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마사모토 (1/2)전국 시대의 불꽃을 끊은 남자
호소카와 마사모토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후기, 속에 전국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 전국시대는 응인의 난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는 오진의 난이 끝난 후에도 아시카가 장군가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권위를 떨어뜨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입니다. 마사모토는 자신에게 편리한 장군을 두었지만, 이 일이 막부의 권위를 떨어뜨려 전국 시대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그런 호소카와 마사모토를 봅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아버지는 오히토의 난의 동군 대장, 할아버지는 서군 대장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에 가는 세 개의 집, 사나미가, 하타야마가, 호소카와가의 “삼관령” 중 호소카와가의 종가, 호소카와 요시야가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오인의 난의 동군 대장이었던 호소카와 카츠모토.
어머니는 카츠모토의 정실, 야마나 희귀의 딸입니다.
어머니의 아버지, 야마나 구키는 무로마치 막부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의 살해된 가요시의 난에 동석해 말려들어 죽었습니다. 거기서 산명가의 동량, 산명종전은 죽은 희귀의 딸을 양녀로 한 후 호소카와 카츠모토에게 아내가 시킵니다. 야마나 무네전은 오히토의 난으로 서군의 대장이 된 다이묘입니다.
즉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아버지는 오인의 난으로 동군의 대장이 된 호소카와 카츠모토. 어머니는 오인의 난의 서군 대장이 된 야마나 종전의 양녀이며, 정원으로부터 보면 종전은 의리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싸운 오인의 난. 이 오히토의 난을 경계로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은 혼란에 혼란 전국 시대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성장한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전국시대의 입화를 끊게 됩니다.
오인의 난과 가독 상속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문정 원년(1466), 호소카와 요시조가 당주인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유명은 사토 아키 마루라고 말했고, 아버지 카츠모토는 마사모토에게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이듬해 오인의 난이 발발합니다. 오인의 난은 각지의 다이묘가의 집 소동에 끝을 발하고,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교토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싸움 중반의 문명 5년(1473) 5월, 아버지인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병사, 같은 해에 야마나 종전도 병사해 버립니다.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후를 받고,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단바, 섭진, 토사국의 수호 다이묘의 지위와 호소카와 요시가를 이어, 마사모토 8세 때입니다. 어렸던 마사모토는 호소카와가 지류의 전장가 당주 호소카와 정국에 지지를 받고 조타를 실시했습니다.
문명 6년(1474) 4월 3일, 서군방의 야마나 마사토요(야마나 종종의 손자)와 화목해, 응인의 난은 일단의 결착을 봅니다. 다만 싸움 자체는 완전하게는 종식하지 않고, 오인의 난의 종결은 문명 9년(1477)이라고 합니다.
문명 10년(1478)에 13세에 전복, 무로마치 막부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한자를 받고 마사모토라고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복 한 다음 해 일입니다. 탄바국 수호대인 나이토 모토사다는 이치노미야씨의 연공 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이치노미야씨의 30명 정도를 토벌했습니다. 거기서 이치노미야 미야우치 다이스케는 호소카와 마사모토를 납치해, 히토코를 일으킵니다. 이치노미야 씨의 일문인 이치노미야 켄나가가 이치노미야 미야우치 다이스케를 토벌하는 일로 일소를 가라앉혔습니다만,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4개월간 정도 유폐되었습니다.
9대 장군 요시히로와 육각가 토벌
그런데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장군직을 자신의 아이에게 선양합니다. 요시마사와 마사무로 히노 토미코 사이에 태어난 아시카가 요시오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장군직은 9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가로 옮겼습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관령에 맡겨졌지만, 장군 취임의 의례가 끝나면 사직(재직 9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토의 동쪽 옆, 미나미오미에 육각고요리라는 수호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육각고요토는 오진의 난 후에 불안정한 시세를 보고 스스로의 세력 강화를 목표로 합니다. 사찰이나 공가의 장원을 억지로 횡령해 스스로를 지지하는 국인중으로 나누는 일로 지지 기반의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로는 육각 고뢰의 토벌을 결의하고, 정원에게만 내의를 고하고, 양자는 극비중에 출진의 준비를 진행합니다. 아직 이 시점에서는 장군의 권위는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2만 이상의 병사가 장군 아래에 모였습니다. 육각고뢰는 스스로의 불리를 깨닫고 거성이었던 관음사성을 버리고 고가의 땅에 숨어 저항합니다. 이 때문에 요시히로는 1년 반이라는 기간을 오미의 진에서 보내야 하고 점차 정치에 대한 관심도 잃어 갔습니다.
그리고 재진중의 장향 3년(1489), 9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로는 오미국에서 병사했습니다. 재위 자체는 15년 정도였지만 25세의 젊음이었습니다.
10대 장군 의재와 히노 토미코
9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로는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차기 장군을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아시카가 장군을 조금 드러냅니다.
-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만의 5남으로 가요시의 난에서 암살
- 7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츠
-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의 차남으로 오히토의 난의 시대의 장군
- 9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오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장남. 25세에 병사
아시카가 요시오미에는 후계가 되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혈맥은 여기서 끊어집니다. 그러나 요시마사에는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의 3남 아시카가 요시시… 본래라면 9대 요시오가 성인할 때까지 연결의 장군이 될 것이었던 인물. 혹은 오인의 난의 원인의 일단을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의 4남 아시카가 마사지… 아시카가 존씨가 만든 관동을 통하는 기관, 가마쿠라 공방이 되도록 관동으로 하향했지만 혼란으로부터 넣지 않고, 후에 호리코시 공방의 조가 된 인물.
8대 아시카가 요시마사에는 이 두 남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의 가계에서 장군이 선택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호리코시 공방이라고 불리는 아시카가 마사치의 아이로 교토에서 스님이 된 아시카가 요시스미를 추구합니다.
8대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정실에서 정치에도 관여하고 있던 히노 토미코는 아시카가 요시시와 히노 토미코의 여동생 료코 사이에 생긴 요시를 추구합니다. 이 요시나가를 삼관령의 하나, 하타야마가의 하타야마 정장도 지지했기 때문에 장군은 아시카가 요시와 결정되었다.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입니다.
이 요시를 선택하기 직전, 8대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병사해 버립니다. 요시타카는 하타리 의시에 지지되어 하타야마 정장과 아버지의 정권을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막부내에서는 하타야마 정장과 아시카가 요시시의 권세가 증대합니다. 한층 더 의시가 돌아가자 하타야마 정장이 막부의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처음에 요시를 추구한 히노 토미코입니다. 히노 토미코는 남편인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없애고 나서 정치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부의정의 동의시와 여동생 히노 료코 사이에 생긴 요시나미를 추는 것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려고 했습니다만, 점차 막부에서 멀어집니다.
그동안 아시카가 요시스미를 추구했던 호소카와 마사모토 자신은 막부와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수험도와 가독 문제
그런데 호소카와 요시조가의 동량으로서 정치를 실시해, 아시카가 요시가 장군에 가면 막부와 거리를 둔 호소카와 마사모토. 공공의 면으로서 정치가의 측면을 보았지만, 프라이빗한 면도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야마후시 신앙을 믿고, 수험도의 수행을 실시해, 아타고의 법이나 타코 등을 배우기 위해 제국을 방랑한다는 특징입니다. 이것은 인외의 힘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여러 나라를 건너는 수험자가 가지고 있던 독자적인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신앙에 박혔다고도 합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