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사 (1/2)산슈 총장
시마즈 요시히사
전국 시대, 도시가 있던 긴키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전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란을 이겨내고 지역을 통할 수 있는 것이 대두. 관동의 호조가, 중국의 모리가, 도호쿠의 다테가, 시코쿠의 나가소가베가 등입니다. 마찬가지로 규슈에서도 지역을 통일한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시마즈가입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시마즈 4 형제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사쓰마국에서 흥미를 끌어 규슈를 통일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번에는 시마즈 4 형제 중 한 명인 시마즈 요시히사를 봅니다.
사츠마의 시마즈가
시마즈씨는 헤이안 시대 말기, 후지와라 고섭가의 하나 근위가가 소유하고 있던 시마즈쇼(현재의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에 있던 일본 최대의 장원)로 현지의 관리를 실시하고 있던 관우로서 시작되어 합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생기기 직전, 겐토쿠 아침부터 사츠마국(현재의 가고시마현 서부)·오스미국(현재의 가고시마현 동부)·히나타국(현재의 미야자키현)의 3국의 지두에 임명되어 막부 성립 후에는 정식으로 시마즈 성을 자칭하고 수호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시마즈씨는, 무사가 통치를 시작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기로부터 존재해, 메이지 시대에 무사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하나의 장소를 통치해 계속한 아마 유일한 다이묘, 씨족입니다(이 외에 사타케 씨도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존재했습니다만 에도 시대 초기에 상륙국에서 출국국으로 국환이 되고 있습니다)
시마즈가의 성립 이후,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를 통해 시마즈가 내부에서 시마즈씨나 다른 국인중과의 반목, 내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 후기, 시마즈씨 일족 중에서 이작가의 시마즈 타다요시와 그 아키 타카히사가 대두해 시마즈가를 모아 갑니다. 이런 가운데 시마즈 타카히사의 적남, 시마즈 요시히사는 탄생했습니다.
요시히사의 어린 시절과 산슈(가고시마, 미야자키현) 통일
시마즈 요시히사는 천문 2년(1533), 시마즈 타카히사의 적남으로서 이사쿠성에서 태어납니다. 유명은 호라즈마루.
어린 시절은 어른스러운 성격이었지만, 시마즈가 중흥의 조, 할아버지의 시마즈 타다요시는 요시히사의 사람을 모으는 성격을 간파하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전복한 요시히사는, 할아버지 타다요시의 諱과 같은 마타 사부로를 자칭해,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의 편망인 의의 한자를 받고 의진, 나중에 요시히사로 개정했습니다(이하, 요시히사로 통일합니다) .
천문 23년(1554), 사츠마, 오스미국 속의 국인중과의 싸움에 참가해 초진을 완수합니다. 에이로쿠 9년(1566), 아버지의 타카히사가 은거하는 일에 의해, 시마즈가 16대 당주가 되었습니다. 모토가메 원년(1570)까지 사쓰마국의 국인중의 통일에 종사해 통일, 모토가메 4년(1573)에 오스미국의 국인중을 귀속시켜 오스미국을 모아 올립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40세에 흐트러져 있던 사쓰마국, 오스미국을 모아 올렸습니다.
시마즈가가 사츠마국을 평정하는 모토가메 원년(1570)보다 전의 이야기입니다. 사츠마국, 오스미국, 히나타국, 히젠국(현재의 구마모토현)이 접하는 마유코인의 소유를 둘러싸고, 시마즈가는 히나타국의 이토가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모토가메 3년(1572), 이토가는 3000의 군세로 시마즈 가령에 침공, 시마즈가는 요시히사의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를 대장으로 한 300으로 맞이 격격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복병 등의 작전으로 맞이하여 이토가를 괴멸시켜 쫓아냈습니다(키자키하라의 싸움).
이렇게 시마즈가에 대패한 이토가는 텐쇼 4년(1576), 차례차례로 가신이 이반해 시마즈가에 안장 교체해, 당주의 이토 요시유는 히나타국의 북근, 분고국의 오토모 종린을 의지해 도망쳤습니다 . 여기에 시마즈 요시히사는 사쓰마, 오구미, 히나타국의 3국, 산슈 통일을 이룬 것입니다.
이가와의 싸움과 큐슈 남부를 영향으로
히나타국의 이토 요시유가 오오토모 종린 아래로 도망쳤습니다.
텐쇼 6년(1578), 이토 요시유키를 보호한 오오토모 소네는 히나타국에 침공합니다. 소린 자신은 히나타국 북부무시가(현재의 오카오카시)에 머물러, 타와라 사오노부를 총대장으로 한 4만 3천의 병사를 남하시킵니다.
이에 대해 히나타국을 병거한 시마즈가는 타카성(현재의 미야자키현 아유군 기죠마치에 있던 성)에 말제의 시마즈 가구를 중심으로 한 병 3천이 처치됩니다. 성에 고치는 시마즈가와 고성을 둘러싸는 오토모가는 일진 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합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사쓰마국, 오스미국에서 병 2만을 이끌고 출진, 기습을 걸는 등 오토모가를 깨뜨렸습니다. 오토모가는 주였던 무장이 차례차례로 토벌하고 물러납니다. 시마즈 가문은 히나타 나라를 오토모 가문으로부터 보호했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전투의 경위를 보고, 오토모가가 수호를 맡고 있는 히고국(현재의 구마모토현)의 국인중이 시마즈가에 안장 바꿨습니다. 텐쇼 9년(1581)에는 구마 지방의 사라 씨가 항복, 이것을 귀순시켜 히고국의 대부분을 영향하에 둡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차분히 규슈 남부를 세력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히고국에 영향력을 두는 조금 전의 이야기.
텐쇼 8년(1580) 시마즈가는 오토모가와 화목을 맺습니다. 이 화목은 기내(긴키 지방)를 중심으로 패권의 확대를 계속하는 오다가가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킨키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는 중국 지방의 모리가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거기서 규슈 북부의 오토모가에 대해서 모리가를 공격시켜, 동서로부터 모리가를 끼워 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토모가는 시마즈가와 싸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거기서 오다 노부나가는 시마즈 요시히사와 토론하고, 요시히사는 오다가의 패권을 인정하고 노부나가는 시마즈가의 영토를 인정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붙었습니다. 시마즈가는 오토모가와 화목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시마즈가는 각지에 침공을 계속합니다.
오키타 축(오키타나와테)의 싸움과 규슈 통일
오토모가가 이가와의 전투에서 쇠퇴하면, 히젠국(현재의 나가사키현 사가현)의 류조지가가 세력을 늘려 옵니다. 시마바라 반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아리마가는 류조지가로부터 압박을 받아 시마즈가에 조력을 요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텐쇼 12년(1584), 시마즈 요시히사는 동생의 가구를 총대장으로 5000여명으로 2만 5천명의 류조지가와 싸웠습니다, 오키타 축의 싸움입니다. 이 전투에서 류조지가의 당주, 류조지 타카노부를 비롯한 일문이나 유력한 가래를 토벌해, 류조지가는 시마즈가에 굴복했습니다.
그리고 규슈에서 남은 것은 본령의 분고국에 곁들인 오토모 종린만이 됩니다. 시마즈 요시히사의 규슈 제압은 눈앞이었습니다. 오토모가와 화목을 맺기에 이른 오다 노부나가는 2년 전에 혼노지에서 자해하고 있습니다. 화목은 실질적으로 백지로 돌아갑니다. 시마즈가는 오토모가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바람 앞의 등이 된 오토모 소네는 새롭게 천하인이 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부탁합니다.
요시히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항복
텐쇼 13년(1585), 응원의 요청을 받아 히데요시는 시코쿠의 나가소가베가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가의 선진을 규슈에 파견합니다. 그런데 시마즈가는 이것을 요격해(도지가와의 싸움), 뒤쫓았습니다.
거기서 텐쇼 15년(1587), 일본 각지로부터의 군세를 만들어 도요토미가의 본군이 침공해 오면 시마즈가는 철퇴해, 규슈 각지의 국인중은 도요토미가에 내립니다.
요시히사는 면도하고 히데요시에 내려 시마즈가는 도요토미가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