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타다오키 (2/2)히데요시코 키치의 칠장

호소카와 충흥

호소카와 충흥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호소카와 충흥(1563년~1646년)
출생지
교토부
관련 성, 절, 신사
고쿠라성

고쿠라성

나카츠 성

나카츠 성

야시로성

야시로성

가쓰류지 성

가쓰류지 성

타나베 성

타나베 성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

관련 사건

충흥은 신영지가 된 도요젠의 나라에 들어가면 바로 고쿠라성을 개수하여 번청으로 합니다. 이 토요젠국을 호소카와가가 다스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게이쵸 17년(1612) 도요젠국에 후나지마라는 섬이 있었습니다. 이 섬에서 두 명의 검호가 싸우고 한 사람이 사망합니다. 이긴 것은 미야모토 무사시, 죽은 것은 사사키 코지로입니다. 그래, 이때 행해진 것이 와류우섬의 싸움이었습니다. 제설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 쪽이 호소카와가, 혹은 호소카와가의 중신의 가신, 또는 객장(정식으로 부지되어 있지 않은 사무라이)이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후나지마는 사사키 코지로의 호를 취해, 와류지마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원화 6년(1620), 충흥은 병 때문에 가독을 3남의 충준에게 양도해 은거합니다.
그런데, 관영 9년(1632)의 이야기입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타다히로가 막부에서 개역됩니다. 이 가토가가 다스리고 있던 히고국 구마모토를 호소카와가가 국환에 의해 다스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영지는 더욱 늘어 약 55만국이 됩니다. 이때 충흥은 야쓰시로를 은거지로 다스렸습니다.
이 충흥에 따라 야쓰시로로 옮겨 온 조선인 도공, 김존우(우에노 키조)와 그 일족이 야쓰시로의 타카다야키(코다야키)를 창설합니다.

그리고 쇼호 2년(1645) 충흥은 사망했습니다, 향년 83.
전국 다이묘 중에서도 명문의 집에서 태어나 용맹한 전국 무장으로서, 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인의 1명으로서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전국 시대를 달려갔습니다. 이 후에도 구마모토는 호소카와가가 다스려 메이지까지 계속됩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연고의 땅

나가오카 쿄 가라샤 축제
교토부 나가오카 교토시는 호소카와 후지타카, 충흥이 다스린 카츠류지 성이 있던 장소입니다. 나가오카시 전역에 고분이나 신사 불각, 성터가 있어 역사에 물들인 마을입니다. 2004년(1992), 가쓰류지성을 정비해 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밑에 며느리 생긴 계란(가라샤)의 가마를 재현하는 순행을 실시하는 축제가 행해지게 됩니다.
매년 11월의 제2일요일, 「나가오카 가라샤 축제」로서 가마 행렬이 무늬가 되어, 그 밖에 음식 부스나 스테이지 이벤트 등 시민에게 사랑받는 축제가 됩니다.
야시로 성터 마츠이 신사
마쓰이 신사는 메이지 14년(1881), 호소카와가의 가신이었던 마츠이가의 구가신을 시작해,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제신은 히고 호소카와가 필두가로의 마츠이 야스유키입니다.
마츠이 야스유키는 원래 호소카와 후지타카 등과 함께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요시테루가 에이로쿠의 이상으로 돌아가면, 아시카가의 가신은 이산합니다. 마츠이 야스유키는 호소카와 후지 타카와 행동을 함께했습니다. 두 사람은 동등한 관계로, 처음에는 오다가에서도 취급됩니다. 그런데 후지타카가 단고국을 맡게 될 무렵부터 주종관계에의 형태로 바뀌어 필두가로가 되었습니다.
마츠이 야스유키는 분무가 뛰어나 호소카와가 밖에서도 눈길을 끄는 존재였습니다. 그 때문에, 에도 시대에 들어가면 마츠이가는 히고 호소카와가의 필두가로이며, 마츠이 야스유키의 아이에게 흔적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호소카와가로부터 입양을 받았기 때문에 호소카와가 일문에 준하는 집이 되어, 히고 야쓰시로 성주이며, 도쿠가와 가 나오 참의 자격도 가지고있었습니다. 호소카와 가약진을 지지한 집입니다.
이 마츠이 야스유키를 제신으로 한 신사, 마츠이 신사는 호소카와 타다코키의 주거가 있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 신사 중에는 수령 3백 수십년의 매화나무, 와류우메(가류바이)가 있어, 구마모토현 천연 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매화나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야쓰시로에서 백화의 종이 되는 인재출로요」라고 생각해, 스스로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명목입니다.
가쓰류지 성(쇼류지조)
가쓰류지 성은, 현재의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가쓰류지에 있던 성입니다.
무로마치 시대 전기, 산성국 수호 하타야마 요시나리가 군 대청으로 축성했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전국 시대에 들어가면 위치적으로 도시 근처에 있는 것으로부터 군사 거점이 되고, 종종 성의 성주는 바뀝니다.
모토가메 2년(1571),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야마시로 니시오카 지역을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이때 후지 타카는 카츠 류지 성주가되어 견고한 성으로 개수했다고합니다. 역시 도시에 가까운 소지마성과 함께, 도시를 지키는 거점으로서 노부나가도 중요시하고 있었습니다.
텐쇼 6년(1578) 8월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와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옥(호소카와 가라샤)이 혼인을 맺고, 신혼 생활을 보낸 성이기도 했습니다.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텐쇼 9년(1581)에 단고에 입봉해, 후지타카의 뒤에는 오다가의 대관이 카츠류지성의 성주가 됩니다. 그리고 에도시대 초기에는 이 지역 일대의 거점이 요도성이 된 일도 있어 가쓰류지성은 폐성이 되었습니다.
현재, 성이 있던 장소에는 가쓰류지성 공원으로서 정비되어 모의 망과 모의의 토루등이 왕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 레이와 원년(2019)에는 전시실이나 원내 간판 등이 신장되어 성의 출토 유물을 전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타나베 성
타나베성(타나베조)은, 교토부 마이즈루시에 있던 성으로 일명은 마이즈루성(부가쿠조)이라고도 합니다.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에는 단바국 수호소의 후신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텐쇼 6년(1578),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오다 노부나가의 생명에 의해 수호 다이묘의 일색가를 멸망시키고, 이 땅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야즈성을 거성으로 했지만 타나베성을 구축해 경영의 중심지로 합니다. 후지 타카의 은거 후에는, 충흥이 거성으로 했습니다.
타나베성으로 유명한 이야기는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게이쵸 5년(1600) 당주였던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권유를 차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에 아군한 다이묘는 도쿠가와 쪽에 붙은 긴키의 성을 공격합니다. 이 때 호소카와 후지 타카는 미야즈 성에 있었지만 후지 타카도 예외가 아니라 이시다 쪽으로 공격 당했습니다. 후지 타카는 미야즈 성에서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타나베 성으로 옮겨 농성합니다. 소세의 후지 타카에 대해 이시다 쪽은 15000의 병으로 둘러싸여 50일 싸웁니다. 그러나 후지타카를 잃는 것을 한탄한 후 양성천황이 사이에 서서 조정해, 후지타카는 성을 퇴거했습니다.
호소카와가는 에도시대에 들어가면 토요젠국 고쿠라에 전봉됩니다. 그 후, 쿄고쿠가, 마키노가와 영주가 계속 메이지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현재의 타나베 성터는 마이즈루 공원으로 되어 있으며, 타나베성 자료관, 천수대 석루 등이 부흥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성은 현재의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주오구에 있는 성으로, 별명 「은안성(金杏城)」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히고국 수호 기쿠치씨의 일족이 이 땅에 「쿠마모토성」을 쌓은 것이 시작으로 됩니다.
전국 시대도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들어가면 사사 나리마사가 영주로서 들어갑니다만, 나리마사는 경영에 실패해 절복하게 됩니다. 그 후 영주로 들어간 것이 가토 기요마사였습니다. 기요마사는 쿠마모토성의 장소에 새롭게 성을 구축해, 에도 시대까지 공사를 계속해 구마모토성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타다히로는 그 행동으로부터 번주로서의 자격에 의문을 갖고, 에도 막부는 가토가를 잡아 버립니다. 그 카토가 뒤에 들어간 것이 호소카와가였습니다. 호소카와가는 메이지 시대가 될 때까지 영주로서 군림하여 성의 확장을 계속했습니다.
메이지 시대가 되면 구마모토성은 육군의 시설이 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정부에 반항한 서남 전쟁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중요한 시설이며, 사이고군의 공략 목표가 됩니다. 구마모토의 땅은 양군이 싸운 격전지가 됩니다. 이 전투 직전, 구마모토 성의 천수각은 수수께끼의 대폭발을 일으켜 소실했습니다.
현재의 구마모토성은 櫓・성문・담이 현존해, 13동(櫓11동, 문1동, 담1동)이 나라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성터는 「구마모토성터」로서 나라의 특별사적 로 지정.
2016년(2016)에 일어난 구마모토 지진에 의해 피해해, 구마모토성은 부흥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호소카와 타다 흥의 기사를 다시 읽으십시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