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마사노리(1/2)가게가타케의 칠본 창

후쿠시마 마사노리

후쿠시마 마사노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후쿠시마 마사노리(1561년~1624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히로시마 성

히로시마 성

기요스 성

기요스 성

관련 사건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이상에 빠진 후, 천하인이 된 무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그 히데요시에는 작은 성으로서 많은 젊은이가 섬겼습니다. 카토 기요마사, 이시다 미츠나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입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국에서 태어나 히데요시의 친척이라는 전수로 섬기는 일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돕고 다이묘로 올라갑니다. 이번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다이묘가 되어,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분전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생애를 해설합니다.

히데요시와의 관계와 어린 시절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영록 4년(1561), 오와리 국해동군 니츠데라무라(현재의 아이치현 아마시)에서 태어납니다. 유명은 바둑이라고 말해, 가게야를 경영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부(마사노부는 장인이었다고도)하에서 자랍니다.
어머니는, 키노시타 히데요시(후의 하 시바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대정소)의 여동생이라고 말해, 정칙과 히데요시는 나이의 종제라는 것이 됩니다. 그 인연에서 정칙은 소년이 되면 히데요시의 성이 되어 섬기게 되었습니다.

텐쇼 6년(1578), 하리마 미키성 공격으로 초진을 장식해, 로고 200석을 받았습니다. 텐쇼 10년(1582), 혼노지의 이상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해 토벌됩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야마자키의 싸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원을 토벌했습니다. 정칙도 가쓰류지 성을 공격하는 등 군공을 올려 300석을 가증되어 500석 돌거리가 됩니다. 젊은 날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하시바 히데요시 아래에서 용감하게 싸워 성장해 갔습니다.

가게가타케 전투와 청소년기

야마자키의 싸움에서 하 시바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쓰러뜨리면, 오다가 안에서 주도권을 둘러싸고 오다가의 내부에서 대립했습니다. 특히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 시바 히데요시와 오다가의 집안에서도 필두였던 시바타 카츠야가 싸웁니다.

텐쇼 11년(1583), 대립하고 있던 하 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야와는 싸우게 되었습니다. 가게가타케의 전투입니다. 이때, 히데요시의 고성이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카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지, 카타기리 카토모토, 히라노 나가야스, 사와야 타케노리, 카토 요시아키의 일곱이 크게 분전해, 후에 「카게가타케의 칠본 창」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사노리는 시바타 카츠야의 옛부터의 여력으로 카가쿠니 다이세이지 성주였던 친향가를 토벌 1번 창, 1위 목을 올려 일약 5000석(다른 6명은 3000석)의 영지를 주어져 합니다.

하 시바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시바타 카츠야를 깨고 패권을 굳혔습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 후,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 네고 공격, 시코쿠 평정, 규슈 평정의 전투에 출진해 그 공적이 인정되어 텐쇼 15년(1587), 이요국 이마바리 11만 3천여석을 주어져 대명격이 되었습니다.

조선출병

분록 원년(1592)부터 시작된 조선 출병에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5번대의 주장으로 도해합니다. 그런데 이 조선 출병 사이에 도요토미가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분로쿠 4년(1595),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지가 절복됩니다. 이때, 정칙은 일본에 있었습니다.
정칙은 히데요시에게 명령을 받았고, 히데요시 복부의 명령을 전하러 갔다. 같은 해, 히데지가 맡고 있던 오와리국 기요스를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맡게 됩니다.
게다가 게이쵸 3년(1598) 시종에게 서임하여 관위를 얻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정칙이 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확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 도요토미가의 내부에서 대립이 일어납니다. 도요토미 가자지사의 가신 중 카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의 무단파와 행정이나 후방의 지원을 실시하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문치파와 어울렸습니다.

조선 출병 동안 현장에서 싸우고 있던 무단파는 문치파가 히데요시에 대해 정확한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불만스러웠다. 대립은 오대로의 1명, 마에다 토시야가 사이에 서서 억제되고 있었습니다만, 마에다 토시야가 게이쵸 4년(1599)에 사망합니다.

거기서 이가의 사망 후, 무단파는 문치파의 필두로 눈에 띄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를 습격하려고 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무단파로부터의 습격 전에는 저택을 빠져나갔습니다. 5대로의 1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이에 들어가 조정해, 무단파를 달래고, 이시다 미츠나리에는 은거시켜 거성인 다니야마성에 서식시켰습니다.

이렇게 이시다 미츠나리는 중앙인 교·오사카에서 실각해, 무단파는 일단 달래졌습니다만, 미츠나리에 대한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특히 불만을 안고 있어, 이 관계의 얽힘이 세키가하라의 싸움에 이어 갑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생전, 여러 다이묘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단파와 문치파와의 알선으로 움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와는 昵懇의 사이가 됩니다. 이에야스는 스스로의 이부동생(쿠마츠 마츠다이라가의 마츠다이라 야스모토)의 딸, 만텐히메를 정칙의 아이(정칙의 누나의 아이를 입양으로 한 후쿠시마 마사유키)에게 아내가 시킵니다. 이렇게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는 급속히 다가갔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쵸 5년(1600) 아이즈의 우에스기가가 도쿠가와가에 반기를 휘두른다. 도쿠가와가는 우에스기가의 행동을 도요토미가에의 반항으로 하고 토벌군을 결성해 아이즈로 향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종군했습니다. 그런데 관동까지 오면 오사카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휘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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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