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오 (2/2)노부나가 사망 후 오다가 당주
오다 노부오
텐쇼 11년(1583) 9월,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을 축성해 여러 다이묘에게 호령하는 근거지로 합니다. 이 무렵부터 오다 노부오의 취급도 가벼워져, 하 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오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오의 가신의 파괴를 모시고, 노부오도 도카이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습니다. 텐쇼 12년(1584) 3월, 하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투에 들어갑니다(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 싸움은 도쿠가와가 유리하게 진행되었지만 가을의 끝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됩니다. 히데요시는 불리를 깨닫고 스스로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려고 생각했지만 부진하게 끝납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오에게 짜내 강화를 진행해, 싸움에 지쳐 있던 노부오도 응했습니다. 이 후에도 하 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려서는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이에야스도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의 처우와 추방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화목한 오다 노부오. 오다가의 당주라는 입장에는 들어갔습니다만,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도 거칠게 다루지 않은 것 같고, 텐쇼 15년(1587) 11월에는 내대신에게 추진됩니다. 이것은 관백인 히데요시에 이어 무가의 순서 2위,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나 실력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상위에 위치합니다. 이후 내대신의 지위에 있는 동안은 「오와리우치 대신」 「오와리우치부」라고 불렸습니다.
이렇게 도요토미 정권 아래에 있고 영지는 오와리국을 중심으로 100만석 가까이, 관위는 내대신에 있던 오다 노부오. 이 오다 노부오가 몰락합니다.
텐쇼 18년(1590) 관동의 호조가를 토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오다와라 정토), 관동의 땅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구 도쿠가와가의 영지를 오다 노부오에게 주고, 그때까지의 오와리국의 구령을 다루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조조 전래의 땅인 오와리국에 집착한 노부오는 고사합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격노해 오다 노부오를 추방했습니다. 한때, 도호쿠나 시코쿠에 유폐된 노부오는 최종적으로 면도해(이 무렵부터 죠진 ⦅조신⦆라고 하는 호를 사용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가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히데요시의 고가중으로서 도요토미 정권을 보냅니다.
에도 막부에서의 취급과 만년
게이쵸 3년(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명이 사망합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무가의 필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정권의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가 대립. 게이쵸 5년(1600)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오다 노부오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옆에 붙었습니다.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고 노부오는 은거령을 다루고 오사카에서 은둔 생활을 보냅니다.
그런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의 싸움에 승리하면 천하인이 되어 정이 대장군이 됩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오가 은둔하고 있는 오사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습니다.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군은 노부오의 사촌 여동생을 당하고 도요토미가는 오다가의 당주였던 오다 노부오를 자진영에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오다가 당주였던 노부오가 도요토미가에 들어가면, 과거의 영향력을 행사되어 도요토미가의 힘이 커지면 두려워합니다. 거기서 이에야스는 노부오에게 영지를 주는 것을 약속해, 오사카성 입성을 방해했습니다.
元和元年(1615) 오사카의 진이 일어나면 도요토미가는 도쿠가와가에 멸망됩니다. 오다 노부오는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 우다군과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 감락군 등 영지를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버리고 취미에 살았던 노부오는 교토에 계속 살아 영지에는 아들과 가신을 파견하고 관리시켰다.
이렇게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와 시대에 농락된 오다 노부오는 교토에서 자적인 은거 생활을 보내고 만년을 보냅니다.
히로나가 7년(1630) 4월 30일, 오다 노부오는 교토 기타노 저택에서 사망, 향년 73. 시신은 오다 가문의 보리사가 있는 교토의 대덕사 소견원에 묻혀 있습니다. 또한 우에노 쿠니 감락군 오하타의 쇼후쿠지, 이세쿠니 키타하타가의 묘가 있던 나라현 무로생지에도 분골되어 시가현 쿠미구지에도 공양탑이 있습니다.
히로나가 9년(1632), 노부오의 4남 오다 타카나가는 스님을 불러 도쿠겐지(나라현 우다시)를 창건해 노부오의 보리사로 했습니다.
미나미 이세의 타마루성
오다 노부오는 호쿠타가에 입양하여 이세국을 통치합니다. 처음에는 타이가우치성에 들어갔습니다만 텐쇼 3년(1575)에 폐성으로 하고, 타마루성으로 옮깁니다.
타마루성은 이세국의 전략적 요충으로서 남북조 시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성에 오다 노부오가 들어가자, 3층의 천수를 갖춘 근세 성곽으로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텐쇼 8년(1580), 노부오의 동고중(주인에게 스님으로서 섬기고 잡무나 예사를 한다)의 현지가 돈을 훔치려고 화약고에 방화해,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마루성은 소실, 노부오는 마츠가시마성(마츠시마성)을 쌓아 옮깁니다.
그 후, 에도시대에 들어서자 타마루성은 기슈 도쿠가와가의 지배하에 들어가 가로의 구노 무나나리에게 주어져 타마루번 6만석의 성으로서 메이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가면 타마루성의 건물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천수대와 이시가키, 내보리, 외보리, 공보리가 유구로 남아 있습니다. 2017년(2017)에는 계속 일본 100명성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현재는 한때 성내에 타마키마치 동사무소나 마을립 타마기 중학교가 있어, 벚꽃이 많이 심어져 꽃놀이객으로 붐비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오하타 번과 낙산원
모토와 원년(1615)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야마토국 우다군에 3만석, 우에노국 감락군 등의 2만석, 아울러 5만석을 오다 노부오에게 주었습니다. 노부오는 이미 세상을 버리고 교토에서 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3남 노부라를 명대로서 우에노국에 파견해, 여기에서 오다가 7대 계속된 코하타 번이 됩니다.
그런데 교토에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오다 노부오는 경치 좋은 정원을 쌓을 계획을 생각해, 마에다, 이케다, 아사노 등 여러 다이묘로부터 막대한 기부를 모아, 교토에서 차인을 파견해 조원시킵니다. 면적 1200평(3960제곱미터)의 부지에 수목이나 명석을 늘어놓고, 이케센 회유식의 다실을 4개 설치해, 주위의 산들을 차경으로 한 호화스러운 정원이었습니다. 노부오는 이 정원에 논어 「지자는 물을 즐기고, 인자는 산을 즐긴다」로부터 「낙산원」이라고 명명했습니다만, 조원에 7년을 옹아 자신이 보는 일은 없었습니다. 낙산원은 현재, 군마현 유일의 다이묘 정원으로서 현내 최초의 명승 지정 정원에 나라로부터 지정되고 있습니다.
군마현 감락초의 고바타 사쿠라 축제
고바타 사쿠라 축제는 쇼와 60년부터 매년, 3월 하순의 일요일에 열리는 감락초 최대의 축제입니다. 오다 노부오로부터 7대 통치되어 온 것을 유래로 하고 행해지고 있습니다. 당일은 마상의 대장을 선두로 창대, 사무라이, 갑옷 무사 등으로 분한 읍민 300명이 낙산원에서 출진식을 실시해, 거기에서 하치만 신사에서 기원식, 오다 무네가의 무덤이 있는 숭복사에서 전승 보고, 감락 종합 공원 다목적 광장에서 개선식을 실시합니다.
개선식이 이루어지는 감락 종합공원 다목적 광장에서는 화조총의 실연이나 어트랙션 등도 행해져 벚꽃 아래, 봄의 방문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즐깁니다.
오다 노부오의 기사를 다시 읽으십시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