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타카 (1/2)서일본 제일의 실력자
오우치 요시타카
- 기사 카테고리
- 인물기
- 이름
- 오우치 요시타카(1507년~1551년)
- 출생지
- 야마구치현
동서로 나뉘어 싸운 오인의 난. 이때 서군의 주력이 된 것이 주방의 수호 다이묘 오우치가였습니다. 한층 더 오히토의 난 후에, 도시를 사실상 통하고 있던 호소카와 마사모토. 그 정원이 암살되면 오우치가는 일시적으로 교토를 소 듣습니다. 그런 힘이 있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오우치 요시타카였습니다. 요시타카는 중국 지방에서 기타큐슈를 세력하에 거두어 서일본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번은 서일본의 실력자, 오우치 요시타카에 대해 봅니다.
주방 오우치 씨란?
오우치 요시타카가 태어난 스오호 오우치씨. 오우치씨의 흥행은 다른 다이묘나 무가와 출자가 다릅니다. 일본의 무가는 대략 「겐헤이 타치바나」나 기타 중앙의 귀족의 후예이거나, 그것을 자칭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다 노부나가. 노부나가는 조를 평가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조를 겐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우치씨는 「겐헤이 타치바나」가 아니라 백제의 성명왕의 아들을 조로 하고 있었습니다. 주방국(현재의 야마구치현) 다타라하마에 착안한 것으로부터 「다다라」성을 자칭해, 그 이름이 역사에 나오는 것은 헤이안 시대 후기입니다. 게다가 주방국 오우치무라에 거주한 일로부터 다다라 성에서 오우치 성으로 바뀌었습니다. 헤이안 시대에는 주방국의 관리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가마쿠라, 남북조, 무로마치와 시대가 옮겨짐에 따라 주방국의 수호 다이묘가 됩니다.
그런데, 오우치 요시타카의 할아버지 오우치 마사히로는 야마나 종전의 양녀(야마나 희귀의 딸)를 맞이한 것으로부터 오히토의 난에서는 야마나 종전의 서군 주력으로서 싸웁니다. 싸움 도중, 동군의 대장 호소카와 카츠모토, 서군의 대장산 명종전의 양명이 죽어 화목했습니다만, 그 후도 오우치 마사히로는 교토에 있어 계속 싸워,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알선으로 교토를 퇴거했다 일로 오히토의 난은 종료되었습니다.
그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 오우치 요시타카의 아버지인 오우치 요시오키입니다. 요시코는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살해당한 영세의 혼란 후에 상경. 한때는 교토를 쇠고기 '천하인'으로까지 불리는 권세를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오우치 요시코의 아들, 오우치 요시타카의 시대가 옵니다.
오우치 요시타카의 탄생
오우치 요시타카는 에이쇼 4년(1507), 스오, 나가토, 이시미, 토요젠국의 4개국 수호인 오우치 요시오키의 적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유명은 카메도마루(키도마루). 이 카메도마루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역대 당주의 자칭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요시타카에게 이 이름을 붙이는 일로 태어났을 때에는 차기 당주로서 명확하게 나타내야 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오우치가는 가독 상속시에 내분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그것을 미연에 막을 필요로부터 붙였습니다.
에이쇼 17년(1520)의 전후에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리로부터 편망을 받아 전복해, 요시타카라고 자칭하고 있습니다.
가독 상속
전복을 끝낸 오우치 요시타카는, 대영 4년(1524)에는 아버지에 따라 안예국(현재의 히로시마현)에 출진합니다. 중신의 도흥방과 함께 아키쿠니 수호 다케다가가 다스리고 있던 사토 긴잔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오우치가의 진출에 산인의 아마가가가 자극되어 교전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요시타카는 교토의 공경·만리 코지 히데보의 딸·사다코를 정실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享禄元年(1528) 아버지의 오우치 요시오키가 사망한 것으로, 요시타카는 22세에 가독을 상속합니다. 중신의 도흥방에 보좌되어 대단히 상속을 실시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순풍적인 삶이 계속됩니다.
규슈 원정
享禄3年(1530) 오우치 요시타카는 기타큐슈를 향해 침출한다. 분고국(현재의 오이타현)의 오토모씨나 치쿠젠국(현재의 후쿠오카현)의 소이치씨 등과 싸웁니다. 히젠국(현재의 사가, 나가사키현)의 마츠우라씨를 종속시켜, 기타큐슈 연안을 확보해 대륙 무역의 수단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소弐씨의 가신 류조지가 겸의 반공에 있어서 대패도 경험해 일진 일퇴를 반복합니다.
천문 3년(1534), 그 용조사가 겸을 조략해 소이 씨로부터 이반시키면 소이 씨의 약체화를 도모합니다. 한편으로 키타히젠의 규슈 탐제 시부카와 요시나가를 공격해 시부카와씨를 멸망에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천문 5년(1536), 오자이후의 최고 책임자인 오자이 다이키에 서임되면, 오우치 요시타카는 기타큐슈 공략의 대의 명분을 얻습니다. 류조지가와 함께 히젠타쿠성에서의 싸움으로 소이치를 잃고 키타큐슈 지방의 평정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요시다군 야마시로의 싸움과 츠키야마 도미타성의 싸움
천문 8년(1539), 아버지의 대로부터 오우치 요시타카를 보좌하고 있던 도흥방이 병몰합니다. 토우씨는 오우치씨의 방류 우다씨의 일족이며, 오우치씨의 조인 다타라 성을 바탕으로 하는 악보의 중신이었습니다. 도흥방의 사망 후, 도씨는 흥방의 아이인 도하루 켄이 흔적을 이어받습니다.
그런데 천문 9년(1540)의 일입니다. 산인지방에서 도약한 아마코가가 아키쿠니에 침공합니다. 오우치가의 부하에 속하고 있던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군 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요시타카는 도하루 켄을 총대장으로 한 원군을 보내 격퇴합니다. (요시다군 야마시로의 전투)
다음 해의 천문 10년(1541)에는 아키나쿠의 수호 아키타케다가를 잃고 아키쿠니를 제압하에 둡니다.
그리고 같은 해, 아마코가를 도약시킨 아마코 경구가 사망합니다. 오우치 요시타카는 이를 아마코가 공략의 호기로 보고, 천문 11년(1542) 스스로 이즈모국에 원정해 아마코씨의 거성 츠키야마 도미타성을 공위했습니다. 그런데 부하의 국인중의 잠자리에 있어서 대패합니다. (쓰키야마 도미타성의 전투)
문치 체제
오우치 요시타카가 주재한 츠키야마 도미타성의 싸움은 대패로 끝났습니다. 게다가 이 싸움에서는 외로워하고 있던 요시코의 오우치 하루모치(도사국 이치조 씨에게 시집던 오우치 요시타카의 언니의 아이)를 잃고, 동기를 잃어 버립니다. 요시타카는 대외 원정에 흥미를 잃는 대로 내정과 문화 진흥에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내정 전념파의 사가라 무임들을 중용해 국내 정치를 우선시합니다. 그런데 이 요시타카의 태도에 무단파의 도류방이나 나이토 오키모리 등이 불만을 모았습니다. 토끼도 뿔도 문화 진흥과 국내 정치를 우선시킨 요시타카.
천문 16년(1547), 오우치 요시타카는 마지막 견명선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천문 19년(1550), 야마구치에 온 프란시스코 자비에르에 인견하고 있습니다. 이때 자비엘은 요시타카의 불교 보호 등을 비난한 것으로 포교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자비엘은 기내로 여행합니다.
같은 해, 도나나 나이토 등이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흐릅니다. 요시타카는 한때 오우치군을 이끌고 관에 세워 도망쳤습니다. 이 때의 반란은 풍평으로 끝나고 있습니다만 이미 이 때, 도료 켄은 오우치 요시타카를 폐해 새로운 당주를 세우는 것을 모색한 구절도 있습니다.
천문 20년(1551년), 요시타카는 자비에르를 다시 인견하고 있습니다. 이때 자비엘은 전회 반성에서 헌상품을 보내는 등 했기 때문에, 포교의 허가를 주고 거점으로서 다이도지를 줬습니다.
대령사의 변과 요시타카의 죽음
천문 20년(1551), 오우치 요시타카와 관계가 악화된 도료현 등 무단파는 조정의 상의를 받았다고 모반을 일으킵니다. 중신의 나이토 오키모리도 이를 묵인하고 요시타카를 돕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