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씨 나오(1/2)관동 호조가 마지막 당주

호조씨 직

호조씨 직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호조씨 나오(1562년~1591년)
출생지
가나가와현
관련 성, 절, 신사
오다와라성

오다와라성

누마타성

누마타성

관련 사건

전국 시대의 초, 간토에 하나의 다이묘가 탄생한, 호죠씨입니다. 호조 사쿠모에서 흥분한 호조 씨는 전국 시대를 통해 세력을 확대하여 관동에 패를 주창했습니다. 그리고 4대 호조씨 마사의 아이로서 태어난 5대째 당주에 취한 것이 호조씨직이었습니다. 씨직의 무렵이 되면 안정된 영국 경영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쓰러집니다. 이번은 호조씨의 마지막 당주, 호조씨직에 관해 보고 싶습니다.

호조씨(고호조씨)란?

호조씨는 전국시대의 시작과 함께 탄생합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봉공중이며 정소 집사를 맡고 있던 이세씨의 일문에 이세 신구로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신구로의 언니(키타가와덴)는 스루가국의 수호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타다에게 시집 했습니다만, 요시타다가 오히토의 난으로 토사해 이마가와가는 내란에 돌입합니다. 하야구모는 스루가국에 가서 누나의 아들인 류오마루(후의 이마가와씨 부모,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버지)를 지지해 당주에게 취하게 했습니다. 이 공적으로 신구로는 스루가국에서 영지를 주어집니다. 스루가에 영지를 가진 이세 신구로는 이즈국에 침공해, 관동에 발판을 쌓아 대두했습니다. 이 이세 신구로가 후세에서 호조 사쿠모라고 불리게 됩니다.

신구로의 아이, 씨줄은 다음의 당주가 됩니다. 씨줄은 「이세」라고 하는 성에서는 관동의 무사들에게 친숙함이 없는 것으로부터 「호조」라고 하는 성으로 바꿨습니다. 호조 성은 가마쿠라 막부 집권이었던 호조 씨로부터 취해져 간토 무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었습니다. 덧붙여서 가마쿠라 시대의 집권 호조씨와 전국시대의 호조씨와는 다르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호조씨를 「고호조씨」 「오다와라 호조조씨」등이라고도 불립니다.

호조 성으로 바꾼 씨줄의 무렵에는 이즈반도에서 관동 중앙으로 세력을 늘려 간토의 여러 다이묘로부터 경계되었습니다. 미츠츠나의 아이, 3대 호조 미야스의 무렵이 되면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관동의 여러 다이묘는 연합을 짜 호조씨 야스시를 공격했지만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카와고에 야전). 이렇게 씨씨야스의 대가 되면 관동 제일의 다이묘가 됩니다. 그런데 요즘, 인접하고 있는 카이국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호조 씨야스는 대립했습니다.

전국시대 중반, 관동에서 고신에쓰와 도카이의 정세는 호조 씨야스, 다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움직여 갑니다.

고세이 슌쿠쿠니 동맹과 씨직의 탄생

3대 당주가 된 호조 씨야스는 관동에서의 세력 확대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인접하고 있던 카이쿠니 타케다 신겐은 이마가와, 호조와의 소경쟁을 실시하면서 시나노국에의 침공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접하고 있던 스루가국의 이마가와가는 호조, 다케다와의 소경쟁을 실시하면서 미카와국에의 침공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목적을 가지면서도 소경쟁을 반복하고 있던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가. 3자는 대립이 불모라고 생각하고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천문 21년(1552년)
천문 22년(1553년):다케다 신겐의 딸 황매원이 호조씨 야스시의 자호조씨 마사
천문 23년(1554년):호조씨 야스의 딸 하야카와전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이 이마가와씨 진정으로
이렇게 3개의 집은 인사관계를 구축했습니다(갑상짤삼국동맹).

호조 씨 야스노코, 호조 씨 마사에 신부한 다케다 신겐의 딸 황매원은 남자를 낳습니다. 씨 나오토는 삼국 동맹의 결과로 이 세상에 생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마사와 씨 나오의 전복

삼국동맹을 맺은 이마가와, 다케다, 호조의 3가.
3집 중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가장 빨리 상경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에이로쿠 3년(1560) 5월, 오와리국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토벌되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토벌되어 아이의 진정한 대가 되면 흔들리지 않고 멸망합니다.

다케다가는 시나노국을 지배하에 거두고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 국경에서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토가메 3년(1572) 가미사카를 목표로 했습니다만, 다음 해 가미카도 도상에서 다케다 신겐은 병사합니다. 신겐 후, 타케다 카츠요리가 이어졌지만 타케다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몰락한 2가와는 달리 호조가는 영토를 확대해 나가 호조씨정의 무렵에 최대판도가 되었습니다. 호조씨 나오토는 텐쇼 5년(1577)경까지 전복, 텐쇼 8년(1580) 8월 19일 호조씨 마사가 은거해 씨 나오리가 호조가의 당주가 됩니다. 씨직을 당주로 하면서 씨정과 분담해 관동을 통치해 갔습니다.

도쿠가와가와의 싸움과 독희와의 혼인

텐쇼 10년(1582) 3월, 다케다가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고슈 정벌). 다케다가 영국 중 카이국은 노부나가의 가신 가와지리 히데타카가, 시나노국의 일부와 우에노국의 일부는 타키가와 일익에 주어지고, 타키가와 일익은 관동 수호를 자칭했습니다. 오다가가 관동에 진출합니다.

그런데 같은 해 6월,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이상으로 자해에 몰렸습니다. 뒤 방패가 없어진 카와지리 히데타카는 국인(지역의 소령주)들에 의해 토벌되고, 카이 나라를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집니다. 호조씨 나오토는 호기라고 보고, 삼촌 호조씨방 등과 4만 3천의 병사로 타키가와 일익이 있는 우에노국을 공격합니다. 6월 18일에는 양군은 격돌, 19일에 호조가가 승리했습니다. 타키가와 일익은 패주하여 우에노국에서 시나노국으로 도망합니다. 그것을 쫓아 호조가도 시나노국에 침공, 기타시나노를 지배하에 담았습니다. 호조씨 나오토는 관동에 진출해 온 오다가를 격퇴합니다.

그러나 호조가 이외에도 다케다가의 유령 카이, 시나노국을 노리는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도카이 지방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8월에는 카이쿠니에 본진을 두고, 양자는 노려서에 들어갑니다. 이 노려보는 사이에 호조가에 복속한 다케다가 구가신들의 이반, 산발적으로 행해지는 각지의 충돌로 수를 이기는 호조가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호조가는 화목을 맺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녀독희가 씨직직으로 아내가 되었다(텐쇼 임오의 난). 호조가와 도쿠가와가는 인사관계를 맺는다.

오다와라 합전 전야

호조씨 나오토는 서쪽에 위치한 도쿠가와가와 동맹을 맺은 후, 동쪽의 시모노국, 상륙국(현재의 토치기, 이바라키현)에 세력을 늘립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에 대두해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내를 중심으로 세력을 늘리고, 중국 지방의 모리가, 호쿠리쿠 지방의 우에스기가, 도카이 지방의 도쿠가와가를 사실상 지배하에 거두면 소무사령(다이묘 사이의 침략 행위나 사투 행위의 금지)를 냈습니다.

씨 나오토는 중앙에 나타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현을 경계하고 군비 증강을 맡는 한편, 텐쇼 16년(1588)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개를 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에 호조씨규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서히 도요토미 정권이 확립되어 가는 가운데, 다이묘 간의 영토도 토론하여 확정해 갑니다. 이 분쟁 지역의 토론 중에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 누마타성과 그 주변 영토가 있었습니다. 누마타성은 기타칸토의 요충지로 호쿠리쿠의 우에스기가, 관동의 호조가, 시나노국의 사나다가가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 누마타성의 토론을 히데요시 아래에서 행해졌으며, 누마타성은 호조가의 지배, 명호도성을 포함한 누마타령의 3분의 1을 사나다령으로 결정했습니다.

호조가는 누마타성에 이노마타 쿠니헌을 파견해 성대로 했습니다. 여기에 북관동의 분쟁지도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노마타 쿠니 켄은 일계를 강구하고 명호도성을 탈취합니다(명호도성탈취사건). 성을 빼앗긴 사나다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보고, 히데요시는 소무사령 위반으로 했습니다. 여기에 도요토미가와 호조가와의 관계는 파탄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오다와라 합전

텐쇼 18년(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가의 토벌을 전국의 다이묘에게 명령합니다. 도카이 지방에서는 도요토미가, 도쿠가와가가 호쿠리쿠 지방에서는 마에다가, 우에스기가, 사나다가가 키타칸토는 도요토미가에 신종한 사타케가가 침공을 개시합니다. 또 중국 지방의 모리가, 시코쿠의 나가가가부가는 배를 내고 사가미만에서 오다와라를 둘러쌌습니다.

호조씨 나오토는 호조 지배 지역에 동원령을 내고 오다와라성이나 각지의 성의 수축, 하코네의 순찰 등을 실시합니다.
3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요세이 천황으로부터 호조씨의 토벌을 명목으로 절도를 받습니다. 천황에 의한 호조가 토벌의 칙서야말로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사실상의 관군으로서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어 관동으로 진격합니다. 하코네에 있는 야마나카성을 비롯해 간토 각지에 있는 호조가의 성은 잇달아 공략되어 4월에는 오다와라성을 포위하에 두었습니다.

오다와라성의 육지는 대군에 둘러싸여, 붙여 성도 만들어집니다. 바다는 대선단의 포위에 의해 빠져나가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호조가의 가신은 스스로의 불리를 깨닫고 중신이었던 마츠다 겐히데의 장남, 가사하라 마사하루가 도요토미가에 내응하려고 하고, 그것을 차남의 마츠다 나오히데가 호조 씨직에게 밀고, 씨나오는 가사하라 마사하루를 성패 아버지의 마츠다 겐히데를 유폐하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호조가는 내부에서 무너져 갑니다.
농성 3개월, 호조씨 나오토는 항복을 결의했습니다.

패전과 씨직의 죽음

텐쇼 18년(1590) 7월 5일, 항복을 결의한 호죠 씨 나오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하하의 무장, 타키가와 유리의 진소에 가서 스스로의 절복과 교환에 장병의 조명 탄원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이기도 한 씨직을 조명합니다. 한편, 씨직의 아버지인 호죠 씨 마사, 삼촌의 호조 씨 테루, 숙로의 도지 마사시게, 마츠다 겐히데가 개전의 책임을 훔쳐 절복을 명령받았습니다.

호조씨 나오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