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신겐 (1/2)풍림화산의 국기를 내건 카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
전국시대를 통해 일본을 통일해 에도막부를 열었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 이에야스가 싸워 패배하고, 또 존경한 인물이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의 다케다 하루노부(후년 출가해 다케다 신겐이라고 자칭했습니다)입니다.
또 이에야스와 함께 전국 삼영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다 노부나가도 하루노부와는 최대한 대립하지 않도록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전국을 대표하는 영웅들이 두려워한 타케다 신겐을 이번에는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케다 하루노부의 탄생
다케다 신겐은, 대영 원년(1520) 11월 3일, 카이쿠니 수호였던 다케다 노부토라의 아이로서 태어납니다. 태어났을 때에는 형이 있었습니다만, 욕절했기 때문에, 신겐이 질남이 되었습니다.
오오나가 5년(1525년)에는 동생 지로(나중의 다케다 노부시게)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부신토라의 애정은 동생으로 옮겨 신겐을 서서히 희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호는 관동지방에서 발흥한 호조씨(고호조씨)와 국경에서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관계로부터 천문 2년(1533), 호조와 대립하고 있던 오기야 우에스기가 당주의 우에스기 아침흥으로부터 딸(우에스기의 분)을 신겐의 정실로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문 3년(1534)에 출산 때에 난산이 되어, 우에스기의 분도 아이도 사망해 버렸습니다.
천문 5년(1536년) 3월, 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장군·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맑음”의 편망을 받고, 이름을 유명한 “타로”로부터 “맑음”으로 바꿉니다. 관위는 종5위 아래·대선대부에게 서위·임관되었습니다.
전복 후에는 왼쪽 장관·산조 공뢰의 딸인 산조 부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케다 노부토라는 스와씨와 무라카미씨 같은 시나노(현재의 나가노현)의 국인중과 동맹해, 시나노국 사쿠군의 침공을 진행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의 첫진은, 천문 5년(1536년) 11월, 사쿠군 카미노구치 성주 히라가 원심 공격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신겐은 천문 10년(1541), 신토라의 시나노 침공에 종군해 카이노다이라의 싸움에도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나노의 싸움을 마치고 고후에 귀진한 같은 해 6월, 이타가키 신방이나 단리 호랑태, 이미토미 호랑이 같은 중신들과 협의해, 신토라의 스루가 추방이 행해집니다.
신토라가 시나노국에서 개선해, 딸사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만나기 위해 스루가국으로 향했는데, 신겐은 국경을 봉쇄해 버렸습니다. 노부토라는 카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이마가와 요시모토 아래에서 생활해, 한층 더 생활의 장소를 교토에 옮깁니다.
다만, 이것은 하루신이 단순히 쫓아냈다는 것이 아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상담해 쌍방이 신토라의 생활의 귀찮은 것을 보고 있었으므로, 강제적으로 은거시킨 것이 진상인 것 같습니다.
이유로는, 신호가 신겐보다 동생의 노부시게를 익사하고, 신겐의 폐기(가독 상속권을 포기시킨다)를 기도하고 있던 것이나, 가신과의 접이가 나빴던 것 등, 하루신이나 가신과 인간 관계의 접이 나쁜 때문에 원인으로 간주됩니다.
이렇게 다케다 신겐은 카이 타케다가 제19대째의 가독을 상속했습니다.
가독을 이어받은 신겐
천문 10년(1541), 다케다 신겐은 약 20세에 다케다가를 이어받습니다.
신겐의 아버지, 신토라가 주변에서 대립하고 있던 것은 사가미국(현재의 가나가와현 서부)의 호조가(후호조가)만으로, 주로 시나노국 동신 지방의 오현군(현재의 나가노현 아오키) 마을, 나가와마치) 등을 공략 도중이었습니다. 신겐은, 신토라로부터 가독을 빼앗으면 노선 변경을 실시해, 시나노국 남신 지방의 스와(현재의 나가노현 스와시)로부터 침략을 개시합니다.
약 4년에 걸쳐 난신 지역의 스와·이나를 빼앗으면, 천문 13년(1544)에는 대립하고 있던 호조가와도 화목. 호조가와 스루가국(현재의 시즈오카현 동부) 이마가와가와 대립하면 중재를 실시하는 등 외교력도 발휘해, 주변국과의 관계를 안정화시킵니다.
주변국과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면 본격적으로 신슈에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시나노 수호의 오가사하라 장시, 오현 영주 무라카미 요시요시 등과 대치합니다. 무라카미 키요아키란, 우에다하라의 싸움, 숫돌 무너짐 등으로 다케다 하루노부를 지지한 이타가키 신방, 甘利虎泰 등 많은 장병을 잃고, 신겐 자신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약 10년에 이르는 침공으로 천문 22년(1553), 무라카미 요시요시는 에치고(현재의 니가타현) 국주의 나가오 경 호랑이(후의 우에스기 겐신)의 아래로 도망갈 것입니다. 이렇게 히가시노부 지방도 다케다가의 지배하에 들어가 신노부는 기타노부 지방을 제외한 시나노를 거의 평정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 우에스기 켄신
무라카미 요시요시를 비롯해 다케다 신겐에 쫓겨난 신슈의 무장이 의지한 것이 나가오 경호(나라노 우에스기 겐신)입니다.
에치고 수호대의 나가오 위경의 아이로 태어나 신겐보다 10세 연하였습니다. 전국시대에서도 굴지의 전능으로 여겨져, 에치고를 통일한 것 외에, 관동이나 신슈(현재의 나가노현) 북부, 호쿠리쿠 지방(에치중국 이서)에 자주 출병해, 그 신 걸린 전적으로부터 「군신」이나 , 「에치고의 용」등이라고 불립니다.
사가미의 호조가에 쫓겨 에치고로 도망쳐 온 관동 관령 카미스기 헌정은 경호를 의지합니다. 경호는 헌정의 입양이 되어 야마우치 우에스기씨의 가독을 양도해, 무로마치 막부의 중직인 관동 관령을 계승했습니다. 나가오가에서 우에스기가로 성을 바꾸고 관동관령이 되면 에치고에서 관동으로 원정하고 호조가와 싸웁니다.
또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에 침공했을 당시, 영지를 쫓긴 오가사와라가와 무라카미가는 경호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시나노를 되찾기 위해, 경호는 에치고에서 출진해 다케다 하루노부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경호랑이 키타시나노(나가노현 북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운 가와나카지마의 싸움.
가와나카지마의 싸움은, 합계 5회 행해졌습니다. 그 중 유명한 싸움이 에이로쿠 4년(1561)에 일어난 4번째 싸움입니다.
제4차 싸움은 치곡가와와 시가와가 합류하는 삼각형의 평탄지인 가와나카지마(현재의 나가노현 나가노시 남교)로 추정되고 있어 하치만하라 사적공원(일명 카와나카지마 고전장)이 주전장이다 라고 합니다.
경호는 교토에 상경해 장군·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배모합니다.
그래서 관동관령 취임을 정식으로 허용하였습니다. 에이로쿠 3년(1560), 대의명분을 얻은 경호는 관동에 출진. 관동의 여러 다이묘의 대부분이 경호에 붙어, 그 군세는 10만으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호조 씨야스는 결전을 피해 오다와라성(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 농성합니다. (오다와라성의 전투).
위기에 빠진 호조씨 야스시는 동맹자 다케다 신겐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신겐은 이에 부응하여 키타시노에 침공. 가와나카지마에 카이즈성(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초)을 구축해, 경호의 유수로 수박이 된 에치고를 위협합니다. 이윽고 간토 제장의 일부가 마음대로 철병하자, 경호는 오다와라성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관동제압을 목표로 하는 경호에 있어서, 배후의 시나노와 에치고와의 국경을 굳히는 것은 급무였습니다.
에이로쿠 4년 8월, 경호는 에치고국을 진발하여 젠코지를 경유하여 처녀산에 포진합니다. 이에 대해 다케다 신겐은 카이즈성에 들어가, 대진하여 교착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교착 상태에 들어가 장난에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타개하기 위해, 다케다가는 작전을 세웁니다.
카이즈성에 들어간 다케다의 군을 2개로 나누고,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본대가 우에스기 가의 정면인 하치만바라로 이동해, 남은 하나가 우에스기 가의 뒤로 돌립니다.
뒤로 돌린 군이 우에스기 가가 있는 처녀산에 몰려들어 놀란 우에스기 가가 정면의 하치만바라에 나온 곳을 하루신의 군이 매복하고 있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것을 「기목조작전」이라고 부릅니다.
9월 9일, 작전에 따라 다케다가는 이동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경 호랑이는 카이즈 성에서 밥을 먹을 때의 연기가 언제나 많기 때문에 다케다가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우에스기가는 일체의 소리를 내는 것을 금지하고, 그늘에 승리 은밀하게 아내 여산을 내립니다.
하루신은 새벽, 안개 깊은 하치만바라로 이동하여 포진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신의 눈 앞에 안개 속에서 군세가 나타납니다. 아내 여산에서 내려온 우에스기의 군세였습니다. 다케다가는 갑자기 나타난 우에스기의 병사에게 밀려 방전 일방이 됩니다.
이 때, 우에스기의 군으로부터 단지 일기, 다케다 하루노부의 진에 빠져들고, 하루노부와 칼을 섞은 무장이 있었습니다. 우에스기 경 호랑이입니다. 경호가 칼을 휘두르고 하루신이 군배(병에 지시를 할 때 흔드는 지시봉)로 받아들이는 전설적인 장면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싸움이 진행됨에 따라, 신겐의 남동생인 다케다 노부시게와 야마모토 레이스케, 모모카타 호랑이, 하츠가노 타다시 등 무장이 토사, 타케다 본진도 괴멸 직전이 되는 등 위기적 상황에 몰린다.
그러나 낮전이 되면 아내 여산의 뒤로 돌고 있던 타케다의 별동대가 하치만하라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우에스기가 끼어 쏠 수 있습니다. 형세 불리한 경호호는 병사를 끌어 타고 강을 도하하여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이렇게 격전이 된 제4차 카와나카지마의 싸움은 막을 닫았다.
다케다 신겐과 오다 노부나가
우에스기 경호랑과 종종 대치하고 있던 다케다 신겐입니다만, 그 사이에도 주변국에 정력적으로 침공하고 있습니다.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에서 관동 방면으로 진출을 생각하고 있던 신겐은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에 침공합니다. 또, 동맹 관계에 있던 스루가국(현재의 시즈오카현 동부)의 이마가와 집이었습니다만, 협협의 싸움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토벌되면 이마가와령에 침공해 병음합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