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고국 (2/2)전국 시대 전반의 픽사

호소카와 고국

호소카와 고국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호소카와 고국(1484년~1531년)
출생지
오카야마현
관련 성, 절, 신사
아마가사키 성

아마가사키 성

오오나가 5년(1525) 호소카와 고국은 준남에게 호소카와 요시조가의 가독을 양도해 은거했습니다만, 흔적을 이어 준남이 그 해에 병사했기 때문에 당주에게 복귀합니다. 흔적이 없어진 고국은 종제의 아이(호소카와씨 줄다리)를 흔적 후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나가 6년(1526) 호소카와 고국은 일족의 칭찬을 믿고 가신을 주살합니다. 그런데 이 서살된 가신의 일족은 교토의 서쪽인 단바국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국도 쉽게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호기라고 본 것이 아와쿠니에 있던 세화 스미모토의 아들인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그 가신이었던 미요시 원장입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원장은 반 호소카와 고국의 상징으로서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의 차남, 아시카가 요시유키(12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동생, 1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에이의 아버지)를 세웁니다. 즉 현역의 장군인 형의 아시카가 요시하루에 대항하여, 동생 아시카가 의유를 아와의 나라에서 옹립했습니다.

다음 대영 7년(1527),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원장에게 옹립된 아시카가 요시유는 오사카의 사카이에 침출. 이 사카이에서 의사막부를 설립해, 아시카가 요시유는 「사카이 공방」이나 「사카이 다이키」라고 불렸습니다.
이렇게 교토에 있는 아시카가 장군가와 사카이 공방으로서 싸워 가게 됩니다.

  • 12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 호소카와 고국
  • 아시카가 요시유키(14대 아시카가 요시에이의 아버지), 호소카와 하루모토(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미요시 원장(미요시나가 케이의 아버지)

호소카와 고국과 아사쿠라 무네가쿠

오오나가 7년(1527) 2월 사카이에 의사막부를 세워 정권을 세운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원장은 단바의 반 호소카와 고국의 반란군과 손을 잡고 교토에 침공합니다. 호소카와 고국은 저항했지만 패하고 교토를 물리 쳤습니다.

같은 해 10월, 교토를 물리친 호소카와 고국은 에치젠국(현재의 후쿠이현 영북)의 아사쿠라 타카케이(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아버지)에 군사 지원을 요청해 타카케이는 오이즈부의 아사쿠라 종방을 파견. 호소카와 고국과 아사쿠라 무네가쿠는 교토에 진군해 도시를 탈환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대영 8년(1528) 3월, 아사쿠라 무네가쿠가 에치젠국으로 돌아오면 단독으로는 싸울 수 없는 호소카와 고국은 오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거물 붕괴와 고국의 최후

오미국으로 도망친 호소카와 고국. 고국은 그 후 2년 정도 각지의 다이묘를 의지해 방랑합니다. 그리고 향록 3년(1530) 비젠국(현재의 오카야마현)의 수호대 우라카미무라무네의 조력을 얻으면 다시 경에 침공.

교토로 돌아갈 수 있던 호소카와 고국은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배제하기 위해 사카이로 침공합니다. 이 호소카와 고국에 하리마국의 수호 다이묘 아카마츠 하루마사가 붙었습니다만, 우라카미무라무네와 사이가 나빴던 아카마츠 하루마사는 일전해 호소카와 고국을 배신합니다. 고국파는 총 무너져 호소카와 고국도 아마가사키로 도망했습니다(대물 무너짐).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 미요시 원장의 탐색에 몰두하는 호소카와 고국. 고국은 아마가사키에 있던 쿄야라는 쪽 염색가게로 도망쳤습니다. 쫓아가자마자 거기까지 오고 있습니다. 남색 가게의 쪽 병을 거꾸로 하고 그 안에 숨었습니다. 미요시 원장도 그렇게 되면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서 미요시가는 사과를 사 모아 아이들에게 「거처를 가르치면 사과를 하자」라고 높게 쌓아 올린 즙을 보여, 병안의 고국은 찾아내 버렸습니다.

향록 3년(1531) 8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3번째 입양이 되어, 마사모토의 사후 20년 이상을 정치의 중심에 있어 계속 움직인 호소카와 고국은 자해당해 버렸습니다, 향년 48 .

고국 사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세 번째 입양인 호소카와 고국은 거물 붕괴로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두 번째 입양인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교토를 누를 수 있었습니다. 하루모토는 사카이 공방이라고 불리는 아시카가 의유를 옹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토를 누른 하루모토는 상경할 수 있으면 장군은 누구라도 좋았기 때문에, 호소카와 고국이 옹립하고 있던 12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지지해 아시카가 의유를 버렸습니다.

이것에 반발한 것이 가신의 미요시 원장이었습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여기에서 유력한 가신의 미요시 원장을 희미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享禄4年(1532)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가신들의 추천을 받아 미요시 원장을 제외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정토 신종의 야마시나 혼간지에 일원을 일으켜 미요시 원장을 몰아넣는 일을 타진. 야마시나 혼간지 측은 이를 받아 「호화종을 비호하는 미요시 원장을 토벌한다」라는 명목으로 일원을 일으켰습니다. 미요시 원장은 사카이에 몰려 자해해 버립니다(享禄·천문의 난).
 
그런데 야마시나 혼간지의 일반은 타 종파에도 모순을 향해 나라에도 침공합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이에 놀라움 이시야마 혼간지와 결별, 호화종이나 기내의 다이묘의 도움도 받아 일소와 대립했습니다. 호소카와 고국의 사후에도 이렇게 혼란이 계속됩니다.

미요시 나가 케이의 출현

그런데 사카이에서 자해한 미요시 원장. 원장은 그 죽음 직전 사카이 공방 아시카가 의유와 스스로의 어린 아이들을 아와국으로 놓쳤습니다. 이 원장의 장남이 당시 10세였던 미요시 나가 케이입니다. 미요시 나가요시는 이듬해 아와 쿠니에서 사카이로 가신들과 돌아와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일소의 화목 알선에 성공했습니다. 여기에서 미요시 나가 케이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섬깁니다.

그런데 15년 후의 천문 17년(1548), 미요시나가 케이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추방했습니다. 여기에서 전국 시대의 킨키는 미요시 나가 케이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히토의 난의 동군 대장이었던 호소카와 카츠모토. 그 카츠모토의 아이로 쿠데타를 일으킨 호소카와 마사모토. 그 정원에 맞이한 양자들, 양 호소가와의 난을 일으킨 스미토와 고국. 이 호소카와 요시조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호소카와 마사모토로부터 이어진 3명의 양자들의 싸움, 양 호소가와의 난으로 싸운 호소카와 요시야가는 2번째의 양자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계통만이 남아 전국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이 계통은 에도시대에 들어가면 인사였던 육안국 미하루번 아키타씨의 가로로 남게 됩니다. 또 호소카와가 서류는 히젠 호소카와가를 섬기거나, 각지의 다이묘의 가신으로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전국으로 불린 시대가 시작되어 그 전반을 계속 싸운 호소카와 고국과 호소카와가. 호소카와가는 이렇게 전란의 세상을 다투고 평화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호소카와 고국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