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유키무라 (1/2)일본 제일의 병(히노모토 이치노 츠와모노)
사나다 유키무라
전국 시대라고도 불린 무로마치 시대 후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종말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긴 도요토미가를 오사카의 진으로 멸합니다. 이 오사카의 진으로 이에야스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 사나다 유키무라(진짜 이름은 유키무라, 이 이야기에서는 유키무라라고 합니다)였습니다. 왜 유키무라가 오사카의 진에서 도쿠가와가와 싸웠는가. 이번에는 사나다 유키무라의 평생을 보고 싶습니다.
출생에서 사나다가의 독립
에이로쿠 10년(1567, 또는 모토가메 원년《1570》 모두), 사나다 마사유키의 차남으로서 탄생. 통칭은 오빠 노부유키가 겐조로를 칭하고, 유키무라는 겐지로라고 칭했습니다.
사나다 씨는 시나노국 소현군의 국인중으로, 유키무라의 할아버지, 사나다 유키타카 무렵에 카이국의 다케다 하루노부(신겐)에 귀속합니다. 유키타카는 신겐의 시나노국(현재의 나가노현)의 평정에 진력해, 사다카의 장남, 사나다 노부츠나는 다케다가의 선방중으로서 시나노 침공이나 에치고국의 우에스기씨와의 항쟁에 다하는 등 사나다가는 새로운 다케다의 가신 중에서도 군을 뽑아 활약했습니다.
유키무라의 아버지, 마사유키는 유키 타카의 3남으로, 다케다 가문의 아시가루 대장이 되어 다케다 서류의 무토 씨의 입양이 되고 있었습니다만, 텐쇼 3년(1575) 나가시노의 싸움에 있어서 나가형·노부츠나, 차형· 창휘가 전사했기 때문에 사나다 씨를 이어갔습니다.
텐쇼 10년(1582) 3월에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다케다 씨는 멸망하고, 사나다 씨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협순합니다. 유키무라는 관동을 평정하기 위해 보내진 오다가의 타키가와 일익 아래 인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6월, 혼노지의 이상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합니다. 다케다가의 소령이었던 카이쿠니(현재의 야마나시현)나 시나노국은 혼란해, 우에스기가, 호조가, 도쿠가와가의 3자로 다케다 유령을 둘러싼 다툼이 발생했습니다(텐쇼 임오의 난) .
이 혼란 속에서 사나다가는 우에스기 가에 따르는 일로 오다가로부터 나뉘어 자립합니다. 유키무라는 타키가와 일익의 인질에서 우에스기가에의 인질이 되어, 에치고국(현재의 니가타현)에 향했습니다.
거기에서 도쿠가와 가문에도 종속하는 등 눈부신 입장을 바꾸었습니다만, 텐쇼 13년(1585), 시나노국을 점유하려고 한 도쿠가와가가 병사를 보내, 사나다가와 싸우고 있습니다, 제1차 우에다 전투입니다. 우에스기가의 원군을 얻는 등, 사나다가는 도쿠가와가를 격퇴했습니다.
유키무라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오다 가신의 하 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두하면, 우에스기 가와 함께 마사유키는 이것에 복속합니다.
도요토미가 아래, 사나다 마사유키는 독립된 다이묘로 취급되게 되었습니다. 유키무라는 인질로서 오사카성으로 옮겨, 나중에 히데요시의 마회중이 되면 지행을 얻게 됩니다. 또, 히데요시의 고성에서 에치젠의 다이묘가 된 오타니 요시츠네의 딸, 타케바야시인을 정부인에게 맞이하여 혼인을 맺었습니다.
텐쇼 17년(1589),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나다 노부유키의 성, 누마타성을 관동의 호조가에게 인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호조가는 재정에 반대해 명호도성을 공격한 것으로,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의 다이묘에 대해 오다와라 정벌에 연결되어 버렸습니다.
다음 해의 원정에서 아버지의 마사유키와 형의 노부유키는 마에다 토시야, 우에스기 경승 등과 마쓰이다성이나 미노와성을 공격해, 유키무라와 요시츠네는 이시다 미츠나리 아래에서 오시기 공격에 참전합니다. 이렇게 히데요시는 호조가를 멸망시켰습니다.
또한, 히데요시가 실시한 조선의 역에 있어서, 사나다가는 히젠 나고야성에서 재진하고 있습니다. 유키무라는 나고야성의 산노마루 고반중의 어마회조 안에 속하고 있었습니다.
분로쿠 3년(1594) 사나다 유키무라는 종고위 아래 사에몬 사에 서임됨과 동시에 도요토미 성을 하사하였습니다. 이 유키무라의 출세는, 다케부의 오타니 요시카즈의 의향이 반영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사나다 유키무라가 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게이쵸 3년(1598)에 사망.
히데요시 사후, 무가에 있어서 조정의 최고위에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두합니다.
게이쵸 5년(1600년) 5대로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마찬가지로 5대로의 1명이었던 아이즈 우에스기 경승 토벌의 병사를 일으키면, 유수중에 5봉행의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의 싸움에 이르렀다. 합니다.
유키무라는 장인의 오타니 요시히토가 이시다 쪽에 붙은 것, 또 아버지의 사나다 마사유키도 이시다 쪽에 붙은 적도 있어 이시다 미츠나리의 진영에 들어갑니다. 아내가 혼다 타다카츠의 딸(고마쓰전)인 형의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쪽에 아군했습니다.
아버지, 동생과 형이 진영을 나눈 것입니다.
도쿠가와가의 본대는 관동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야스의 3남)에게 이끌려 나카야마도를 진행해 왔습니다. 마사유키와 유키무라는 거성 우에다성에 휘말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발걸음을 실시합니다. 소수의 사나다대에 수고한 히데타다시는 공략에 시간이 걸려, 이에야스로부터의 상경을 명령받아 공략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제2차 우에다 합전)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합니다.
마사유키와 유키무라는 본래라면 패군의 장으로서 사죄를 명령받는 곳이었지만, 노부유키와 그 현인 혼다 타다카츠의 취임도 있어, 고야산 배류를 명령받는 것에 머무르고, 기슈국(현재의 와카야마현 ) 구도산으로 옮겼습니다.
쿠도야마 유폐중의 유키무라는 지역의 사람들이나 노승과 깊게 교제해, 사냥이나 절에 놀러 가서는 바둑, 쌍육에 흥해, 저택에서는 밤새기까지 병서를 읽어 뛰었다고 합니다. 또, 인근의 향사나 로종을 자주 모아서는, 병술, 활, 철포의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蟄居中의 게이쵸 16년(1611)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는 사망. 게이쵸 17년(1612)에 유키무라는 출가, 호백이라고 자칭했습니다.
유키무라의 구도산 탈출과 오사카 겨울의 진
게이쵸 8년(160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이 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엽니다.
그동안 사나다 유키무라는 기슈 쿠니쿠 쿠도 산에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게이쵸 19년(1614), 도쿠가와가와 도요토미가는 호히로지 종명 사건을 계기로 관계가 악화됩니다.
다이묘의 가세를 기대할 수 없는 도요토미가는 낭인을 모아 군비를 강화. 구도산에서 교회하고 있는 유키무라의 근원에도 사자가 찾아오사카성의 입성을 요청합니다. 유키무라는 태어나 자란 시나노국에 있는 아버지 마사유키의 가신들에게도 참전을 불러, 구도산을 탈출해 과남대조와 함께 오사카성에 들어갔습니다.
오사카성에 들어간 유키무라의 군은, 붉은 일색으로 통일했다고 합니다.
게이쵸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유키무라는, 군을 정돈해 교토에 침출성 밖에서 싸우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성에 모인 낭인중은 찬성을 표명합니다만, 도요토미가 쪽이 받아들이지 않고 농성하게 됩니다. 거기서 유키무라는 오사카성의 최약부로 여겨지는 산노마루 남쪽에 사나다마루라고 불리는 흙 만들기의 출성을 구축했습니다.
여기에서 유키무라는 전사를 격퇴하고 처음으로 그 무명을 천하에 알리게 됩니다.
그런데 싸움 중반에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와는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오사카 여름의 진과 유키무라의 마지막
오사카 겨울의 진이 강화에 의해, 싸움은 중단합니다.
유키무라가 만든 사나다마루는 강화의 조건으로서 해자 매립시에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쪽의 약체화를 모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시나노국에서 영지를 제공하는 조건을 제시해, 「알고 있다면 맹사를 준다」라고 되돌아보도록 설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키무라는 "히데요리에게 은혜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거절했습니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