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 타카타카(1/2)전국 제일의 군사
쿠로다 타카타카
전국 시대, 창이나 활·철포 등의 무가 뛰어난 사람도 있으면, 내정이나 축성이 뛰어난 사람, 싸우지 않고 지에 승부하는 사람까지 무장에도 다양한 타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쿠로다 타카타카는 지략이 뛰어난 참모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천하인에게 밀어 올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략을 발휘했습니다. 2014년 대하드라마 『군사관병위』의 주역이 되는 등 인기도 있습니다. 이번은 군사로서 유명한 구로다 타카타카의 평생에 대해 소개합니다.
쿠로다씨의 유래와 출생·청년시대
쿠로다 씨는, 가쓰가다케 산기슭의 오미국 이카군 구로다무라(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 기노모토마치 쿠로다)의 출신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타카타카의 할아버지·쿠로다 시타카시의 시대에 비젠국읍 쿠군 후쿠오카무라에서 하리마국에 들어가, 류노성주였던 아카마츠 마사히데, 후에 수호·아카마츠 하루마사 중신으로 어착성(현재의 히메지시 동부)을 중심으로 하리마 평야에 세력을 갖고 있던 전국 다이묘의 고지 칙직·정직 부자를 섬겼습니다.
코지 씨는 구로다 씨를 높이 평가. 천문 14년(1545)에 시게타카를 히메지 성대에 맡기고 시게타카의 아들, 쿠로다 노부타카(효고의 아버지)에게는 정직의 양녀를 아내가 하고, 코데라 성을 자칭하게 하고 있습니다.
천문 15년(1546) 11월 29일, 타카타카는 구로다 노부타카의 히메오로 하리마국의 히메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명은 만길. 에이로쿠 2년(1559), 어머니를 잃고, 문학에 익숙해지고, 그 후 에이로쿠 4년(1561)에는 코데라 정직의 근습이 되고 있습니다.
에이로쿠 5년(1562), 아버지와 함께 토호를 정벌한 것이 첫진이었습니다. 올해부터 「코지칸베에」를 자칭하게 됩니다. 에이로쿠 10년(1567) 무렵, 타카타카는 아버지·직류로부터 가독과 가로직을 이어, 고데라 정직의 조카에 해당하는 구시바시 이정의 딸·빛(테루)을 정실로 맞이해, 히메지 성대가 된다 합니다. 또한 사촌의 아카시 노리미와의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에이로쿠 12년(1569), 3년 전에 산인 산양에 세력을 치는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멸망되고 있던 아마코씨의 잔당의 타치하라 쿠즈나,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이 아마코 카츠히사를 옹호하고, 타지마국의 야마나 유호 야 우라카미 무네경 등에 후원되어 오토모 소네와 다다라하마에서 교전 중이었던 모토나리의 배후를 붙이는 형태로 이즈모국에서 재흥을 위해 결기(아마코 재흥군의 운주 침공). 모토나리는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8월 유유에게 키노시타 히데요시(후의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끄는 2만의 병사가 보내집니다. 한층 더 요시아키와 쇼우를 맺은 아카마츠 마사히데가, 히메지성에 3,000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오는 핀치에 휩쓸립니다.
정직은 이케다 카츠마사, 벳쇼 야스지 등에 공격당해, 종경은 우키타 나오야에 이반되어, 타카타카에는 300의 병 밖에 없는데도, 기습 공격을 하는 등, 2번에 걸쳐 싸워, 미키도리 아키노 원군 등도 있어 격퇴에 성공(아오야마·토기산의 싸움).
마사히데는 우라카미 종경에 공격받아 항복하고 있습니다. 이 후, 미요시 3인중이 일단은 세력을 세우고, 노부나가 포위망이 쳐져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관계도 험악해져 갑니다.
텐쇼 3년(1575), 노부나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타카타카는, 주군·코데라 정직에 나가시노의 싸움으로 다케다 카츠요리를 깨고 있던 오다씨에의 신종을 진언. 7월, 하시바 히데요시의 취지에 의해 기후성에서 노부나가에게 속견해, 노부나가로부터 명도 「압절 하세베」를 받고 있습니다.
텐쇼 4년(1576) 1월, 탄바국의 하타노 히데지가 아카이 나오마사 공격의 아케치 미츠히데를 공격(쿠로이성의 싸움)하고 노부나가보다 이반. 2월, 요시아키는 모리키모토(모토나리의 준손)의 영내의 토모노우라로 도망쳤습니다. 4월, 노부나가와 혼간지의 화목이 결렬. 7월, 휘모토의 삼촌·고바야카와 타카시 경하하의 수군의 장·우라종승이, 노부나가의 수군을 깨는(제1차 기즈가와구치의 싸움).
텐쇼 5년(1577) 10월에 장남의 마츠스마루(후의 구로다 나가마사)를 인질로서 노부나가의 곁에 보내고 있습니다.
노부나가는 노부키야마성의 전투에서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토벌한 후, 히데요시를 하리마로 진군시킵니다. 효고는 일족을 아버지의 은거성인 이치카와를 사이에 두고 히메지성의 남서쪽에 위치한 시가토군의 고후 산성으로 옮겨, 거성이었던 히메지성 혼마루를 히데요시에 제공, 스스로는 니노마루에 살고, 참모로서 활약한다 같이 갑니다. 타카나카는 히데요시 본대의 우에즈키성 공격에 따라, 사용성 공격에서는 다케나카 시게하루 등과 함께 선진을 맡고 있습니다.
오다에서 도요토미 가신으로
텐쇼 6년(1578) 3월, 벳쇼 장지가 대부분의 주변 호족을 끌어들여 반기를 들고(미키 합전), 이에 모리씨가 호응. 4월, 바다에서 우키타 나오가군 7,000과 잡가중의 병사가, 벳푸의 아폐성에 공격해 왔을 때에는 효고가 구원해 1,000의 병사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7월에 히데요시 본대는 노부나가의 지시에 따라 아마코 유신단을 남기고 우에즈키성을 포기하고 서사산까지 철퇴.
9월에 타카타카는 우키타 나오야를 조략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번에는 오다가의 중신으로 섭진국을 맡고 있던 아라키무라 시게가 노부나가에 대해 모반, 아리오카성에 농성했습니다 아리오카성의 전투). 이때, 주군의 고데라 정직도 무라시게에 호응하려 했기 때문에 타카타카는 무라시게를 번의시키려고 아리오카성에 탑승했지만, 성공하지 않고 반대로 유폐되어 버립니다.
텐쇼 7년(1579) 10월 19일, 혼마루를 남길 뿐이었던 아리오카성은 개성, 효고는 쿠리야마 리안에 구출되었습니다.
텐쇼 10년(1582), 모리씨의 무장·시미즈 무네지가 지키는 비나카 타카마쓰성 공략으로, 히데요시는 거대한 제방을 쌓아 물공격으로 했지만 잘 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효고는 배에 토낭을 쌓아 바닥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도록 헌책,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다카마쓰성 공격의 도중, 교토에서 혼노지의 이상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자해. 이상을 알게 된 타카타카는 히데요시에 대해 모리키모토와 화목해 미츠히데를 토벌하도록 헌책, 중국 대답을 성공시켰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합니다.
야마자키의 싸움에서는 텐노야마에 포진, 밑단의 나카가와 기요히데대를 쫓아내려고 하는 아케치군과 전투를 펼쳤습니다.
텐쇼 13년(1585), 시코쿠공격에 있어서, 사누키국으로부터 공격받은 우키타 히데가군에 군감으로서 참가해, 선봉으로서 제성을 함락시켜 갑니다. 우에다성에 대해서는, 이것을 미끼라고 간파하고 아바국으로 우회하는 등, 적장·장종가부 전 부모의 책략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요즘 다카야마는 타카야마 우근이나 가모 씨향 등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신해, 「시메온」의 세례명을 주어지고 있습니다.
분고 국 영주로부터 세키가하라 전투
규슈 평정 후의 텐쇼 15년(1587) 7월, 마가다케성을 비롯한 도요젠국 중의 6군(우사군 반군은 오토모 요시통령), 약 12만석을 주어져 나카츠성의 축성을 시작했습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