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이라 타다요시 (1/2)세키가하라의 불을 끊은 다이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 관련 사건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 시대라고도 불린 전란의 세상은 도쿠가와가에 의해 끝납니다. 이 시대의 종지부를 친 싸움이 그 「세키가하라의 싸움」입니다. 동서로 나뉘어 10만명 이상이 대치한 이 싸움, 최초의 발포를 실시한 것이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입니다. 후에 천하인이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으로서 하마마츠에서 태어나 오와리국 기요스성의 번주가 된 타다요시. 이 마츠다이라 타다요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번에는 보고 싶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의 탄생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텐쇼 8년(1580) 미카와국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으로서 토에쿠니하마마츠(현재의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명을 후쿠마츠마루라고 말해, 어머니는 사랑하시는 분(사고국)으로, 후의 에도 막부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동모 형제가 됩니다.
충길이 태어난 다음 해, 텐쇼 9년(1581)의 일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일족이었던 도조 마쓰다이라 당주의 마츠다이라가 타다가 병사했습니다.
도조 마츠다이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의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나가 부모(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보면 고조부)의 삼남 마츠다이라 요시하루를 조로 합니다.
미카와 고쿠하두군 요코스카무라 도조(현재의 아이치현 니시오시 요시라마치)에 있던 도조성을 거성으로 한 것으로부터 도조 마츠다이라가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도조 마츠다이라의 조, 마츠다이라 요시하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청강과 아버지 히로타다의 어려운 시대도 지지한 공적이 큰 집이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 이에야스는 당주가 사라진 도조 마츠다이라가의 가독을 충길에게 이어줍니다. 충길은 태어나 곧 미카와 도조성 1만석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음 해의 텐쇼 10년(1582), 카이의 다케다씨가 오다가, 도쿠가와가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하면, 타다요시는 미카와 쿠니 도조에서 새로운 영국이 된 스루가 누마즈성(현재의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에 전봉됩니다.
간토 이봉과 오시 성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의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혼노지의 이상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텐쇼 18년(1590) 관동의 호조가를 토벌(오다와라 정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습지로 관동에 침공했지만, 호조가가 항복 후, 그때까지의 영지였던 도카이 지방을 드려, 호조가의 구령을 받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 스루가국, 원강국(현재의 시즈오카현), 카이국(현재의 야마나시현), 시나노국(현재의 나가노현) 150만국을 드실 수 있고, 무사시국・이즈국・사가미국・우에노국・카미소국・시모소국・시모노국의 일부・상륙국의 일부라고 하는 관동 일엔 250만석을 주어졌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이에야스의 관동 이봉에 따라 문록 원년(1592년)에 스루가국 누마즈성에서 무사시국 사이타마군 인성주 10만석을 주어졌습니다.
오시조는 호조가에 속했던 나리타 씨의 거성이었지만, 오다와라 정벌 때, 나리타 씨의 일족이었던 나리타 나가 부모를 중심으로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군의 공격을 견디고, 오다와라 정벌 속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지켜낸 성이었습니다.
나리타 씨는 그 후, 당주의 나리타 씨장이 독립된 다이묘가 되어 거기에 따르는 자, 새롭게 영주가 된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에 사관하는 것, 무사를 그만두고 농업에 종사하는 자로 나뉩니다. 공성전에서 성을 지켜낸 나리타 나가 부모의 아들은,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에 사관했기 때문에, 장친은 후년, 아들에 따라 오와리국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시기 성주가 된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성장하고 전복합니다.
초진의 세키가하라 전투
분록 원년(1593)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혼인을 맺습니다. 상대는 도쿠가와 시텐노의 혼자서 우에노국 미노와 12만석의 번주, 이이 나오마사의 딸 마사코입니다. 이렇게 닌죠주로서 전복하고, 혼인도 맺은 충길이었습니다만, 아버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게이쵸 3년(1598) 이에야스가 속해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주도권을 잡는 이에야스와 거기에 반대하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그룹과 대립이 첨예화합니다.
게이쵸 5년(1600) 우에스기 경승에 모반의 혐의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한 토벌군이 동쪽으로 향합니다. 이때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처음으로 군을 이끄는 일이었습니다.
이에야스들이 관동에 도착할 무렵, 오사카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합니다.
이에야스는 이끌고 있던 군 중, 충길을 총대장으로 도요토미 가자의 가신들을 중심으로 도카이도를 오르게 합니다. 그 후, 이에야스 자신도 도카이도를 오르고 이시다 미츠나리와 세키가하라에서 대치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싸움 당일, 그 날의 선진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맡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현의 이이 나오마사가 충길을 데리고 정찰에 나옵니다. 일설에는 이에야스의 뜻을 얻은 나오마사가 초진의 타다요시에게 손길을 꼽으려고 선진의 뛰어넘기를 도모했다고도 합니다.
도중에 후쿠시마 가문의 가아 재장으로 볼 수 있지만 거기를 빠져 세키가하라에 나오면 철포를 쏘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서도 유수의 대규모 회전,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됩니다.
타다요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화개를 자르는 것으로 초진의 손길을 꼽습니다.
전투는 낮에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우세가 되어, 이시다 미츠나리에 속하고 있던 서군의 추격전이 되었습니다.
전장에서 이탈하는 시마즈가를 쫓는 이이 나오마사와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시마즈 도요히사에 가는 손을 가로막고, 타다요시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이이 나오마사도 다리를 철포로 쏘아 낙마하면서도 토요히사를 토벌하는 등, 초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을 꼽았습니다.
청주번으로 전봉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적을 인정받은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는 아키히로시마와 비고 토모(현재의 히로시마현)로 전봉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뒤를 따라 오와리쿠 기요스(현재 아이치현 서부) 및 미노 나라(현재의 기후현) 52만석을 주어져 오시기에서 옮깁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인 충길이었지만, 기요스로 옮기면 교양도 익히려고 했습니다. 한때 혼간지의 관관에서 세키가하라의 싸움 후, 니시혼간지에 속하고 있던 시모마 나카타카(시모츠마 나카타카)는 원숭이를 지극히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중효보다 원숭이의 비전서 「동무초」 받는 등 문무 양도를 목표로하고 있습니다.
조정의 위층도, 게이쵸 10년(1605)에는 종삼위 좌근위 중장에, 다음 게이쵸 11년(1606)에는 사츠마 마모리로 천임되는 등 관위도 순조롭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상처를 입은 것이 재앙이었는지, 게이쵸 9년(1604) 서서히 병에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의 종말
오와리국 기요스 성주가 된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였지만, 게이쵸 9년(1604)병에 침범됩니다. 거기서 투병 때문에, 타지마국에 유지에 나가고 있습니다.
게이쵸 10년(1605)에는 부종을 앓고, 한때는 위환 상태에 빠지지만 투약에 의해 소생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게이쵸 11년(1606) 오와리 쿠니치타군에도 유지에 나가는 등 빈번히 요양을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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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