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2/2)전국 제일의 출세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략 3개월 후의 텐쇼 10년(1582) 10월, 시바타 카츠야는 타키가와 일익이나 오다 노부타카(오다 노부나가의 3남)와 연명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의 탄핵상을 각 다이묘에게 보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10월 15일,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실시합니다. 상주는 하 시바 히데카츠(오다 노부나가 4남)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히데요시에 의해 행해지고, 내외에 노부나가 후에는 하 시바 히데요시가 주도해 나가는 것을 인상 붙였습니다.
다음 텐쇼 11년(1583) 4월, 시바타 카츠야와 하시바 히데요시는 군을 이끌고 대치하고 오미국에서 싸웁니다. (카케가타케의 싸움) 이 싸움에서 시바타 카츠야는 패배하고 자해했습니다.
여기에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다가 안에서의 정쟁에 승리해 섬기고 있던 오다가를 세력하에 거둘 수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천하 통일
텐쇼 12년(1584), 하 시바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오(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와 대립. 노부오는 도카이 지방에서 일대 세력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담을 요구하고, 그 외에 시코쿠의 나가소가베씨, 기슈의 근래, 잡가중에게도 응원을 요구 대립을 깊게 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사태에 대해 시종, 우세를 유지했습니다만 코마키 나가쿠테의 싸움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 사태는 교착합니다. 거기서 사태의 타개를 도모하기 위해, 당초 대립하고 있던 오다 노부오와 화목, 그 후에 도쿠가와가와도 융화를 도모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하시바 히데요시의 산하에 납입했습니다.
그리고 텐쇼 14년(1586), 하시바 히데요시는 조정보다 도요토미의 성을 받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라고 자칭하게 됩니다. 전년에는 공경의 최고위인 관백에도 취해 있어 인신위를 다했습니다.
그 전후, 텐쇼 13년(1585)에는 시코쿠를, 텐쇼 15년(1587)에는 규슈를 제패, 텐쇼 18년(1590)에는 오다와라 정벌을 실시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해 갑니다 .
조선출병과 그 마지막
텐쇼 19년(1591), 동생의 하시바 히데나가와 방금 태어난 아이, 츠루마츠를 잇따라 죽습니다.
거기서 조카의 도요토미 히데지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해, 스스로는 타이코(전관백의 존칭)라고 불려 2원 체제를 깔았습니다.
같은 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침공 '당진'을 전국에 포고. 규슈에서 한반도에 공격해 들어간 히데요시의 군은 서전이야말로 순조롭게 진군합니다만, 명(중국)의 원군이 나타나면 전황은 교착해, 강화를 도모합니다.
분로쿠 2년(1593) 히데요시의 아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분로쿠 4년(1595), 도요토미 히데지의 모반이 오르고 그 결과, 히데지는 자해를 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도요토미가 가운데 고타고타가 일어나는 가운데, 문록 5년(1596)명과 진행하고 있던 강화협상이 결렬되어 버립니다. 히데요시는 다시 한번 조선 출병을 했습니다. 진군한 군은 각지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제압해 갔습니다만, 싸움은 장기화합니다.
그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게이쵸 3년(1598)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었습니다, 향년 62.
도요토미가는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어졌습니다만,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의 공헌을 부탁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후에 대두해 가게 됩니다.
남동생 히데나와 아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많은 사람들이 지탱하면서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 중에서도 히데요시의 천하취에 가장 공헌한 것이, 아내의 「네네」(고다이인)와 친동생의 하시바 히데나가였습니다.
네네는, 오다가의 가신이었던 스기하라 정리의 차녀로서 태어납니다. 이모였던 아내의 아사노가에 양녀에 들어가, 거기에서 히데요시와 연애 결혼에 의해 아내입니다.
도요토미가는 남편의 히데요시와 아내의 네네의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고, 또 그 높은 견식과 정치력에 의해 도요토미가(그 이전의 키노시타가, 하 시바가가 주인이지만)를 쌓아 올려 갔다.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 저작 '일본사' 중에서 네네를 '왕비' 혹은 '여왕'으로 표현하는 등 도요토미가의 내향의 일부터 외교까지를 맡고 남편을 도왔습니다.
하 시바 히데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부제입니다. 유명을 「코타케」라고 부르고, 오랫동안 「코이치로」라고 개칭했습니다. 형의 히데요시 아래를 섬기게 되면 기노시타 코이치로 나가히데(후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가 흔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히데자를 머리에 가져와 히데나가라고 자칭하게 됩니다)라고 칭했습니다 .
혈연이 적었던 히데요시는, 히데나가에게 내향의 취지를 맡기고, 히데나가도 그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특히 히데요시와 달리 온후한 성격이었던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의 단점을 보충해, 다른 다이묘의 히데요시에의 집성을 의뢰받았다고 합니다. 이 아내인 「네네」와 동생의 하시바 히데나가가 도요토미가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가하마 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텐쇼 원년(1573), 아사이가 공략의 공에 의해 키타오미의 영지를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주어진 당시, 이마하마라고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의 긴 글자를 배령해 나가하마로 개명합니다. 오타니성이나 다케우지마 호쿠지 절의 자재를 이용해 축성합니다.
축성한 성은 호수에 이시가키가 잠긴 수성으로, 성으로부터 직접 배로 비와코에 나왔다고 합니다.
성시는 오타니성의 성하를 그대로 옮겨 현재에도 당시의 모습을 남기고 있습니다.
나가하마에서는, 성을 구축하는 성시를 발전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칭찬해, “나가하마 출세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오사카 성
오사카성이 있는 장소는 북쪽에 요도가와(현재의 오가와, 네야가와)가 있어 교토와 세토나이카이를 연결하는 요충으로서 항구가 있었습니다. 또 사방으로 늘어나는 가도도 있는 것으로부터, 옛부터 발전해 왔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중기, 혼간지의 연여가 은거소로서 이시야마 혼간지를 이 땅에 창건해, 그 주위에는 테라우치마치도 퍼져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모토가메 원년(1570)부터 시작되는 이시야마 합전에 의해, 혼간지와 오다 노부나가와는 10년에 이르는 싸움을 실시합니다. 이시야마 합전 자체는 평화 안에 끝났습니다만, 이 평화 직후, 이시야마 혼간지는 신비의 실화에 의해 소실합니다.
텐쇼 11년(1583) 하시바 히데요시는 구로다 다카타카를 총봉행으로 이시야마 혼간지의 터에 오사카성을 축성.
히데요시 자체는 그 후 교토의 쇼라쿠제 후시미성으로 옮겨 살았습니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아, 히데요리가 이 성에 살고 오사카 겨울의 진, 여름의 진을 맞이합니다. 오사카의 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오사카성은 낙성하고, 히데요시가 만든 오사카성은 도쿠가와가에 의해 묻혀 버렸습니다.
그 묻은 후 도쿠가와 가문은 새로운 오사카 성을 구축했지만, 막부 말기의 소란 속에서 소실.
현재의 오사카성은 시민의 모금에 의해 쇼와 초기에 지어졌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축제
- 太閤 축제 (나고야)
-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오와리 나카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지입니다. 이 장소에 메이지 1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신으로 한 도요쿠니 신사가 세워졌습니다. 이 나고야에 있는 토요쿠니 신사가 창건된 이래 「토요쿠니 신사 대례제」가 행해져, 전후 얼마 되지 않을 무렵에 대례제로부터 파생하도록 「타이코 축제」가 탄생했습니다.
「타이코 축제」는 각 마을 내에서 가마와 춤이 반죽 걷고, 첫날에는 북과 민요가 피로되어, 둘째 날에는 환력을 축하하는 토요타 섬두건의 행렬이나 아이들이 반죽 걷는 등 마을을 들고 축제를 기대 합니다. - 키노시타 축제와 타이코 축제(교토)
- 교토 히가시야마에 있는 신히요시 신궁 경내에 「토요쿠니 신사」가 있습니다.
이 토요쿠니 신사는 에도 막부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되어 에도 시대를 통해서는 「키노시타사」(이 원래의 야시로)라고 불렸습니다. 「키노시타샤」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초의 성 「키노시타」, 「신히요시 신궁」은 어린 시절의 이름 「히요시마루」에서 이름을 붙여 막부의 감시를 피해 에도 시대를 통해 제사를 계속한 신사입니다 . 에도 시대가 끝난 게이오 4년(1868), 메이지 천황이 도쿄에서 오사카에 행행했을 때에 들러 토요쿠니 신사의 재흥을 포고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시대에 토요쿠니 신사로서 사랑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절에서 행해지는 「타이코 축제」는 경내에서 행해져, 다회나 노, 프리마켓을 실시하는 등 교토의 사람들에게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고 있습니다. - 도요쿠니 신사 타이코 축제(오사카)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스린 오사카의 땅. 이 오사카에 메이지 원년, 메이지 천황이 행행되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도록(듯이) 말해진 것으로, 메이지 6년 현재의 나카노시마 공회당의 땅에 토요쿠니 신사가 창건되었습니다. 다이쇼 원년, 나카노시마 중앙공회당의 건설을 위해, 현재의 나카노시마 부립 도서관의 서방 공원 내에 이전, 쇼와 31년에는 오사카 성내를 이전지로서 옮겨졌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있어서 「타이코우씨」 「호코쿠씨」로서 사랑받아 매년 히데요시의 내일에 성령을 위로하는 신사로서 타이코 축제가 집행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