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모토나리 (2/2)모신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모리 모토나리(1497년~1571년)
출생지
히로시마현
관련 성, 절, 신사
히로시마 성

히로시마 성

천문 20년(1551), 도하루 켄은 모반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살해했습니다. 도하루 켄은 한때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자였던 오우치 요시나가를 오우치 가 당주로서 옹립합니다(대녕사의 이상).

모리 모토나리는 이 도료 켄의 행동을 시인하고 맹우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모토나리는 도하루 켄에 대항하는 오우치 가가신을 토벌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도하루 켄은 모토나리의 확대에 위기감을 느낍니다. 오우치가의 가신을 빼앗은 영지를 반환하도록 하루켄은 모토나리에게 요구했지만 모토나리는 거부합니다. 결국 모리 모토나리와 도하루 켄의 동맹 관계는 종말하고 대립합니다.

모리 모토나리는 도하루 켄과 대결하기로 결정했지만 규모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토나리는 안예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한편, 하루켄은 광대한 영지를 가진 오우치가를 그대로 산하에 거두고 있습니다. 모토나리는 도하루 켄의 내부의 붕괴를 모시고 약화를 모릅니다.

이에 대해 도하루 켄은 가신 미야가와 방장에게 3천명의 병사를 맡기고 모리가를 토벌합니다. 미야가와 보장은 아키쿠니에 도착하여 진을 깔았습니다. 이에 대해 모토나리는 진을 습격하고 미야가와 방장은 토사했습니다(절창밭의 싸움). 오전은 모토나리의 승리로 끝납니다.

미야가와 방장이 토사한 것으로 히로지 원년(1555), 도하루 켄 자신이 대군을 이끌고 모리가 토벌로 향합니다. 교통 요충지인 이쓰쿠시마에 세워진 모리가의 미야오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이쓰쿠시마에 상륙합니다. 그러나 이쓰쿠시마 주변을 세력하에 두는 무라카미 수군이 모리 쪽에 대해 배후를 습격당합니다. 성에서도 병사가 공격해 와서 끼고 쏘고 있던 도하루 켄은 자칼했습니다. 도하루 켄이 사실상 다스리고 있던 오우치씨는 그 세력을 크게 약하게 합니다.

중국 지방의 패자에게

도하루 켄을 토벌하고 위협을 물리친 모리 모토나리. 여기에서 모토나리는 오우치가나 아마코가를 공격해 세력을 확대해 나갑니다. 이쓰쿠시마의 전투로부터 4년 후의 히로지 3년(1557), 오우치 가문의 내분을 호기로 본 모토나리는 당주였던 오우치 요시나가를 토벌해 멸망에 몰아넣었다. 이것에 의해 규슈를 제외한 중국 지방의 오우치가의 소령을 부하에 담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에이로쿠 원년(1558). 아마코가에 빼앗기고 있던 이시미 긴잔을 되찾으려고 산인 지방에 침공했습니다만 대패해 되돌아가는 것에 맞습니다. 그러나 3년 후의 영록 3년(1561), 아마코가의 당주 아마코 하루쿠가 사망하면 아마코가에 동요가 퍼집니다. 거기에 넣은 모토나리는 다시 산인 지방에 침공. 아마코가는 거성의 츠키야마 도미타성에 농성하여 일진 일퇴를 계속합니다. 군사적으로 무리한 침공은 앞두고, 모토나리는 아마가의 내부 붕괴를 초대하는 계략을 둘러보면 영록 9년(1566), 아마가는 농성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멸망했습니다.

이렇게 모리 모토나리는 일대로 중국로 8개국을 지배하는 다이묘로 발전했습니다.

모토나리의 마지막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가와 아마코가를 쓰러뜨려 중국 지방의 수컷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독은 장남의 모리 다카모토에게 양보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다카모토는 아마코가와의 싸움 속에서 병사하고 있었습니다.

또 1560년대에 들어가면 모리 모토나리도 자주 컨디션을 무너뜨립니다. 당시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명의곡 나오세 미치조(三瀬道三)를 훑어보기 위해 파견하여 치료를 받는 등입니다. 쿠로세 세미조는 교토에 귀경했지만 모리가와 도조는 편지를 보내고, 그 후도 모토나리의 컨디션 관리의 처방을 받습니다. 이러한 곡직세도 3과의 교류로 의료기반이 약했던 중국지방은 의료체제를 한꺼번에 바꿨습니다.

에이로쿠 12년(1569) 컨디션이 좋았던 모토나리는 규슈에 출진. 규슈에서의 모리군의 전투를 독전했습니다만, 이것이 모토나리의 마지막 출진이 되었습니다.

모리가의 가독은 嫡男 모리 타카모토의 장남 아키모토(모리 모토나리의 손자)가 이어, 년의 젊은 아키모토를 2남의 요시카와 모토하루, 3남의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지지해 운영해 가게 되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는 전 거북이 2년(1571) 6월 컨디션을 무너뜨리고 위환에 빠져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노쇠라고도 식도암이라고도 합니다, 향년 75.

모리 모토나리의 죽음 후, 손자의 모리 테루모토가 당주에 취합니다. 휘원은 오와리국에서 발흥해 긴키를 중심으로 패권을 확립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 한층 더 노부나가의 죽은 후에 정권을 확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은 후, 그 마쿠시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히데요시 죽은 후,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 휘원의 서군은 패했기 때문에 모리가는 주방국과 나가토국의 2개국으로 줄어들어 에도시대에 들어갔습니다.

세 개의 화살

「3개의 화살」의 가르침은, 모리 모토나리가 죽음의 사이에 장남 모리 타카모토, 차남 요시카와 모토하루, 삼남 코바야카와 타카에에 일족의 결속을 담은 가르침입니다. 한 화살은 곧 접히지만 세 화살로는 좀처럼 부러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히로지 3년(1557년)에 모토나리가 쓴 친필 서장 '삼자 교훈장'에서 유래한 이야기로 '3개의 화살' 자체는 창작이라고 합니다.

「3개의 화살」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이솝 동화집」이나, 중국의 「魏書―토와 계곡 잘 혼동전」등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토나리의 「3개의 화살」의 일화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 가능성의 하나로서 에도 시대에 편찬된 「마에바시 구조문서」가 있어, 죽을 때의 모토나리가 많은 아이들을 불러 모아 「3개의 화살」을 말한 것으로부터, 이 에피소드가 미야의 가르침의 일화로 변화하여 전해졌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모토나리의 『삼자교훈장』이 있듯이 모리 모토나리는 일족의 단결을 촉구해 사람의 고리를 소중히 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모리 모토나리 축제

모리 모토나리 공묘 전제
모리 모토나리는 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 타카다시에 있던 요시다군 산성을 거성으로, 일대에서 산요, 산인 10개국을 공격해 잡았습니다.
모토나리의 무덤은 요시다군 산성의 성터에 있습니다. 모토나리는 1571년 6월 14일(음력)에 사망합니다만, 그 내일은 7월 16일(신력)에 해당합니다. 거기서 매년 7월 16일, 모토나리를 원한 축제 “모리 모토나리 공묘 전제”가 행해집니다. 이날 아침, 모토나리의 아버지인 모리히로모토를 모시는 축제를 다지비 원숭이 가케성 산기슭의 히로모토의 무덤에서 행해져, 거기에서 모토나리의 축제가 행해집니다. 평소에는 모토나리의 무덤을 울타리의 바깥쪽에서 밖에 견학할 수 없습니다만, 이 날만 무덤에의 문이 열려 일반 분도 타마가키 안에 참배할 수 있습니다.
일심 축제
「일심 축제」는 아키 타카다시 요시다 지구에서 행해지는 축제입니다. 요시다군 야마성을 중심으로 패권을 쌓은 모리가의 위업을 추구해, 매년 7월 중순부터 하순에 행해집니다.
회장에 마츠아키가 낳고, 깃발이 튕겨져, 호사가가 불어지는 가운데, 모리 모토나리가 3명의 아들들에게 「삼자 교훈」의 가르침을 주창하는 무자 그림책이나, 향토의 윤무인 「일심절 춤」 , 불꽃놀이가 발사되는 등 분위기가 납니다. 일심 축제는 아키 타카다의 여름을 물들입니다.

요시다군 산성

요시다군 산성은, 히로시마현 아키 타카다시 요시다마치에 있던 성에서 모리씨의 거성이었습니다.

축성 연수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모리가의 조인 모리시 부모가 아키라국으로 하향하여 보다 나중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당초의 군산성은 보통의 국인중이나 호족의 성과 변함없는 요새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리 모토나리가 당주가 된 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세세하게 확장 공사는 행해지고 있었던 것 같고, 모토나리의 시대에 싸우기 위한 성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사는 성곽으로 정비된 것 같습니다.

모토나리의 다음 시대, 모리키모토의 무렵이 되면 천수각이 아니었지만 이시가키나 기와, 금박 기와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통 요충에서 벗어나 있던 요시다군 산성. 텐쇼 19년(1591)에 히로시마성이 축성하면, 가신이나 성시의 상인들은 히로시마성하에 이주해 서서히 사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게이쵸 20년(1615), 에도 막부의 일국 일성령에 의해 요시다군 야마성은 철거되어, 이시가키나 호리 등도 파각·철거되었습니다. 근대에 들어가 쇼와 15년(1940)에 요시다군 산성터가 나라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쇼와 63년(1988)에는 주변의 성도 추가되어 「모리씨 성터 다지비 원숭이 성터 고리야마 성터」가 되었습니다.

또 헤세이 2년(1990), 아키 타카다시 역사 민속 박물관이 개관해 모리씨 관련 자료가 공개되어, 또 공원도 정비된 것으로부터 시민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의 기사를 다시 읽으십시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