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나가 케이 (1/2)삼영걸 앞의 천하인

미요시나가 케이

미요시나가 케이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미요시나가 케이(1522년~1564년)
출생지
도쿠시마현

무로마치 시대, 오히토의 난 후에 장군의 권위는 떨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관령 호소카와가가 아시카가 장군가를 세우면서 정치를 맡아 갑니다. 이 호소카와 정권을 구축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앞서 긴키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장악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미요시 나가요시입니다. 어려서 미요시가를 이어 30년 이상에 이르는 호소카와 정권을 구축한 나가케이. 이번에는 그런 전국 시대 중기, 패자가 된 미요시 나가 케이의 생애를 봅니다.

미요시가와 아버지 미요시 원장

미요시 나가요시가 태어난 미요시가는, 아와쿠니 미요시군(현재의 도쿠시마현 미요시)에서 흥미가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는 아와 나라에서 미요시의 이름이 산견되어 무로마치 시대가 되자 호소카와 가서류의 호소카와 쇼슈가(아와쿠니 수호 다이묘), 이어 본가의 호소카와 요시야가를 섬겼습니다. 이렇게 미요시가는 호소카와가를 섬기면서 시코쿠의 아와 사누키(현재의 도쿠시마현, 카가와현)에 존재감을 더합니다.

나가요시의 아버지, 미요시 원장은 요시조가 당주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가요시 약 10세 무렵에 아버지 미요시 원장은 주군의 호소카와 하루모토에 휩싸여 하루모토보다 촉구된 일향 일규에 습격당해 자해에 몰렸습니다. (享禄・天文の乱)
미요시 나가요시는 어려서 미요시가를 이끌게 됩니다.

장경의 태생과 아버지의 죽음

미요시 나가요시는 오오나가 2년(1522),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중신인 미요시 원장의 嫡男로서 현재의 도쿠시마현 미요시에 있던 잔디성에서 태어납니다. 동생은 미요시 실휴, 아야케 후유야스, 토카와 일존, 노구치 동장이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향록 5년(1532) 나가요시가 10살 때 아버지의 원장은 자해에 몰린다. 사카이에 있던 나가요시와 그 어머니, 동생들은 아버지에게 놓쳐 미요시가의 본령인 아와쿠니로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원장을 자해에 몰아넣은 일향 일쏘입니다만, 이 후 일향 일소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나 지도하고 있던 혼간지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게 독자적으로 날뛰어냅니다. 그 때문에,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혼간지와 고등을 나누어 혼란에 혼란을 거듭 수습할 수 없는 사태에 빠졌습니다. 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혼간지의 화목을 알선한 것이 미요시 나가요시입니다.
나가요시(당시는 11세로 유명한 센쿠마)는 어렸기 때문에, 삼촌의 미요시 야스나가(미요시 원장의 동생) 등이 대리해 알선했다고도 보여지고 있습니다만, 이 화목의 알선이 미요시 나가요시의 등장합니다.

이 직후, 전복도 실시해 손지로 이장이라고 자칭합니다. 같은 해, 강화에 응하지 않은 일향 일규세를 공격해 섭진국고수성(현재의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있던 성)을 탈회했습니다. 미요시가는 시코쿠 아와 나라를 본관으로 왔습니다만, 나가요시는 여기에서 에쓰미즈 성을 시작해 기내의 성을 거성으로 바꾸면서, 평생 시코쿠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미요시 나가 케이는 여기에서 호소카와 하루모토 아래에 귀참해, 부하의 무장이 됩니다.

세력 확대

미요시 나가 케이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미요시 가문의 일족으로 하루모토의 측근을 근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요시 정장입니다. 정장은 가와치국의 대관직을 받았지만, 원래는 장경의 아버지장이 주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천문 8년(1539) 나가케이는 정장에게 주어진 대관직을 스스로에게 주도록 맑은 곳에 다가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미요시 나가 케이와 하루모토의 관계가 꼬여 갑니다. 나가요시는 병사를 데리고 교토에 입경하자, 하루모토는 낙외로 퇴피해 국가의 다이묘에게 스스로 돕도록 요구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 사태를 우려해 화목을 알선했습니다만 부수미로 끝납니다.

한편, 나가요시는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섭진 수호대에 임명되어, 섭진국(현재의 오사카부 북부)에 있던 고시미즈성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대해 갑니다. 또, 동생의 미요시 실휴가 아와 나라에서 지반을 강화하고, 다른 동생들도 사누키나 하리마의 국인에게 입양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미요시가는 힘을 붙여 갔습니다.

미요시 나가 케이와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교토 주변에서 소경쟁을 일으킨 후 화목합니다. 관령인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말을 걸면 기내 밖에 있는 다이 다이묘가 하루모토에 가세해 나가요시는 불리해집니다. 그 때문에, 하루모토와 화목했습니다만 점차 하루모토를 무시한 징세를 실시하는 등 주군인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나가요시와의 관계는 악화해 갔습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와의 대립

천문 17년(1548), 미요시나가 케이는 같은 일족으로 관령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측근이기도 한 미요시 정장의 토벌을 결의합니다. 이유는 정장과 그 아들 미요시 마사카츠의 불상사, 혹은 나가요시의 아버지인 미요시 원장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에 의해 자해에 몰렸을 때 미요시 마사카츠가 암약하고 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미요시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정장 토벌의 호소를 일으켰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에츠미성에서 열린 군의에 있어서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가시를 나누고 토벌하는 일을 결의합니다.

미요시나가 케이는 군을 일으키면 미요시 마사오의 아들 마사카츠가 곁들인 에노나미성(현재의 오사카시 성동구)을 포위합니다. 다음 천문 18년(1549), 정승구원에 온 호소카와 하루모토, 미요시 정장과 싸움(에구치의 싸움), 미요시 정장을 토벌했습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 미요시 마사카츠는 교토로 돌아오면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 그 장남 요시키 부자를 데리고 오미 사카모토에 도망. 여기에 관령 호소카와 정권은 쓰러져 미요시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아시카가 장군가와의 대립

교토를 도망 친 호소카와 하루모토에 데려온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그 남남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도망친 다음 해, 천문 19년(1550)에 사망합니다. 여기에서 장군직을 이어진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교토에 귀환하기 위해 미요시 나가요시와 싸우게 됩니다. 그동안 교토에 있어서 장군(아시카가 요시테루) 부재, 그 집사인 관령(호소카와 하루모토) 부재의 상황에서 나가요시가 치안을 유지해, 정무를 나누어 갑니다.

에이로쿠 원년(1558)까지 약 8년간 미요시나가 케이와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싸움과 화목을 반복한다. 이 장군과 싸우고 있는 동안 미요시나가 케이는 아쿠타가와야마성(현재의 오사카부 다카츠키시에 있던 성)을 빼앗아 거점을 에쓰스이성에서 아쿠타가와산성으로 옮겼습니다. 한층 더 가랑이 노신이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나 미요시 실휴 등의 동생들에게 기내의 침공을 명령해 차분히 지배 지역을 넓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의 차이를 넓혀 갑니다. 그리고 시코쿠에서 미요시 실휴 등 동생들이 병사를 이끌고 상경해 오자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불리는 결정적이 되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미요시 나가 케이와 화목해 교토로 돌아옵니다. 이후, 나가요시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세우면서 무로마치 막부의 실권을 잡고, 차분히 미요시 체제의 지반을 굳혀 갔습니다.

아시카가 요시키와의 화해와 번영

에이로쿠 연간 초기(1558)까지의 미요시가의 영향력은 기내의 서쪽 절반에서 시코쿠의 동쪽 절반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로서는 일본 최대의 다이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이로쿠 2년(1559), 가와치국(현재의 오사카부 동부)에 진출하면 다카야성이나 이모리야마성을 떨어뜨립니다. 또한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야마토국에의 진출을 명하고, 히사히데는 야마토국 북반을 지배하에 거두고 있습니다.

다음 에이로쿠 3년(1560), 미요시 나가케이는 거성을 아쿠타가와산성에서 이모리야마성으로 옮겼습니다. 이모리야마성은 현재의 오사카부 다이토시의 이모리야마에 있으며, 오사카부와 나라현의 현 경계, 곧바로 북쪽에 교토부와의 현경에 있습니다. 이 거성 이전은 교토에 가깝고 오사카 히라노를 누를 수 있고 야마토국에 노려보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아쿠타가와야마성은 유일한 친자인 嫡男의 요시오키에게 양보했다. 미요시 요시코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옆에 봉사했습니다. 거성 이전은 장군과 친절한 관계가 있는 嫡男義興에의 가독 계승의 준비라고도 포착되고 있습니다.

에이로쿠 4년(1561), 미요시 나가요시는 장군을 교토에 있는 스스로의 저택으로 맞이해 술연회를 열고 있습니다(쇼군 어성). 종종 대립하고 있던 장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해, 조정에의 기부 등을 실시하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조정과 세력하에 둡니다. 더욱 지배하는 지역은 기내와 시코쿠의 절반에 천하인(이 시기는 기내를 중심으로 한 패자) 미요시나가 케이 절정의 순간이었습니다.

미요시가의 낙일과 장경의 죽음

한때는 기내를 중심으로 한 천하를 장악한 미요시가. 그런데 미요시가의 영광은 오랫동안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에이로쿠 4년(1561) 4월 동생의 토카와 일존이 급사합니다. 이즈미 국안 와다성을 거점으로 한 일존이 죽은 것으로 이즈미 국지배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미요시 나가 케이의 기사는 계속됩니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