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이와 친길 (1/2)천하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충신

히라이와 친길

히라이와 친길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히라이와 친길(1542년~1611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이누야마 성

이누야마 성

국보 천수
고후성

고후성

관련 사건

무로마치 시대 후기, 중국의 역사에 비해 전국 시대라고도 불린 전란의 세상. 이 시대의 종지부를 친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많은 집에 지지를 받으면서 에도막부를 흥행하여 천하인이 됩니다. 이 이에야스를 지지한 대표적인 가래를 도쿠가와 16신장이라고 부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신뢰받은 가가가가 히라이와 친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천하인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집, 히라이와 친길을 따라 보고 싶습니다.

히라이와 친길의 고성 시대

히라이와 친길은 천문 11년(1543), 히라이와 친중의 차남으로서 미카와 쿠니 가마타군 사카자키무라(현재의 아이치현 가마타군 사치다초)에서 태어납니다. 유명은 나나노스케입니다.
친길이 태어난 히라이와 가문은 미카와 나라에 살았습니다.
친길의 아버지, 친중(신사에몬)의 때에 마츠다이라씨에 속해, 마츠다이라 기요야스・히로타다를 섬깁니다. 그런데, 히라이와 친중은 교토에서 와 오카자키에 체재한 무사의 무례를 분노해,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사카사키무라에서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라이와가가 섬긴 마츠다이라가(후의 도쿠가와가)는 요즈음, 히가시의 이마가와가와 서쪽의 오다가 사이에 끼워 약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들,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루가국(현재의 시즈오카현 동부)의 인질로서 스루후(현재의 시즈오카시)에 보내집니다.

히라이와 친길도 다케치요의 고성으로서 쇼후에 이르렀고, 어릴 적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습니다.
원록 원년(1558) 미카와국에서는 국중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미카와 하쿠극). 실질적으로 미카와국을 지배하고 있던 이마가와가는 토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낸다. 이에야스는 출진하여 초진을 완수합니다. 친요시도 이에야스에 따라, 마찬가지로 초진을 완수했습니다.
이에야스, 친길 모두 15세 무렵입니다.

그런데 에이로쿠 3년(1560) 5월, 桶狭間의 싸움에서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의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토벌한 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가로부터의 독립을 완수합니다.
히라이와 친길도 그동안 미카와국의 통일이나 이마가와령이었던 도에가와의 평정 등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따라 싸워 전공을 꼽아 갔습니다.

도쿠가와 노부야스의 악역 시대

桶狭間의 싸움에서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이로쿠 5년(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동맹을 맺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에서 독립을 이루고, 오다가와 동맹을 맺고 있는 동안, 히라이와 후미요시도 이에야스에 따라 전공을 거듭해 갑니다. 어릴 때부터 이에야스를 섬기고, 무훈을 세운 친길을 이에야스도 신뢰합니다.

거기서 이에야스는, 신뢰하고 있는 히라이와 친길을 이에야스의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병역으로 임명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는 에이로쿠 10년(1567) 5월, 오다 노부나가의 딸인 도쿠히메와 결혼해, 함께 9세의 형식의 부부라고는 해도 오카자키성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또 노부야스는, 텐쇼 원년(1573)에 초진을 완수하면 용맹 과감한 일을 보여, 이마가와 영을 병삼아 옮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뒤를 받고, 미카와국을 다스립니다. 노부야스는 미카와중을 묶어 다케다가와 싸우는 아버지의 이에야스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텐쇼 7년(1579)의 일입니다.
일설에, 신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절복을 요구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지금은 불명입니다만, 아내의 토쿠히메와 불중으로 토쿠히메가 아버지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칭언했다고도, 도쿠가와가의 파벌 항쟁이 발전해 오다 노부나가를 말려들었다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태에 놀란 것이 신야스를 보좌하고 있던 히라이와 친길입니다.

이때 노부야스의 병역이었던 히라이와 후미요시는 자신을 책임지고 자신의 목을 노부나가에게 내보내 일련의 문제를 거두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노부야스의 처단을 막을 수는 없고, 그 책임을 느끼고 가게 근신합니다.
잠시 허물한 후, 이에야스에게 용서되어 다시 직신으로 복귀했습니다. 이 복귀 때, 요시요시는 죽은 신야스의 가신을 스스로의 가신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부야스의 자해 후, 요시요시와 같이 허물한 자나 뒤를 쫓아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후년의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노부야스의 악역이었던 사카키하라 키요마사(우에노관 하야시 번조인 사카키하라 야스마사의 오빠)는 노부야스의 절복에 책임을 느끼고, 친요시와 같이 무시합니다. 그 후, 이에야스에게 불려 쿠노성의 성주가 된 기요마사는, 히라이와 친길과 사무라이가 가지고 있던 신야스의 유발을 양도해, 에조지에 무덤을 세워, 신야스를 모셔 버렸습니다.

카이의 군대와 관동 이봉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 관계에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긴키, 도카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합니다.
그런데, 텐쇼 10년(1582)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는 부하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토벌됩니다. 그 후, 오다가 안에서 하 시바 히데요시나 시바타 카츠야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이에야스는 독자적인 세력 확대를 도모합니다. 구 다케다 가령이었던 시나노(현재의 나가노현)나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에 눈을 돌려, 오카베 마사츠나를 중심으로 한 가신을 사용해, 이러한 영지를 받아들였습니다(텐쇼 임오의 난).

이에야스는 텐쇼 11년(1583년)까지 카이쿠니를 병권하면, 히라이와 친길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카이의 군대로 가서 오카베 마사츠나와 공동으로 구 다케다 유신 등 지역의 무사를 진탕해 지역의 안정적으로 노력합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국부로서 고후성의 축성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하시바 히데요시의 세력이 커지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신종합니다. 그리고 텐쇼 18년(1590) 관동의 호조가를 쓰러뜨리고(오다와라 정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관동의 땅에의 전봉을 명합니다(관동 이봉). 이 관동으로의 이동시 이에야스는 그때까지 순종해 온 집에도 토지를 주었습니다. 히라이와 친길은 지금까지의 공적과 충성으로부터,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 하바시 3만 3,000석을 주어졌습니다.

오와리 번 부케 가로와 이누야마 번주

게이쵸 3년(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 관동을 영위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합니다. 그 이에야스에 대해 도요토미가의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가 치향합니다.
게이쵸 5년(1600)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격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싸움을 이겨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끝난 게이쵸 6년(1601), 히라이와 친길은 우에노국 하바시번으로부터 다시, 카이쿠니 고후로 돌아가 6만 3000석을 주어져 고후성에 재성했습니다.

히라이와 친길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