尼子詮久 (아마코 하루쿠) (1/2)산인의 수컷
尼子詮久 (아마고 히로히사)
- 기사 카테고리
- 인물기
- 이름
- 아마코 아사히사(아마코 하루쿠)(1514년~1561년)
- 출생지
- 시마네현
무로마치 시대 후기, 이즈모의 수호대로부터 발전해 산인 지방의 유력 다이묘에 올라간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아마가 집입니다. 아마코가는 오미국의 사사키가, 쿄고쿠가에서 나누어 이즈모국으로 옮겼습니다. 이 아마코가에 한 명의 걸이가 태어납니다, 아마코 경구입니다. 경구는 순식간에 주위의 세력을 끊었다. 그리고 경구의 손자에게 태어나 당주에 취한 것이 아마코 사쿠사(하루쿠)입니다. 이번에는 산인에 패를 주창한 아마코 히사히사에 대해 봅니다.
아마코가란?
아마코 아사히사가 태어난 아마코가는, 우타겐씨 사사키가를 조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마코가는 무로마치 시대에 오미국에서 수컷을 자랑한 쿄고쿠가나 육각가와 큰 연결이 있었습니다.
- 가마쿠라 시대
- 가마쿠라 막부를 흥미진 겐토리 아침. 그 부탁 아침에 섬기고 있던 사사키 히데요시와 4명의 아이(정강, 경고, 모리즈나, 타카츠나)는 배신하는 일 없이 일관해 섬기고 막부를 할 수 있으면 중용되었습니다. 각지의 수호에 임명되어 오미국(현재의 시가현)을 본령으로 합니다.
사사키 히데요시의 손자, 사사키 노부츠나는 오미나라를 맡고 있었지만, 그 죽을 때 영지를 아이들로 나눕니다. 3남자의 사사키(육각) 태강은 육파라의 땅을 중심으로 다스리고, 미나미오미를 중심으로 번영하는 육각씨의 조가 됩니다. 4남 사사키(쿄고쿠)씨 신은 가마쿠라에서 집권 호조씨에 접근해 막부 요직을 맡아 메이지까지 계속되는 다이묘 쿄고쿠씨의 조가 되었습니다. - 남북조 시대
- 이 사사키 쿄고쿠 가문에서 태어난 사사키 타카 씨 (사사키 씨 신의 曾孫)는 남북조 시대, 실력으로 세력을 늘려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이 타카씨의 손자였던 사사키 타카히사는 오미국 고라소 아마코고(시가현 고라마치)에 거주해, 이름을 아마코라고 칭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사키 씨, 쿄고쿠 씨에서 분리 된 아마코 씨가 시작됩니다.
- 무로마치 시대
- 아마코씨를 일으킨 아마코 타카히사는 오미 아마코씨의 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코 타카히사의 차남이 아마코 지구였습니다. 아마코 지쿠는 이즈모국 수호대에 맡겨 이즈모국에 들어가면, 츠키야마 도미타성의 성주가 됩니다. 이 아마코 토모히사가 이즈모 아마코씨의 조가 되었습니다.
이즈모 아마코 씨를 흥한 아마코 지구의 아이, 아마코 청정의 무렵에 오토히토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점차 군웅할거의 전국시대에 들어갑니다. 아마코 청정은 본가근에 해당하는 쿄고쿠가에 속하면서 이즈모국 수호대를 맡고 있었지만 서서히 독립의 움직임을 보입니다. 그리고 아마코 청정의 아이가 아마코 경구였습니다. 아마코 케이쿠는 이즈모 나라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대국 오우치 가문과 싸우면서 동쪽에 위치한 야마나가에 침공해 갑니다. 아마코가는 차례로 산인 지방을 잘라, 아마코 히사히사는 「11개국 태수」라고 불릴 정도로 세력을 늘렸습니다. 이 아마코 경구의 손자가 아마코 사쿠사입니다.
아마코 아사히사의 탄생과 가독 상속
오미국에서 옮겨 산인지방에 패를 주창한 아마코가.
이 아마코가에 아마코 히사히사가 당주에 취하면 크게 세력을 늘립니다. 이 경구가 당주였던 에이쇼 11년(1514). 아마코 히사히사의 적남 마사히사의 차남으로서 아마코 사쿠사는 태어납니다. 그런데 사쿠히사의 오빠가 어절. 아버지의 아마코 마사히사도 사쿠히사가 4세의 무렵, 이즈모 아용성의 싸움의 중간에 진몰. 여기서 가독의 자리가 사쿠히로 돌아왔습니다.
아마코 사쿠는 성장하면 할아버지 경구의 생명을 받고, 백호국(현재의 돗토리현) 수호대가 되어 아마가가 영토의 동쪽의 통치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사쿠사가 24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천문 6년(1537), 아마코 케이쿠가 은거를 한 일로 이즈모 아마코가의 가독을 이어 당주가 되었습니다.
산인으로부터의 세력 확대
그런데 아마코 사쿠사가 당주가 된 다음 천문 7년(1538)입니다. 아마코가의 서쪽에 위치해 주방국 등을 영위하는 대국, 오우치가가 있던 이시미 긴잔을 공략해 빼앗습니다.
게다가 아마코가의 동쪽에서는 인하국을 평정해, 거기에서 하리마국(현재의 효고현 남서부)에 침공, 천문 8년(1539)에는 용노성을 공략하는 등 산인을 중심으로 기내의 서쪽에 발이 걸기를 쌓는 등 세력을 늘립니다.
그리고 별소가의 미키성에 공격해, 별소가에 붙은 하리마국의 유력 다이묘 아카마츠 하루마사를 쫓아냈습니다. 또 각국의 국인중이나 수호 다이묘를 세력하에 두어 아마자령의 세력을 안정시키려고 했습니다. 아마코 사쿠사는 당주에 취한 이후, 차분히 영토를 확대해 갑니다.
요시다군 산성 전투
아마코가는 하리마국을 발걸음으로 하고, 상경의 자세를 보입니다. 이것에 위기감을 안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입니다. 요시하루는 아마가의 서쪽에 위치한 오우치 가문에 견제를 요청했습니다.
오우치가는 이 요청을 받아 안예국(현재의 히로시마현)에 침출합니다. 아마코가에 속했던 아키나쿠의 다이묘, 국인중을 공격받은 것으로 아마코 사쿠는 일단 기내에의 침공을 앞두었습니다. 천문 9년(1540), 아마코 히사히사는 오우치가의 침공에 보복하기 위해, 안예국의 국인중 모리 모토나리를 공격합니다. 은거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의 아마코 히사히사는 이 원정에 반대했습니다만, 무력 침공으로 사태의 전환을 도모하고 싶은 사쿠히사는 강행합니다. 이와 같이 종종 아마코 사쿠사는 무력에 의한 사태의 타개를 도모한 일로부터 일족으로부터도 「단위로 대장의 그릇이 부족하고, 혈기에 있어서 인의가 부족하다」라고 보여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토끼도 뿔도 아마코 히사히사는 모리가의 거성 요시다군 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아키 나라나 이시미국(시마네현의 서부)의 국인이나 다이묘가 아마코의 위세를 보고 아마코측에 붙은 것으로부터 당초는 아마코 유리하게 추이합니다.
그런데 모리 모토나리는 요시다군 야마시로에 처해 철저한 농성전과, 원군으로서 달려 온 오우치의 원군에 의해 일족을 잃는 등 대패를 찼습니다. (요시다군 야마시로의 전투)
츠키야마 도미타성 전투
그런데 요시다군 산성에서 대패를 한 아마코가. 다음 해의 천문 10년(1541)입니다. 아마코가에 속해 있던 국인중은 경구의 죽음을 보고 오우치가에게 되돌아옵니다. 아마가는 일전에 위기에 빠졌습니다.
또 요즈음, 아마코 사쿠사는 아시카가 요시하루에서 한자를 받은 아마코 하루쿠라고 자칭하게 됩니다(이 이야기 중에서는 이후도 아마코 사쿠사로 합니다).
그리고 천문 11년(1542). 아마코 사쿠사의 거성 츠키야마 도미타성에 오우치가가 공격해 왔습니다. 아마코가는 츠키야마 도미타성에 곁들여 철저한 농성전을 전개합니다. 그러면 성을 공격하고 있던 오우치가는 긴 공성전으로 피폐해 가고, 오우치가에 되돌아오고 있던 국인중도 이반해 갑니다. 결국 오우치가는 츠키야마 도미타성의 공성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이 철수 시에 아마코가는 가혹한 추격을 합니다. 오우치가는 속하고 있던 국인중이 토사, 모리 모토나리도 생명을 떨어뜨릴 정도의 대패를 했습니다.
(제1차 월 야마 토미타성의 싸움) 이후, 오우치가를 물리친 아마코 사쿠사는 이즈모, 백호, 미작, 오키 등 산인 지방을 중심으로 주변에 대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됩니다 .
오우치 가문과의 공방과 세력의 회복
오우치 가문을 중심으로 한 군을 츠키야마 도미타성에 맞이해 처치한 아마코 사쿠사는 그 다음 해, 천문 12년(1543)에 빼앗긴 이시미 긴잔을 빼앗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마자령의 동쪽, 인하국 전역에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주변의 나라의 국인중이나 다이묘와 소경쟁을 반복합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