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1/2)전국 제일의 출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로마치 시대 후기, 세상이 거친 전국으로 불린 시대. 그 전국 시대에 있어, 알몸 일관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고, 무사라고도 할 수 없는 소품으로부터 두각을 나타내, 오다가의 유력한 무장이 되어 갑니다. 한층 더 노부나가가 비운 가운데 쓰러진 후, 오다가의 세력 다툼에도 이겨 천하를 통일해 갔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출생과 방랑의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문 6년(1537),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고(현재의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에서 태어납니다. 출자는 분명하지 않지만, 농민, 혹은 하층 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유명을 「히요시마루」라고 말했습니다. 친아버지를 빨리 죽고 계친과 접해가 나쁘고, 집을 뛰쳐 나온 히요시마루는 행상이나 야도를 하면서 각지를 돌았다고 합니다.
청년기, 히데요시는 키노시타 후지요시로라고 자칭해, 도카이도를 다스리고 있던 이마가와 가가신, 마츠시타 카베에를 섬겼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츠시타가도 나옵니다. 젊은 날의 히데요시는 이렇게 각지를 방랑해 보냈습니다.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에도 시대에 쓰여진 '그림책 타이코 기'와 '타이코 소성기'에 쓰여있는 것이 널리 전해져 출생의 집이나 생일 등 자세한 것은 정확하게 전해졌다. 그렇지 않습니다.
키노시타 후지요시로, 오다가를 섬기다
천문 23년(1554), 키노시타 후지요시로 17세경.
오와리국의 일부를 맡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소품(봉공인, 소사)으로 봉사합니다. 잘 일하는 소품으로 눈에 띄는 후지요시로는, 기요스성의 보청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때 일화로 유명한 것이 풀 이취의 이야기입니다. 노부나가의 풀 이취를 하고 있던 후지요시로는 겨울의 날에 노부나가의 쿠사이를 그대로 따뜻하게 해, 노부나가의 신을 때에 내놓은 것으로, 주인에게의 충의를 알게 된 노부나가가 후지요시로를 건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오다가는 미노국(현재의 기후현)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후지요시로는 사이토가의 가신을 계략에 의해 내리고 있습니다. 내린 츠보우치씨에 대한 안도장이 「기노시타 후지요시로 히데요시」명의로서 현존하고 있어, 히데요시의 이름이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로 됩니다.
또 에이로쿠 9, 10년(1566, 67)에, 스미타 밤새 성 건설에 공적을 올렸다고 하는 일화가 있어, 미노국의 국인중이었던 하스카 마사카츠, 마에노 나가야스와 사이토가의 무장이다 타케나카 반베에를 부하로서 짜넣고 있습니다. 이렇게 키노시타가로서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 갔습니다.
모토가메 원년(1570) 4월, 오다가는 에치젠국(현재의 후쿠이현 영북)에 아사쿠라가 토벌을 위해 진군해 후지요시로도 종군합니다. 그런데 가나가사키까지 진행된 곳에서, 동맹 관계에 있던 아사이가의 배신에 맞추어 배후를 습격당합니다(가네가사키의 퇴구). 히데요시는 전군의 한사람을 맡고 수술을 들었습니다. 그 후, 오다가는 오미국 북부(현재의 시가현 북부)에 있던 요코야마성을 빼앗고, 후지요시로에게 성대를 맡겼습니다.
모토가메 3년(1572), 후지요시로는 오다 가 중신이었던 단바 나가히데, 시바타 카츠야에게 아야카로 묘모를 하 시바성으로 바꾸고, 하 시바 히데요시라고 자칭합니다.
하시바 히데요시와 출세 계단
텐쇼 원년(1573), 오미국 북부를 영위하고 있던 아사이가가 오다가에 의해 멸망되면, 그 영지 중 삼군을 하시바 히데요시에 준다. 히데요시는 이마하마의 땅을 「나가하마」로 바꾸어 나가하마성의 성주가 되었습니다.
나가하마를 다스린 히데요시는 연공과 제역을 면제했기 때문에 근교보다 사람이 모여 활기차고 있습니다. 그 모인 자 중에서 구 아사이 가가신이나 근교의 국인중을 부하에 짜넣어, 키노시타가를 크게 해 갔습니다. 이 후, 오다가가 실시하는 나가시노의 싸움이나 키타 이세의 평정, 신키야마성의 싸움에 참전합니다.
텐쇼 5년(1577),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에 중국 지방의 공략을 명령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순조롭게 출세해 가고, 이 무렵에는 오다가의 유력한 장으로서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하리마국 공략 이전부터 친교가 있던 고지 타카타카(쿠로다 간베에)를 부하로 맞이해, 히메지성을 중국 지방 평정의 거점으로 해 손을 붙인 히데요시는 하리마국(현재의 효고현 남서부)의 국인중으로부터 인질을 받는 보상에 안도하고, 평정해 갑니다. 하리마국을 누르는 히데요시는, 거기에서 타지마국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텐쇼 7년(1579), 모리가와의 공방 끝, 비젠국, 미작국(현재의 오카야마현)을 지배하는 우키타 나오야를 복속시켜 순조롭게 진행해 갑니다. 그런데, 중국 지방 침공 도중에 오다가에 속하고 있던 섭진국의 아라키무라시게가 반기를 들고, 일시 중단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사태가 차분한 텐쇼 8년(1580) 다시 중국 지방의 공략을 진행해 가고, 타지마국도 평정했습니다.
혼노지의 이상과 야마자키 전투
텐쇼 10년(1582), 하시바 히데요시는 비중국(현재의 오카야마현 서부)에 침공합니다. 비중 다카마쓰 성을 둘러싸고 물을 부어 물공격으로 했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 지방의 수컷, 모리가도 응원을 내고, 히데요시와 모리가는 대치합니다. 히데요시는 주군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각지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를 중국 지방으로 향하게 하고, 스스로도 교토까지 진행합니다.
그런데 텐쇼 10년(1582)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에서 가신의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해 공격받아 자해했습니다(혼노지의 이상).
주군이 교토에서 자해한 이야기는 히데요시에도 도착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히데요시는 모리가와 바로 강화, 강화한 직후, 군을 이끌어 교토로 돌아왔습니다.
교토에서 혼노지의 이상이 일어난 것이 6월 2일, 그 약 10일 후인 6월 13일에는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와 대치하고 있습니다. 10일 만에 230㎞를 주파한 이 히데요시의 진군은 '중국 대답'이라고 불렸다.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한 아케치 미츠히데도, 이렇게 빨리 히데요시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데요시와 싸운 아케치 미츠히데는 패하고, 미츠히데는 떨어지고 무자 사냥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게가타케 전투
아케치 미츠히데를 꺾은 야마자키의 싸움으로부터 약 10일 후인 6월 27일, 기요스성에서 오다가의 향후를 토론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기요스 회의).
여기에서 노부나가의 후계를 하시바 히데요시가 추측한 손자의 삼법사(오다 노부나가의 적남으로 혼노지의 이상으로 죽은 오다 노부타다의 적남)로 정해집니다.
동시에 이 회의에 있어서, 오다가 필두가로의 시바타 카츠야와의 확집도 결정적인 것으로 되어 갑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