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나가(2/2)천하인의 유능한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도요토미 히데나가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도요토미 히데나가(1540년~1591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고리야마성

고리야마성

관련 사건

같은 해 10월 26일(12월 6일), 상가를 거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에 도착하여 히데나가 저택에 숙박합니다. 그날 밤, 히데요시 스스로 이에야스 앞에 나타나 자신에게의 신종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많은 기록이 남아 있어, 「가타다다이기」나 「도쿠가와 실기」등의 문헌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텐쇼 14년(1586), 오토모 소네가 시마즈씨의 압박에 의해 궁지에 빠져, 히데요시의 참전 개입과 구제를 요구해 상경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소린을 대접 "내각의 의는 종이(千利休), 공의의 일은 재상(히데나가) 알고 후, 드디어 신문 없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도요토미 정권의 다이묘 통제의 권한이 히데나가에게 위탁되고 있었던 것이 이 말로부터 묻습니다(『오토모가 문서록』).

같은 해 8월, 오쿠쿠마노의 사무라이들에 의한 일소가 발기합니다(기타야마 카즈히로). 히데나가도 출진했습니다만, 호설 때문에 정벌은 머물렀습니다. 텐쇼 17년(1589)에는 일소는 진압되고 있습니다.

텐쇼 15년(1587)의 규슈 평정에서는 히나타 방면의 총 대장으로서 출진.
이가가와의 싸움의 무대가 된 다카기로를 포위하면, 원군으로서 달려온 시마즈 요시히로가 미야베 계윤의 진에 야습을 걸었습니다(네시라자카의 싸움). 계윤이 항전하고 있는 사이에, 도도 타카토라·도가와 타츠야 등이 합류. 시마즈군의 야습은 실패로 끝나 시마즈군이 사쓰마국으로 철수했습니다.

그 후, 시마즈 이에히사가 강화에 히데나가를 방문해, 히나타 방면의 진군은 종료. 이 공적에 의해 8월에 종2위권 대납언에 서임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데나가는 규슈 정벌에 참가한 다이묘에 비싼 병량을 팔려고 히데요시에 멈춰진 것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텐쇼 16년(1588), 기이의 잡가에 있어서 재목의 관리를 하고 있던 다이칸·요시카와 헤이스케가, 히데나가에게 매매를 명령받은 구마노의 재목 2만 그루의 대금을 착복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도착해 요시카와가 처형됩니다. 히데나가 자신도 책임을 묻고, 히데요시로부터 다음 해의 연두의 인사를 거부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텐쇼 17년 1월 1일(1589년 2월 15일), 오사카성에서 여러 다이묘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신년 축하의 태도 진상을 실시합니다(『후편 구기 잡록』보다). 이 후 히데나가가 오사카성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같은 해 3월, 쓰루마츠를 회임한 히데요시의 측실차의 산소로 하기 위해 요성의 개수를 담당합니다. 그러나 텐쇼 18년(1590) 1월경부터 병이 악화해, 호조씨 정벌의 오다와라 정벌에는 참가할 수 없고 기내의 유수거를 맡았습니다. 10월경에 히데지가 히데나가의 질병 회복의 기원 때문에 담산 신사에 방문했다는 기록도 있어(「담산 신사 문서」), 히데나가와 히데지, 양자의 관계도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텐쇼 19년 1월 22일(1591년 2월 15일), 히데나가는 고리야마 성내에서 병사했습니다. 향년 52.
흔적이 되는 직계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독은 양각자가 되고 있던 조카(언니·치의 아들, 히데지의 동생)의 히데호에게 이어받았습니다. 고리야마성에는 가네코 56,000여장, 긴코는 2마리 방방으로 가득 찬 금은이 비축되어 있었다는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계명은 “대광원전 앞 아소하루다케 사오에다이 거사”. 현재의 야마토군 야마시 미노야마쵸에 「오노나 츠카」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오사카시 주오구의 도요쿠니 신사에는 형·히데요시 및 조카·히데요리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히데나가의 가계는 4년 후의 문록 4년 4월 16일에 히데호가 17세에 사망한 것에 의해 단절했습니다.
히데나가는, 형의 히데요시의 단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존재로서 매우 다른 전국 다이묘들로부터의 신뢰도 두껍고, 물론 히데요시로부터의 신뢰도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여러 다이묘들은 뭔가 곤란한 일이 있으면 히데나가에게 소중함을 부탁하는 일도 많아, 도요토미 정권에 있어서는 없어야 할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히데나가가 앞으로 10년이라도 장수하고 있으면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도요토미가를 지지해, 도쿠가와 막부는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고리야마성

고리야마성은 현재의 나라현 다이와 고리야마시에 있던 성입니다.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0세기 후반, 군산중이 안진의 성을 쌓았다는 기록입니다.
나라 시대에는 약원이 운영되고 있었다고합니다.

고리야마성은 아키시노가와와 토미오강의 중간에 돌출한 니시쿄 구릉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히라야마성 또는 헤이성으로서 아케치 미츠히데와 후지도 타카토라 등이 보청에 종사하고, 츠츠이 준케이와 하시바 히데나가의 주도에 의해 개수되었습니다 했다.

나라는 양질의 석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라 일대의 각 호에 고로 태석 20 짐의 제공을 의무화해, 사원의 석지장이나 묘석, 불탑등도 징발해 이시가키석으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헤이조 교라 성문의 것이라고 하는 초석이 사용되고 있거나, 8세기경의 불교 유적인 「두탑」(나라시)의 석불이 군산성의 돌담 중에서 발견되거나 하는 등 , 역사적인 가치있는 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7세기 초, 마스다 나가모리가 개역된 후는 일시 폐성이 됩니다만, 미즈노 카츠나리 입봉시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개수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악보 다이묘가 역대 성주를 맡고, 야나기사와 요시리의 입봉 후에는 야나기사와씨가 메이지 유신까지 거성으로서 사용했습니다.
벚꽃의 명소로서 일본 사쿠라 명소 100선에 선정되어 2017년(2017년) 4월 6일, 속일본 100명 성(165번)에 선정되었습니다.

야나기사와 신사 창립시에 심어진 벚꽃은 일본 사쿠라 명소 100선에도 선정되어 매년 4월 1일부터 열리는 「성 축제」에는 많은 꽃놀이객으로 붐빕니다.
또한 2022년 11월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