 요시아키를 놓친 것입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는 큰 실패였습니다. 미요시 3인중의 1명, 미요시 장일은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책임을 추궁해, 당주 미요시 요시히토에게 마츠나가 히사토토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미요시 요시히토는 이 판단을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삼인중은 미요시 요시히토를 연금하면 병사를 정돈해, 마츠나가 히사히토 토벌을 실시합니다. 여기에서 미요시가는 삼인중과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내전 상태가 되었습니다.
야마토국에 공격당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불리해집니다. 이 히사히데가 의지한 것이 오와리 미노쿠니(현재의 아이치현, 기후현)를 통치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와 연락을 취하고 노부나가는 여기에서 상경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발흥
야마토국에서 상대한 미요시 3인중과 마츠나가 히사히데.
이 2파가 싸우고 있는 사이에,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요청을 받은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봉사해 상경합니다. 야마토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요시가에 있어서, 동쪽의 미노국(현재의 기후현)에서 오는 오다가는 상정외였습니다. 교토 주변을 지배하고 있던 미요시가는 오다가에게 패퇴를 계속했습니다. 기내의 대부분의 지배지를 미요시가는 잃고, 마츠나가 히사히데와의 다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열세를 만회하고 싶은 미요시가.
에이로쿠 12년(1569)에 미요시 3인중은 혼코지에 처치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습격합니다. (혼코지의 이상) 그러나 격전의 끝에 패해, 역전의 한 손이 없어집니다. 미요시가는 기내에서의 지배권을 잃고 미요시 3인중은 아파국으로까지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시코쿠로 물러난 삼인중 중 한 명인 미요시 무네시게는 사망합니다. 또 이것보다 전, 미요시 3인중과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싸우고 있는 사이에, 당주의 미요시 요시히토가 미요시가를 떠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요시히토는 오다 노부나가에 신종합니다. 미요시가는 당주 부재하고 지도자 중 한 명을 잃으면서 기내로 되감기를 목표로 했습니다.
미요시가의 되감기와 각각의 마지막
모토가메 원년(1570) 7월, 되감기를 도모하고 싶은 미요시가. 미요시가는 미요시 장일, 이와나리 토모도리를 중심으로 시코쿠 아와국에서 병사를 이끌고 기내에 침공합니다. 섭진국에 있던 노다성 후쿠시마성에 처치하면 토벌에 온 오다 노부나가와 대치합니다. 미요시가의 측에 이시야마 혼간지의 일향 일규가 붙은 일도 있어, 오다가는 궁지에 빠졌습니다. 싸움은 오래된 동년 12월 쇼친쵸 천황의 철이 있어 화의를 맺습니다. 미요시가는 어떻게든 기내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이묘로서의 미요시가는 쇠퇴의 일도를 추적합니다.
미요시 장일은 아들의 나가토라와 함께 이 노다성 후쿠시마성의 싸움에서 기록이 보이지 않거나 싸움 속에서 토사했다고도 유폐되었다고도 합니다.
이와나리 토모도는, 한 번은 오다가에 내립니다만 나중에 이반. 텐쇼 원년(1573) 오다가에게 공격받아 토사했습니다.
이렇게 미요시나가 케이의 사후, 미요시가를 주도한 미요시 3인중은 사망했습니다. 미요시 종가는 당주 미요시 요시츠키도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오다가에 내렸습니다만, 나중에 요시가키는 오다가에 공격받고 죽습니다.
미요시가의 본관이었던 아와국에서는 미요시가의 압정에 반항한 내란이 일어나, 아와 미요시가도 쇠퇴했습니다. 이렇게 전국시대 중기, 최대의 다이묘였던 미요시가는 쇠퇴합니다. 시대는 미요시가로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시대로 옮겨갔습니다.
미요시 삼인중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