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가와 요시모토 (1/2)카이도 제일의 활

이마가와 요시모토

이마가와 요시모토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이마가와 요시모토(1519년~1560년)
출생지
시즈오카현
관련 성, 절, 신사
스루후 성

스루후 성

관련 사건

전국 시대의 삼영 걸 중 한 명인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을 시작해 세상에 알린 것은 '간사마의 싸움'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침공해 온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처치합니다.
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카이도 제일의 활취라고 말해졌습니다. 도카이 지방의 통치를 안정시키는 것으로, 타케다 신겐이나 호조 씨야스와 대등에 걸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요시모토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번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대해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마가와가와 요시모토 탄생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에이쇼 16년(1519), 스루가국, 도미에의 수호 다이묘, 이마가와씨 부모의 3남으로서 태어납니다. 유명을 요시키마루라고 했습니다.

이마가와가는, 무로마치 막부 아시카가 장군가의 일문인 요시라가의 분가였지만, 요시라가는 다른 아시카가의 일문과 달리, 장군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장군가에 대해 싸움의 전공도 있어, 앞서 말한 “고쇼(아시카가 장군가)가 끊어지면 요시라가 이어지고, 요시라가 끊어지면 이마가와가 이어진다”라고 장군의 지위의 계승권도 있어, 무로마치 시대에 이마가와가는 별격의 다이묘가였습니다.
요시모토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이마가와가의 흔적으로서 어머니를 똑같이 하는 형의 미츠키, 히코고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4세에 세코선득사의 고토계승현에 맡겨집니다.

향록 2년(1529)에 승현이 몰렸기 때문에, 승현의 제자였던 규영승국(큐에이 쇼기쿠), 후의 타이하라 유키사이가 그 역할을 계승합니다. 타이하라 유키사이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스루가국을 기반으로 한 일족으로, 유키사이는 이마가와가의 중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스님으로서 교토에서 배우고 수재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부모님은 그 수재라고 말한 유키사이에게 요시모토의 육성을 맡겼습니다.
요시모토는 설사이와 함께 겐닌지에 들어가면 상암 용숭의 근원으로 정식으로 스님이 됩니다. 승명을 栴岳承芳(선가쿠쇼호)로 바꿉니다. 한층 더 설사이와 함께 묘신지에서 대휴종휴에 배워 학식을 깊게 해 갔습니다.

이마가와가 계승과 하나쿠라의 난

교토의 묘신지에서 젊은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스님으로서 배워, 학식을 깊게 해 갔습니다. 그런데 오빠의 미츠키에서 스루가국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시모토가 스루가국으로 돌아온 직후의 천문 5년(1536), 이마가와가 당주였던 오빠의 씨휘가 급사합니다. 또 나가형의 미츠키와 같은 날에 다음 형의 히코고로도 사망했기 때문에, 이마가와가의 상속권이 요시모토로 옮겨집니다.
형들의 씨휘·히코고로와 같이 요시모토도 스즈카니를 어머니로 했기 때문에, 중신들로부터 스님을 그만두고 이마가와 집으로 돌아가도록 청합니다. 요시모토는 이것을 받아들여, 정이 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편망을 받고, 여기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라고 자칭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주 계승에 관해서, 이마가와가의 유력한 가신이었던 후쿠시마씨가 반대했기 때문에 혼미합니다. 요시모토의 당주 계승에 불복으로 생각한 후쿠시마씨는, 자가의 피를 당기는 요시모토의 이모형·현광혜탐을 당주로서 옹립해 반기를 휘두릅니다. 이 반란을 「하나쿠라의 난」이라고 합니다.

후쿠시마씨는 요시모토가 사는 이마가와관에 공격하는 등 공세로 나왔습니다만, 타이하라 유키사이를 비롯한 요시모토 측에 붙은 이마가와의 가신단 앞에 고전합니다. 게다가 스루가국, 도미에국의 동 옆에 위치하는 이즈국, 사가미국(현재의 가나가와현 서부)의 영주, 호조가(고호조씨)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 성공하면, 후쿠시마가 등 반의 원측 는 서서히 괴로운 입장이 되어, 거점으로 하고 있던 하나쿠라성에 몰려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격을 받아 성은 떨어졌습니다. 살아남은 후쿠시마 씨는 호조 가문을 의지하고 늘어납니다.

하나쿠라의 난으로 반대파를 진정해 이마가와가를 이은 요시모토는, 이마가와 가 당주가 되어, 요시모토의 당주 계승에 진력한 가신을 중용해, 지배 체제를 정돈했습니다.

카이의 다케다가와 사가미의 호조가

하나쿠라의 난을 마치고, 이마가와가 당주에 들어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천문 6년(1537), 형의 씨빛과 싸우고 있던 카이쿠니(현재의 야마나시현)의 다이묘, 다케다 노부토라의 딸을 정실에 맞이한다 , 다케다 씨와 동맹을 맺습니다 (갑성동맹). 그런데 갑성동맹의 성립은 결과적으로 구래의 동맹이자 타케다가와 긴장 상태에 있던 호조가의 분노를 사 이마가와가와 호조가는 항쟁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하나쿠라의 난 직후에 스루가국의 통제가 끝나지 않았던 이마가와가는, 내부를 끊어져 호조가에게 검을 치지 못하고 불리한 채 장기화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요시모토는 호조가로부터 압박을 계속 받는 가운데 어떻게든 사태의 타개책을 모색합니다. 천문 14년(1545년), 요시모토는 미야스 야스와 적대하는 관동의 야마우치 우에스기가와 동맹을 맺고, 호조씨를 서쪽의 이마가와가와 히가시의 야마우치 우에스기가로 양면에서 침공하는 책을 세웠습니다. 이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에 호응하는 형태로, 호조가에 시달리고 있던 간토의 여러 다이묘가 연합을 짜, 호조가의 영지를 침공합니다. 궁지에 빠진 호조가는 카이국의 다케다가에게 중개를 부탁하고 요시모토와의 협상으로 빼앗은 영지의 반환을 조건으로 화목했습니다.

이것에 의해 관동 방면에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된 호조가는, 카와고에 야전에서 관동의 연합군을 크게 격퇴합니다. 이 후에도 스루가국의 동쪽의 땅을 둘러싸고 이마가와가와 호조가의 노려서는 계속되었습니다만, 호조가가 관동 방면의 영국 경영에 힘을 쏟은 것으로, 서서히 적대 관계를 완화해 갑니다 .
천문 23년(1554), 요시모토의 씨, 이마가와 씨 마코토와 호조 야스의 딸이 혼인을 맺습니다. 또한 다케다 가와 호조가와도 서로 혼인 관계를 맺고, 여기에 이마가와 가와 다케다 가, 호조 가의 고상 슌쿠니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도카이도의 이마가와가와 고신지방의 다케다가, 관동의 호조가는, 동맹하는 것으로 배후의 걱정을 하지 않고 영국 경영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마가와 집의 도약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사가미 나라의 호조 가문과 몰아 당길 때 서쪽 이웃 나라 인 미카와 국 (현재 아이 치현 동부)도 오와리 국 (현재 아이 치현 서부)의 무장, 오다 노부히데 (오다 노부나가 아버지)와 항쟁을하고 있습니다.

오다 노부히데가 천문 9년(1540)에 개시한 침공은 당초 오다가 우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시모토는 니시미카와의 유력한 영주였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의 귀순을 받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의 미카와 진출에 위기감을 기억한 오다 노부히데는 군세를 내고 미카와 국점령을 강화합니다만, 천문 17년(1548) 요시모토의 군사인 유키사이를 중심으로 한 이마가와군은 오다군에 대승했습니다.
천문 18년(1549)에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사망하면 요시모토는 영주가 사망하여 부재가 된 마츠다이라가에 대해 지배하고 있던 니시미카와 지역을 이마가와가의 영토로 하려고 합니다. 또한, 오다카타의 미카와 안죠성(현재의 아이치현 안성시)을 공격해, 오다가의 세력을 미카와국으로부터 구축했습니다. 이것에 의해 미카와국을 둘러싼 오다가와의 싸움은 이마가와가 승리의 형태로 결착합니다.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의 죽은 마츠다이라가는, 타케 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서 취하는 것으로 지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루가국, 원강국, 미카와국과 도카이도를 누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다이 다이묘로 성장합니다. 삼국을 영토로 한 이마가와 가문은 검지를 실시하는 등 안정된 영국 경영을 꾸준히 실시하고 있습니다.
천문 22년(1553년)에는 아버지의 이마가와 씨 부모가 정한 이마가와 가명 목록에 추가 조문을 더해, 현재의 이마가와 영국의 질서 유지를 실시하고 있는 것은 아시카가 장군가가 아니라 이마가와씨 그 자체인 것 을 이유로, 스루가국, 도에에국에 있는 무로마치 막부의 장원의 폐지를 선언, 수호 다이묘로서의 이마가와가에서 전국 다이묘의 이마가와가로 옮겨집니다.

桶狭間의 싸움과 그 마지막

에이로쿠 원년(1558), 요시모토는 슈코의 씨 진정하게 가독을 양도해 은거합니다. 이 이후 이마가와 씨의 본국인 스루가 토미에는 아들의 씨 진이 통치하고, 요시모토는 신영토인 미카와국의 진압 및 경영에 집중함으로써 더욱 서쪽으로의 침략을 반영해 나가기로 되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