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 (1/2)천하 탈취의 야망에 불타는 오슈의 멋진
다테 마사무네
전국 시대, 수많은 무장이 綺羅星처럼 나타나는 사라진 시대에 오슈에서 한층 빛난 무장이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에도 초기를 뛰어넘은 다테 마사무네는 언제나 호랑이 시원하게 천하를 노리고 있던 남자입니다. 다테 남자의 유래가 된 화려한 취향으로, 세련된 남자는 다도와 노가쿠 등의 예사에도 뛰어나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해 역대 장군에도 중용된 일명 부장군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다테 마사무네의 평생에 대해 소개합니다.
다테 마사무네의 어린 시절부터 전복
다테 마사무네는 에이로쿠 10년(1567) 8월 3일에 데와쿠니 요네자와성에서 다테씨 제16대 당주였던 다테 휘무네(테루무네)의 적남으로서 정실의 최상 의수의 장녀·의 공주 (모가미 요시미츠의 여동생)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유명은 범천환입니다.
텐쇼 5년(1577) 11월 15일, 전복하고 다테 후지지로 마사무네라고 자칭하게 됩니다.諱의 '마사무네'는 아버지인 휘무네가 다테가 중흥의 조인 9대째 당주·오젠오오 마사무네로부터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가미텐마루는 이 諱을 고사했지만, 아버지의 휘종으로부터 강해져 자칭한 경위가 있습니다.
텐쇼 7년(1579) 10월, 초대 정이 대장군·사카우에다무라 마로의 자손인 도호쿠 지방 남부의 미하루 성주였던 타무라 키요시게로부터 딸을 마사무네에게 아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가 올라갑니다.
아버지의 다테 테루무네는 이를 승낙, 마사무네는 13세로 타무라 키요현의 딸인 당시 12세였던 애 공주(다테 마사무네와 같이 다테 요시무네를 소조부에 둔다)를 정실에 맞이했다.
텐쇼 9년(1581) 5월 상순, 마사무네는 아버지 소종과 인접한 전국 다이묘의 소마씨와의 싸움으로 이구군에 출진, 초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후 마사무네는, 아버지의 휘종의 대리인으로서 타무라씨와 노나씨와의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가독 상속, 그리고 스리우에하라의 싸움에
텐쇼 12년(1584) 10월, 아버지의 휘종이 은거해 가독 상속했습니다.
그 후, 텐쇼 14년(1586) 4월 마사무네는 스스로 출마해 니혼마쓰성을 포위. 하타 야마 씨는 당주 쿠니 오마루를 세우고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를 받습니다.
마사무네는 사타케씨를 비롯해 미나미오슈 제후와의 화의를 진행해, 일단은 평화를 되찾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나나 씨에게 몸을 담은 가메와카마루가 불과 3세에 급사. 사타케 요시시게는 자신의 아이의 요시히로를 아나 씨의 당주에게 옹립해 버립니다. 그러나 요시시게는 사전에 시라카와 유키 씨, 이와키 씨 등에 요시히로의 옹립에 관한 동의를 갖고 있어 동생 코지로를 옹호한다고 생각된 마사무네에게는 사전 연락이 없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마사무네는 사타케씨와의 전면 대결을 의식하게 됩니다.
텐쇼 15년(1587) 12월, 천하인이 된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동·오쿠우의 여러 다이묘에 소무사령(사전 금지령)을 내립니다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무시합니다.
마사무네는, 텐쇼 16년(1588)이 되면 2월, 북방의 오사키씨 집안의 내분에 개입해 전을 흥합니다만 깃발색의 나쁜 전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남방전선에서는 이 달성실에 의한 오우치 정강의 조략이 성공, 북방 전선으로 5월에 모가미씨와의 사이에 어머니 요시히메가 개입한 끝에 정전.
같은 해 7월 모가미씨와 노나씨와 화의가 성립해 궁지를 벗습니다. 정실이었던 애희의 친가 타무라 씨 영을 확보했습니다. 9월, 가나야마 무네세이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협순의 뜻을 나타냅니다.
텐쇼 17년(1589) 2월, 마사무네는 낙마로 왼발을 골절해 버립니다. 그 틈을 노리고, 4월에는 이와키 조타카가 타무라령에 침공, 소마 요시코도 호응했습니다.
회복한 마사무네는 5월에 출진합니다만, 아나나타카타의 가타다이라 친줄(오우치 정강의 동생)이 마사무네에 귀순했다고 알고, 일전에 아이즈로 향합니다.
6월에 걸쳐 아이즈의 노나 요시히로와 싸우고, 이와야마 산기슭의 슬라이조하라에서 격파했습니다.
히데요시는 협순과 소무사령을 반고로 한 마사무네에게 "아이즈에서 철퇴하지 않으면 오우에 출병한다"고 통고합니다.
오다와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복종
텐쇼 17년(1589) 11월, 호조씨가 사나다 영에 침공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을 결정합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아버지의 휘무네 시대부터 호조씨와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와 싸울 것인가 오다와라에 참진해야할지, 직전까지 헤매고 있었다고 합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중이 되는 텐쇼 18년(1590) 5월, 도요토미 배하 아사노 나가마사에서 오다와라에의 참진을 개최됩니다. 마사무네는 5월 9일에 아이즈를 출립, 요네자와나 동맹을 맺고 있던 우에스기 경승의 소령의 에치고국·시나노국, 카이국을 통해 오다와라에 도착했습니다.
히데요시의 동원한 병사를 고려한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 복종, 히데요시는 아이즈령을 몰수했습니다만, 다테가의 본령 72만석(대개 가독 상속시의 소령)을 안도했습니다.
이 때, 지참의 질문에 온 마에다 토시야들에게 “천리휴의 차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말해, 히데요시 등을 감탄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화려한 취향의 성격을 아는 행동이었다고도 합니다.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에 복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조 씨 마사 씨 나오부코는 히데요시에 항복, 히데요시는 우츠노미야성에서 오슈 섬(우쓰노미야 처치)을 실시해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이 달성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센다이 번 창시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게이쵸 5년(1600)이 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경승 토벌의 군을 보냅니다. 마사무네도 이에야스에 따라 7월 25일에는 등반 카츠노가 지키는 시라이시성을 탈환했습니다. 이에야스가 기내를 떠난 사이에, 반 이에야스파였던 고봉행의 이시다 미츠나리들은 고대로의 모리키모토를 총대장에 거병.
시모노국 고야마(현재의 토치기현)까지 북상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되돌아가게 됩니다. 같은 해 9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서군의 우에스기 가 중신·나오에 카네츠구가 이끄는 병사가 동군의 모가미 씨 영내에 침입하면(게이쵸 출우 합전), 동군에 속하고 있던 마사무네는 모가미 씨로부터의 요청을 받아 병을 파견합니다 .
세키가하라의 싸움은 도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가 되지만, 마사무네가 원하는 은상은 실현되지 못하고, 영지는 60만석이 되었습니다(나중에 오미국과 상륙국에 비지 2만석을 가증되어 62만석.
세키가하라의 싸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가를 얻어 게이쵸 6년(1601), 거성을 센다이에 옮겨 성·성시의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센다이성은 산성에서 천연 지형을 이용한 것으로 센다이의 성시는 처음부터 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100만 명을 동원한 목공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과 에스파냐와의 통상(태평양 무역)을 계획, 경장 18년(1613)에 센다이 영내에서 배를 건조. 마사무네는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고, 지쿠라 상장들을 멕시코·스페인·로마에 파견했습니다(경장견 유럽 사절).
게이쵸 8년(1603) 이후는 에도 막부의 막신과 교제가 많아져, 다양한 선물에 머리를 괴롭히고, 주연·가회·차회·노우미물 등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사무네의 마지막
마사무네는 게이쵸 19년(1614)의 오사카 겨울의 진과 다음 게이쵸 20년(1615)의 오사카 여름의 진에 출진합니다. 여름의 진에서는, 도묘지의 싸움으로 고토 기지 등과 싸우고 있습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