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1/2)전국 시대를 끝낸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여러분은 전국 시대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전국 시대의 삼영 걸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후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미카와의 오카자키(현재의 아이치현)에 태어나 전란의 세상을 끝내고, 조정보다 정이 대장군에 맡겨진 이에야스. 1603년에 260년간 계속되는 에도 막부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소개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전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의 소령주였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적남으로서 천문 11년(1543)에 오카자키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즈노 타다마사의 딸·대대(전통원). 이에야스의 유명은 다케 치요였습니다.
3세 무렵, 어머니의 형인 미즈노 노부모토가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의 오다가와 동맹했기 때문에, 오다가와 적대하고 있는 아버지의 히로타다는 어머니의 대대를 이연. 다케치요는 3살이 되어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천문 16년(1547년), 다케 치요는 6세로 이마가와씨의 인질로서 슨푸에 보내지게 됩니다. 마츠다이라가는 스루가·토에의 영주였던 이마가와가에 종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루후로의 이동의 도중, 들른 타하라성의 도다 야스히로에 배반되어 오와리국의 오다가에 보내집니다. 그러나 히로타다는 이마가와씨에의 종속을 관철했기 때문에, 다케치요는 그대로 인질로서 2년간 오다가에 머물러 놓았습니다.
2년 후에 아버지의 광충이 사망. 마츠다이라가를 비호하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인질교환에 의해 다케치요를 되찾습니다. 다케 치요는 그대로 스루후로 옮겨져 오카자키성은 이마가와씨로부터 파견된 성대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천문 24년(1555년) 3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씨 아래에서 전복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 편망을 받고 지로 사부로 모토노부라고 자칭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로 세키구치 친영의 딸·세나( 츠키야마 덴)을 부탁합니다.
이름은 나중에 할아버지·마츠다이라 키요야스의 편망으로부터 마츠다이라조인 사모토야스와 바꿨습니다.
이에야스가 전복했을 당시, 미카와국에서는 국인중 사이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가로쿠 원년(1558년) 2월, 이마가와씨로부터 오다씨에게 되돌아온 스즈키 시게츠네의 데라베성을 공격합니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초진이며, 성하를 구워, 그 주변의 마을들을 내립니다. 이 전공에 의해 요시모토로부터 손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의 독립과 오다 노부나가
에이로쿠 3년(1560),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상경을 목표로 군세를 정돈해 서쪽으로 향합니다. 이에야스도 선봉으로 참가했습니다.
처음에 요시모토에 저항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입니다. 그런데 桶狭間의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토벌됩니다. 오타카성에서 휴식 중이던 이에야스는 철수했습니다.
미카와까지 돌아오면 마츠다이라가의 보리사인 다이키지에 주둔한 후, 이마가와 쪽이 위험을 느끼고 철수한 오카자키성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마가와가의 산하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했습니다.
다음 영록 4년(1561), 이에야스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아라시카모라고 불리는 스루마를 헌상해 무로마치 막부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독립한 영주로서 막부의 승인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
또한 히가시 미카와의 이마가와 쪽의 거점이었던 우시 쿠보 성을 공격, 이마가와 씨로부터의 자립의 의사를 명확하게했습니다.
그 후도 이에야스는 후지나미 축의 싸움 등에 승리하여 니시미카와의 제성을 공략합니다.
그리고 이마가와 씨를 보는 한 오다 씨와 동맹을 맺은 백부 미즈노 노부모토의 중개도 있어 노부나가와 화목해 이마가와 씨와 단교해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었습니다(기요스 동맹).
이에야스와 노부나가가 회담하고, 동맹의 확인을 하고 관계를 굳히고, 나중에 동맹의 증표로서 슈오 타케 치요(신야스)와 노부나가의 딸 고토쿠와의 약혼이 맺어졌습니다.
에이로쿠 6년(1563년)에는 요시모토로부터의 편망인 「원」의 글자를 돌려주고 모토야스로부터 이에야스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에이로쿠 7년(1564년), 미카와 일향 일규가 발발하는 것도, 고심의 끝에 이것을 진압. 이렇게 오카자키 주변의 불안 요소를 없애자, 대이마가와 씨의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히가시 미카와의 도다 씨와 사이고 씨와 같은 토호를 아군에게 끌어 들여, 우가 덴씨와 같은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가 강한 적대 세력을 배제해 갑니다.
원강국에서 발생한 국인중의 반란(원주봉극)의 영향으로, 미카와국에의 대응에 늦는 이마가와씨와의 사이에 다카미군을 주전장으로 한 공방전을 펼친 후, 영록 9년( 1566년)까지는 히가시미카와·오쿠미카와(미카와 국부)를 평정해, 미카와국을 통일했습니다.
이때 이에야스는 니시미카와중을 이시카와 수정으로 히가시미카와중을 사카이 타다시로 맡겨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또, 미카와국을 통일해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때문에), 교토의 조정에 일해 종오위하 미카와 모리에 서임되어, 동시에 「도쿠가와」에 개성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자칭합니다.
이 「도쿠가와」의 성은 미카와 마모루에게 서임됨에 있어서, 조정의 선례에서 마츠다이라라고 지장이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의 개성이었습니다. 따라서 당분간 도쿠가와 성을 자칭한 것은 이에야스 혼자였습니다.
이마가와 침공과 다케다 신겐
에이로쿠 11년(1568), 카이국의 다케다 신겐이 이마가와 영 스루가에의 침공을 개시하면(스루가 침공), 이에야스는 사카이 타다시를 취차 역으로 토미에 할양을 조건으로 다케다씨와 동맹을 맺고, 토에쿠니 이마가와령에 침공하여 예마성을 공격해 떨어뜨립니다.
다케다씨와의 이마가와영 분할에 관해서, 도쿠가와씨에서는 오이가와를 경계로 동쪽의 스루가국을 다케다령, 서쪽의 도에가와국을 도쿠가와령으로 하는 협정을 맺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이로쿠 12년(1569), 시나노국(현재의 나가노현)에서 다케다 가신·아키야마 토라시게(시노토모)가 토에고국(현재의 시즈오카현 서부)에 침공해, 다케다씨와 적대 관계가 됩니다.
이에야스는 다케다가와 긴장 상태에 있는 가운데, 스루후성에서 본거지를 옮긴 이마가와씨 진의 가케가와성을 둘러싸고, 농성전의 끝에 개성 권고를 불러 씨 진을 내리고, 토에쿠니를 지배하에 놓았습니다 (토에 침공). 씨진을 비호하면 이에야스는 호조 씨야스의 협력을 얻어 다케다군을 물리칩니다.
모토가메 원년(1570년), 오카자키에서 도에에국의 예마(히쿠마)로 옮기면, 이곳을 하마마츠로 개명해, 하마마쓰성을 구축해 이것을 거점으로 했습니다.
모토가메 3년(1572) 노부나가와 반목한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다케다 신겐,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사이 나가마사, 이시야마 혼간지 등 반오다 세력을 규합해 노부나가 포위망을 기획합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측에 붙은 다케다 신겐은 도쿠가와령인 도에가와·미카와국에 침공(니시가미 작전)을 개시합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만, 노부나가도 포위망에의 대응에 고민하고 있어 오다가로부터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다케다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서상하는 다케다군 본대가 하마마쓰성에 다가갑니다만, 하마마쓰성을 유연하게 솔대로 삼하국에 침공하는 것처럼 진행되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이에야스는, 오다가로부터 원군에 온 제장이 농성을 주창하는 데 반해 다케다군을 추격.
그러나 그 결과, 기다리고 있던 다케다군과 싸우고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도쿠가와·오다 연합군은 참패(미카타가하라의 싸움). 그런데, 신겐의 발병에 의해 나가시노성까지 물러나, 신겐의 사망에 의해 다케다가는 철퇴했습니다.
다케다 가문의 니시가미 작전의 목욕에 의해 노부나가는 반오리타 세력을 격멸, 이에야스도 세력을 회복합니다.
이에 대해, 신겐의 후계자인 다케다 카츠요리도 공세에 나서, 이에야스는 다케다가와의 대치가 계속되었습니다. 텐쇼 3년(1575)에는 나가시노의 싸움에서는 주력을 가지고 다케다 씨와 싸우고, 다케다 씨는 숙로층의 주요 가신을 많이 잃고 대패를 피합니다만, 나가시노의 전 이후도 다케다가와의 대치는 계속됩니다.
그런 가운데, 노부나가로부터 정실·쓰키야마덴과 嫡男·마츠다이라 노부야스에 대해 다케다씨에의 내통 의혹이 걸립니다.
이에야스는 사카이 타다요시를 사자로 노부나가와 담판했지만, 노부나가로부터의 질문을 타다시는 대체로 인정했기 때문에 노부야스의 절복이 통달되어, 이에야스는 숙고의 끝, 노부나가와의 동맹 관계 유지를 우선해, 쓰키야마 전을 살해하고, 신강을 절복시킵니다.
텐쇼 10년(1582년), 노부나가는 이에야스나 호조가와 공동으로 다케다 영에 본격적인 침공을 실시합니다. 오다군의 시나노 방면으로부터의 침공에 호응해 도쿠가와군도 스루가 방면으로부터 침공, 다케다가의 가신을 이반시키는 등 해 스루가령을 확보했습니다.
다케다 카츠요리는 아마메산에서 자해하고 다케다씨는 멸망. 이에야스가 미카와에서 토에에 침공한 이래, 발걸이 10년 이상 다케다가와 대치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텐쇼 10년(1582년), 스루 하배령의 예를 위해, 오다 노부나가의 초대에 응해 거성·안토성을 방문합니다. 아즈치를 방문한 후, 노부나가의 추천으로 사카이를 유람했습니다. 그런데 교토에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자해했습니다.
이때 이에야스는 중신이나 소성중 등 소인원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가국의 험한 산길을 지나, 가타고시를 거쳐 이세국에서 해로에서 미카와국으로 겨우 돌아왔습니다(진군 이가 넘어).
미카와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적 토벌의 준비를 하기 시작합니다만, 동시에 다케다가에서 오다가의 소령이 되어 얼마 없는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시나노(현재의 나가노현)·우에노 (현재의 군마현)에 눈을 돌립니다. 이에야스는 다케다 씨의 유신·오카베 마사츠나와 요다 신쇼를 파견해 구 다케다가의 가신을 설득하는 한편, 8,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카이국에 들어가 병음합니다(텐쇼 임오의 난).
그런데 관동의 호조가도 5만 5,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아오이 고개를 넘어 시나노국에 침공.
이에야스는 호조와 대치했다. 여기에 도쿠가와군과 호조군의 전면 대결의 양상을 나타냈습니다만, 호조를 섬기고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가 도쿠가와군에게 되돌아가, 그 집요한 게릴라 전법 전에 전의를 상실한 호조군은, 이타베 오카에 유키사이를 사자로 이에야스에게 화목을 요구합니다. 이에야스는 호조가와 화목해 연척·동맹 관계를 맺고, 동시에 카이·시나노를 병용, 구령의 스루가·토에·미카와와 아울러 5개국을 영지하는 다이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나노·카이를 병용하고 있는 동안, 노부나가 사후의 오다가에서는 가신의 하시바 히데요시가 대두합니다. 혼노지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자해에 몰아넣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오다가 노부나가 차남 오다 노부오를 옹립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후, 노부나가의 손자의 삼법사(오다 히데노부) 를 오다가의 흔적으로 추측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와 노부오가 대립하게 됩니다. 거기서 노부오는 이에야스에 접근해 히데요시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이에야스와 히데요시는 군을 서로 나누어 오와리에서 대치했습니다만, 그 대치 사이에 히데요시측에서 모리나가가·이케다 항흥 등이 미카와국에 출병합니다.
그것에 눈치챈 이에야스는, 미카와국에 침공하는 모리나가가·이케다 항흥을 추적.
나가쿠테에 있어서 양군은 격돌해, 도쿠가와군은 모리·이케다세를 격퇴했습니다(고마키·나가쿠테의 싸움). 그 후,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은 하시바·도쿠가와 양군의 전면 충돌이 없는 채 추이합니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노부오의 쌍방은 화목해, 강화 조건으로서, 이에야스의 차남·아이 요시마루(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입양으로 했습니다.
텐쇼 13년(1585년)에 들어가면, 히데요시는 관백에 보임되어 도요토미 정권을 확립합니다. 이 기간 동안 이에야스와 히데요시는 냉전 상태가 계속되어 이에야스는 좀처럼 신종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텐쇼 14년(1586)에 들어가면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오를 통해 이에야스의 회유를 시도해, 실 여동생 아사히 히메(남명원)를 정실로 내보내고, 이에야스는 이것을 실로 맞이해,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의형제가 됩니다. 한층 더 생모·대정소를 아사히 공주의 편지로서 오카자키에 보냅니다. 여기서 이에야스는 상경해,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에 속견하면 도요토미가에 신종하는 것을 표명했습니다.
관동 이봉
텐쇼 15년(1587) 12월에 도요토미 정권에서 관동·오쿠 쿠니소 무사령이 내려져 이에야스에 관동·오쿠 쿠니(육오국·출우국)의 감시가 맡겨집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