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타다요시 (2/2)세키가하라의 불을 끊은 다이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 관련 사건
이 치타군의 유지장은 현재의 도코나메시 오노쵸에 있어, 유지를 실시하고 있는 충길에 대해서 만다라사가 문양의 시부 감을 보내, 그 대답의 예장이 남아 있습니다. 게이쵸 12년(1607) 병은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충길은 에도로 향합니다. 거기서 이에야스, 히데타다와 면회한 며칠 후인 3월 5일에 사망했습니다, 향년 28.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에는 아이가 없고, 남은 기요스번은 동생의 도쿠가와 요시나가가 이어졌습니다. 또, 타다요시가 이어진 도죠 마츠다이라가 타다요시의 대에서 단절이 되었습니다만, 도쿠가와 요시나리의 집안에 계승되어, 그대로 오와리번에 편입되게 됩니다.
기요스에서 나고야로 옮겨진 오와리 도쿠가와가에서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가 취급한 센보를 보존해, 현재는 아이치현에 있는 도쿠가와 미술관에 수장되고 있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의 소연지
-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이이 나오마사진 진적
- 게이쵸 5년(1600)에 일어난 세키가하라의 싸움은 동군 서군 아울러 약 17만명. 그런데 싸움 자체는 반나절에 끝났습니다. 이 반나절의 전투에서 약 8000명의 죽은 사람이 나왔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싸움 후, 수실검을 실시해, 많은 시신을 이 땅에 메워, 히가시 즈카, 니시 즈카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히가시 즈카는 JR 세키가하라 역의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만, 츠즈카의 동쪽 구석, 기후현 불파군 세키가하라마치 대자 세키가하라에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이이 나오마사의 진적」이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이 싸움이 첫진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의 오전, 도쿠가와가의 이이 나오마사는 딸랑이기도 한 초진의 타다요시에게 손길을 꼽고 싶다고 생각해, 철포대를 이끌고 정찰에 나옵니다. 도중, 동군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선진, 가아재장에 발견되어 묻습니다만, 제지를 뿌려 세키가하라에 나왔습니다. 거기에서 우키타 히데야가 있는 군에 철포를 쏘는 것이 싸움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의 묘소 성 고원
-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닌죠를 중심으로 10만석의 영지를 부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친모, 사이고국(원호, 호다이인)의 보제를 되살리기 위해, 만부겐도를 하고 오시기의 성하에 있던 정각사를 재흥시켰습니다.
충길은 그 후, 기요스성에 전봉이 되면 게이쵸 8년(1603) 오시성의 성하에 있던 3사를 기요스에 옮깁니다. 이 옮겨진 절 중 하나가 정각사였습니다.
게이쵸 12년(1607) 마쓰다이라 타다요시가 에도에서 죽으면, 타다요시의 보리사가 됩니다.
게이쵸 15년(1610) 기요스에서 나고야로 성의 성하도 포함한 대이동이 행해져(키요스 너머), 절의 이름도 충길의 원호로부터 성고원이 되었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다스린 오시죠
오시는 무사시쿠니 사이타마군 시노부(현재 사이타마현 유키타시)에 있던 성입니다. 현재는 사이타마현 지정 구적이 되고 있습니다. 문명 10년(1478)경 무사시국의 국인중이었던 시노부를 나리타 씨가 멸망시키고, 시노부 성을 축성했다고 합니다.
텐쇼 18년(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시한 간토 토벌 때, 약 500명의 사무라이와 아시가루 외에, 잡병, 농민, 마을 사람 등 3,000명이 오시기에 세워 왔다고 합니다(오시기 전투 ).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요토미가의 총대장이 되어, 오타니 요시카즈, 나가타카 마사야, 사나다 마사유키 등이 참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때 약 28km에 이르는 이시다제를 건설해 물공격으로 했습니다만, 성은 떨어지지 않고 오다와라성이 먼저 항복했기 때문에, 그 후에 개성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동 입부 후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배치되어 닌번 10만석의 번청이 되었습니다. 충길이 청주번으로 이동한 후, 친번보대의 다이묘가 전봉되었지만, 시노부는 정비되어 나카야마도의 뒷가도 숙장이나 토네가와 수계의 수운의 물류로로서 번영합니다.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 버선의 산지로서 유명해집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자, 오시기의 구조물은 대부분이 철거되고, 남은 성터는 공원으로서 정비되었습니다. 이 시노부 공원은, 쇼와 24년(1949)에 유키타시 혼마루 구장이 만들어졌습니다만, 나중에 이전해, 그 자취지에 쇼와 63년(1988)유키타시 향토 박물관이 만들어져 시민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충길 종언의 땅, 청주성(기요스조)
기요스성은, 오와리국 가스가이군 기요스(현재의 아이치현 기요스시 일장)에 있던 성입니다.
오와리국의 중심부에 위치해, 도카이도나 이세 가도, 나카야마도에 접속하는 요충입니다.
오오나가 12년(1405), 오와리 국 수호 다이묘의 사나미 요시시게에 의해 축성됩니다. 문명 10년(1478)에 수호소가 이전해 기요스성이 오와리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시대가 내려가면, 오와리국 중 시모시군을 지배하는 수호대 오다가의 본성이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국의 통일 과정에서 기요스성을 거성으로 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남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들어가 기요스번의 초가 되었습니다만, 타다요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짊어진 상처가 원래 병사합니다. 그 때문에 게이쵸 12년(1607)에는 이에야스의 구남 도쿠가와 요시나가가 입성했습니다.
그런데 게이쵸 14년(160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요스성에서 나고야성으로 이전하도록 명령이 내려집니다. 서일본의 다이묘에 의해 만들어진 나고야성이 완성되면, 게이쵸 15년(1610)부터 기요스성에 있던 마을은 나고야성으로 이전되어, 이후 오와리국의 중심지는 나고야성이 되었습니다(기요스 너머 ). 여기에서 도쿠가와 미쓰야의 오와리 도쿠가와가가 시작됩니다.
현재, 기요스성의 성터는 대부분이 소실되어, 또 도카이도 본선과 도카이도 신칸센으로 분단되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혼마루 부분의 토루뿐입니다.
기요스성에 인접한 기요스 지역 문화 광장 내에, 헤세이 원년(1989)에 철근 콘크리트조의 모의 천수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 도카이도 본선보다 남쪽에 있는 기요스 공원에는 노부나가의 동상이, 북측에 있는 기요스 고성터 공원에는 기요스성터 현창비가 있어, 시민의 휴식의 장소를 물들입니다.
청주 너머
게이쵸 12년(1607),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죽은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오와리국의 중심은 길고 충길이 다스린 청주였습니다. 그런데 청주는 쇼나이강의 하류에서 수해가 많아, 또 텐쇼 13년(1586)의 텐쇼 지진으로 지역이 액상화되었습니다.
더욱 세키가하라의 싸움 이후, 도쿠가와가는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씨에게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 도요토미가에 대한 대항거점의 하나로서 청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기요스성이 소규모로 다수의 병사를 주둔시킬 수 없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요시나리에게 충길의 흔적을 다스릴 때, 아타다 대지에 새로운 성을 쌓아 올린 나고야 성입니다. 성의 보청에는, 서국 다이묘의 많은에게 명령해 대규모의 공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나고야 성 주변에는 해자를 굴착하여 새로운 거리를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에는 청주성 아래에서 가신, 마을사람뿐만 아니라 신사, 불각도 이전하는 등 청주 대부분이 나고야로 이전했습니다. 이것을 청주 너머라고합니다. 그 때문에, 현재는 청주 너머를 경험한 구 청주의 주민인 것이, 나고야의 전통과 격식을 나타내는 하나의 스테이터스가 되고 있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 관련 사건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