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1/2)천하 통일 전에 뿌려진 무장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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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기
이름
오다 노부나가(1534년~1582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기요스 성

기요스 성

고마키야마성

고마키야마성

기후성

기후성

스미타마 하룻밤 성

스미타마 하룻밤 성

관련 사건

전국 무장 중에서도 발군의 지명도와 인기를 자랑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삼영걸 중 하나로 꼽히는 것뿐만 아니라, 전투에서의 에피소드부터 혁신적인 일면, 그리고 비업의 죽음까지 파란 만장한 무장입니다. 결코 순풍 만호한 국면뿐만 아니라, 때로는 신산을 핥는 것 같은 사건에 휩쓸려, 바로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오다 노부나가의 평생에 대해 소개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탄생

오다 노부나가는 천문 3년(1534) 5월, 오와리(아이치현 서부)의 한 지방 영주였던 오다 노부히데의
아이로 탄생합니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와리 나라 시모 요시 군의 수호대였던 오다 야마토 모리야 (키요스)
오다가)의 분가였습니다. 키요스 산봉행이라는 가문으로, 신슈의 대에서 세력을 급확대시켜
갔다.

노부나가는, 노부히데가 빼앗은 나고노성을 일찍부터 양도해, 성주가 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발한 행동이 많았고, 주위에서 '대우츠케'라고 불렸습니다.
천문 16년(1547)에는 이마가와가와의 소경쟁에서 초진을 완수합니다. 이듬해, 아버지 노부히데와 적대하고 있던 미노국의 전국 다이묘였던 사이토 미조와의 화목이 성립하면, 그 증거로서 도조의 딸, 노키(귀나비)와 노부나가 사이에서 혼인이 교제 되었습니다.
그 후, 노부나가는 아버지 노부히데의 죽은 후, 오다 탄쇼 다다야의 가독을 이어, 오와리 수호대의 오다 야마토 모리가, 오다 이세 모리가를 멸함과 동시에, 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배제하고, 오와리 일국의 지배를 서서히 굳어 갔습니다.

桶狭間 전투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국내의 적대 세력과 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배제하여 영국이었던 오와리국의 발판을 굳혔습니다. 그런 가운데, 에이로쿠 3년(1560) 5월, 스루가 쿠니 토에구니(현재의 시즈오카현)의 수호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국에 침공합니다. 스루가·토에에 가세해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을 지배하는 이마가와씨의 군세는, 1만명 모두 4만5천명 모두 호하는 대군이었습니다. 오다군은 이에 대해 방전했지만 그 병력은 수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마가와군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휘를 맡는 미카와세를 선봉으로, 오다군의 요새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습니다. 그에 대해 노부나가는 도카이도를 진행하여 세로로 뻗어 있던 이마가와군의 본진에 강습을 걸어 요시모토를 토벌했습니다(카오사마의 싸움).
桶狭間의 싸움 후, 이마가와 씨는 미카와국의 마츠다이라 씨의 이반 등에 의해, 그 세력을 급격하게 쇠퇴시킵니다. 이것을 계기로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씨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양자는 동맹을 맺고 서로 배후를 굳혔습니다.

미노국 공략

아내였던 농희(귀나비)의 아버지인 사이토 미조가 죽으면, 오다 노부나가와 사이토씨와의 관계는 험악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桶狭間의 싸움과 전후로 양자는 병사를 서로 만나 일진 일퇴의 공방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이로쿠 4년(1561), 도조의 아들인 사이토 요시히로가 급사, 그 요시류의 아들 사이토 류싱이 뒤를 이어가면 서서히 노부나가는 미노국에 진출해 갑니다.
같은 무렵, 키타오미의 아사이 나가마사에 대해 여동생의 시를 분들게 하는 것으로 동맹을 맺어 사이토 씨에의 견제를 강화해 갔습니다.

한편, 에이로쿠 8년(1565년) 5월, 교토를 중심으로 기내에서 권세를 자랑하고 있던 미요시가는, 대립을 깊게 하고 있던 장군·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합니다(에이로쿠의 이상).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1승원 각경)는, 살해를 면하고,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에서 탈출해, 오미국의 야시마를 거점으로 하여 여러 다이묘에게 상경에의 협력을 요구합니다. 노부나가도 같은 해 12월에는 요시아키에 서장을 보내, 요시아키의 상경에 협력하는 취지를 약속합니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등의 협력을 얻어, 상경하기 위해, 노부나가와 미노 사이토씨와의 정전을 실현시켰습니다.

그런데 에이로쿠 9년(1566) 8월, 노부나가는 영국 질서의 유지를 우선해, 정전을 깨고 미노 사이토
씨와의 전투를 재개시킵니다. 그리고, 카지다 성주·사토 타다노와 카지다중을 아군으로 하고, 나카노의 여러 성을 손에 넣으면, 미노국의 유력한 무장이었던 니시미노 3인중(이나바 료도리·씨가 직원· 안도 모리나리 등을 아군에게 붙입니다.
에이로쿠 10년(1567), 사이토 류싱을 이세국 나가시마에 패주시켜 사이토 씨의 거성, 이나바야마성을 손에 넣습니다. 이 때, 이나바야마성을 기후성으로 개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에 이어 미노국도 소령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텐시타 후부」의 주인을 노부나가는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표시의 「천하」란, 일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고키우치(긴키)를 의미한다고 생각되고 있어, 무로마치 막부 재흥과 근내(킨키) 평정을 구상에 그렸습니다.

아시카가 요시 아키 타테

미노국의 이나바야마성 공략과 같은 무렵, 오다 노부나가는 키타이세에 본격적인 침공을 실시해, 키타이세의 고베씨에게는 3남의 오다 노부타카를, 나가노씨에게는 동생 오다 노부요시(신포)를 입양 으로 넣어 키타 이세 하치 군의 지배를 굳혔습니다.
한편,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미국을 탈출하고, 에치젠국의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래 몸을 들여 상경의 기회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에서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요시아키를 옹호하고 상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이로쿠 11년(1568) 7월,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해 상경하기 위해, 부하의 무라이 사다카츠나 불파 광지·시마다 히데만 등을 에치젠국에 파견. 요시 아키는 이치 가야를 나와 미노 쿠니로 향해 기후 성 아래 타치 마사지에서 노부나가와 회견을 실시했습니다.
같은 해 9월,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봉사하고, 상경을 시작했습니다. 기내를 지배하고 있던 미요시가는 내분열을 하고 있어, 미요시 가운데 미요시 의계나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은 요시아키의 상가에 협력해, 반의 소세력의 견제로 움직입니다.
한편, 요시아키를 옹립해 상경하는 노부나가에 대해서, 그 도상에 있는 미나미오미의 육각 요시켄·요시부자는 오다군과 싸웠습니다만 물러나, 거성의 관음사성을 포기했습니다. 한층 더 군을 진행해, 비와코의 남단에 있는 오쓰까지 진군하면, 섭진 국하내국(현재의 오사카부 북부, 동부)의 수호, 국인도 오다 쪽에 붙었기 때문에, 야마토국에 원정하고 있던 미요시가는 저항 실수없이 시코쿠로 철수합니다.
노부나가는 교토에 카미로를 완수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제15대 무로마치 막부 장군이 되었습니다.

반오다 포위강

모토가메 원년(1570), 오다 노부나가는 에치젠(현재의 후쿠이현 영북)의 아사쿠라가를 토벌하려고 출병했습니다만 여동생 아사이 나가마사에 배반되어 궁지에 빠집니다.
힘들지만 위기를 벗어난 노부나가는 6월, 아사쿠라, 아사이가와 싸우고 승리하고 있습니다(누나가와의 싸움). 여기에서, 에치젠의 아사쿠라가, 키타오미(현재의 시가현 북부)의 아사이가, 시코쿠를 영위하는 미요시가,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 히에이잔의 연력사와 적대해 고전에 빠집니다. 이 해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나 마사모치마치 천황의 중개로 각지의 세력과 평화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노부나가는 옹립한 아시카가 요시아키와의 관계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요시아키는 반신장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해, 각지의 유력 다이묘에게 상경을 촉구했습니다. 이것에 응한 것이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의 다케다 신겐입니다. 모토가메 4년(1573), 다케다 신겐은 요시아키의 요청에 따라 상경할 수 있도록 군을 이끌고, 카이를 뒤로 합니다. 도에가와(현의 시즈오카현 서부)에서 노부나가와 동맹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깨고(미카타가하라의 싸움) 했습니다만, 그 도상에서 병사. 다케다 가문은 가미카도 도상에서 보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으로 숨을 불어 넣은 것이 노부나가입니다. 반 노부나가의 자세를 취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도시에서 추방해, 기내 각지의 반오리다 세력을 구축해 갑니다.
텐쇼 3년(1575), 노부나가를 괴롭힌 다케다 신겐의 흔적을 이은 다케다 카츠요리와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싸움 승리(나가시노의 전투).
대략, 마지막까지 저항한 것은 이시야마 혼간지 정도였습니다. 텐쇼 8년(1580) 이시야마 혼간지와 평화를 맺고 노부나가는 완전히 기내를 수중에 담습니다.

이와 같이, 기내를 평정한 후, 중국 지방의 모리가, 시코쿠의 나가스가부가, 호쿠리쿠의 우에스기가, 중부 지방의 다케다가, 간토의 호조가와 대치해 갑니다.
텐쇼 10년(1582), 중부 지방을 지배하에 두는 다케다 카츠요리를 토벌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고슈 정벌을 실시했습니다. 카츠요리는 아마메산에서 자해하고 다케다가는 멸망합니다. 이렇게 오다가는 카이와 시나노(현재의 나가노현)를 판도에 넣었습니다.
“천하는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수중에 있다”라고 누구나가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혼노지의 이상

텐쇼 10년(1582) 5월 29일, 오다 노부나가는 아직 저항을 계속하는 모리 테루모토 모리씨에 대한 중국 원정의 출병 준비를 위해 공회를 데리지 않고 소성중만을 이끌고 안토성에서 상경해, 혼노지에 체류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