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오 (1/2)노부나가 사망 후 오다가 당주

오다 노부오

오다 노부오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오다 노부오(1558년~1630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기요스 성

기요스 성

마쓰자카성

마쓰자카성

관련 사건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세력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이상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해 자해에 몰렸습니다. 이 노부나가 사망 후의 오다가 당주가 된 것이 오다 노부오입니다. 노부오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세국을 중심으로 영지를 가진 노부오는 아버지 노부나가 사망 후, 오다가 내부의 정쟁을 이기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몰락합니다. 이번에는 노부나가의 아이, 오다 노부오를 봅니다.

오다 노부오의 이름은?

오다 노부오의 「노부오」의 읽기에는 「노부를」와 「노부카츠」의 2가지의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노부오로부터 「오오」의 이름을 받은 가신은 모두 「카츠」라고 읽혀져 있습니다. 또 『오유덴카미 일기』에서는 「노후카츠」라고 쓰여져 있는 것으로부터 「노부카츠」가 일반적인 읽기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한편, 가계도(「히로마사 중수제 가보」 「오다계도」)에서는 「노부를」라고 흔들어 가명이 흔들리고 있어, 아이들의 히데오나 료오의 읽기는 「을」인 것으로부터 「노부를 "라고도 생각됩니다.

이 외에 「노부오」를 「노부요시」라고 읽혀져 있었다고도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서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노부를」 「노부 카츠」의 두 가지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노부카츠」로 진행해 가고 싶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오

오다 노부오는 에이로쿠 원년(1558),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으로서 태어납니다. 어머니는 오다 가가신의 이코마 가종의 딸(「요시노」 혹은 「유류」)로 동모 형제에게 장남의 신충, 여동생의 도쿠히메(도쿠가와 신야스무로)가 있어, 노부나가는 이 3명이 고덕( 불 위에 냄비, 약 캔 등을 놓는 대)와 같이 지지하고 오다가의 번영에 다하기를 바란다, 도쿠히메에게 「고덕」이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이 형제 외에도 노부오와 같은 해에 태어난 세 남자의 노부 타카가있었습니다. 혹은 신효가 먼저 탄생했지만 노부오의 어머니가 정실적인 입장에 있는 것으로부터 신효 출생의 보고를 늦추고 형제의 순서를 바꿨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로부터 신효는 동생으로 된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라는 속설도 있었을 정도로 나중에 노부오, 신효의 형제는 크게 대립했습니다.

이세의 키타 바타 씨에게 입양

그런데 오다 노부오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의 소령주 밖에 없었습니다만, 에이로쿠 10년(1567)에는 미노국(현재의 기후현)을 공격해 떨어뜨려 오와리, 미노국 2개국의 다이묘가 되어 합니다. 게다가 에이로쿠 11년(1568)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봉사하고 상경해, 기내(현재의 긴키)에 영향력을 가집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12년(1569) 8월, 노부나가는 이세국(현재의 미에현)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세쿠니 타이가우치성을 공성했지만, 견성 때문에 공격해 넘어집니다. 공격받은 키타바타 가문도 견디고 있었지만 교착하고 고생합니다. 쌍방이 수막이 되어 화해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화해에 오다가 차남의 오다 노부오를 키타바타씨의 입양으로 받아들인다는 조건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오다 노부오는 오와리국에서 이세쿠니 다이카우치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모토가메 3년(1572, 혹은 모토카메 4년⦅1573⦆ 모두)에 오다 노부오는 전복했습니다.

키타하타 씨의 숙정과 이세국의 장악

그런데 기내를 세력하에 두고 차분히 판도를 펼쳐 갔던 아버지의 오다 노부나가. 이 노부나가의 확대에 주위의 다이묘는 위기감을 기억합니다. 모토가메 원년(1570), 아사이, 아사쿠라, 미요시, 육각, 연력사, 이시야마 혼간지가 오다 노부나가에 반항합니다(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 이시야마 혼간지에 호응한 기타이세의 절이나 문도도 오다가에 저항합니다. 특히 전년, 키타이세의 일부 지역을 지배한 오다라는 새로운 영주에 소령주들도 반항해, 일원에 호응했습니다. 이렇게 대규모 세력이 된 이치소는 "이세 나가시마의 일향 일소"라고 불리고 텐쇼 2 년 (1574)까지 오다 가문에 저항합니다.

이 이세 나가시마의 일향 일규에 오다 노부오는 텐쇼 2년(1574)에 출정합니다. 이것이 노부오의 첫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다 노부오는 키타하타가의 입양에 들어갔습니다만, 이세국의 지배는 구주 호쿠타타가와 오다 노부오의 2원 정치의 태세였습니다. 이것을 오다 노부나가는 싫어하고 키타바타 가문의 일족을 속이고 토벌합니다. 여기에 이세국은 오다 노부오의 권력 기반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오다 노부오는 이세국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오다가 일문으로서 다케다가와의 싸움(나가시노의 싸움)이나 호쿠리쿠의 일향 일규 정벌(에치젠 일향 일소의 정벌)에 종군하고 있습니다.

텐쇼 이가의 난

텐쇼 7년(1579) 9월, 이세국을 통치하고 있던 오다 노부오는 이웃나라의 이가국(현재의 미에현 이가시)에 눈을 돌려 독단으로 공격해 갑니다(텐쇼 이가의 난). 그런데 이가국을 자치 운영하고 있던 이가 12인중이라고 불리는 국인중에 저항되어 대패합니다. 독단으로 이가국에 침공해, 게다가 대패의 소식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는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는다」라고까지 꾸짖었습니다.

텐쇼 9년(1581) 9월, 이가국인중 내부의 절개에 성공한 오다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오를 총대장에 노부나가 자신도 출진해 다시 이가국에 침공했습니다. 이렇게 평정된 이가국 중 일부를 오다 노부오가 맡고 이세 이가와 통치하게 됩니다.

혼노지의 변과 안토성 방화의 혐의

차분히 판도를 펼쳐 천하인의 자리에 손이 닿을까, 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
그런데 텐쇼 10년(1582) 6월 2일,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적남의 신충은 니조 신고쇼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해 토벌되었습니다(혼노지의 이상).

혼노지의 이상한 소식을 들었을 때, 오다 노부오는 이세국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노부나가 위기의 이야기를 받으면 노부오는 스즈카 고개를 넘어 오미국(현재의 시가현) 고가군 토야마까지 군세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령인 이가국의 국인중이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 이상은 진행되지 않고, 안토성(노부나가의 거)을 탈출한 오다가의 자녀를 구출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를 토벌한 아케치 미츠히데는 하야시(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토벌되었습니다(야마자키의 싸움).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지은 안토성. 아즈치성은 아케치 미츠히데가 토벌한 야마자키 전투 후에 소실하고 있습니다. 「타이코기」에서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중신 아케치 히데만이 방화했다고, 「야소 연보」에서는 암울을 이유로 오다 노부오가 방화했다고, 혹은 근린의 일소나 도적에 의한 약탈로 소실되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오다 노부오는 기독교에 냉담했던 것으로부터 노부오를 辛辣에 쓰고 있었던 것 같고, 지금도 소실의 원인은 알고 있지 않습니다.

오다 가내 분과 동생 신 타카의 살해

아케치 미츠히데가 토벌되면 오다가 안에서 토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기요스 회의). 오다 노부나가가 토벌되었기 때문에 오다가의 가독을 누가 계승할지 논의가 있어, 차남의 노부오와 3남의 노부타카가 격렬하게 싸웁니다. 최종적으로 하 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타다의 아들(오다 노부나가의 손자) 삼법사(오다 히데노부)를 데려와 오다가의 당주로 정해, 어린 삼법사를 가신들이 모여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동시에 영지의 배분이 행해지고, 노부오는 오와리 일국을 더해 오와리, 이가, 이세가 됩니다.

그런데 청주회의 후, 오다 노부타카가 숙로였던 시바타 카츠야에 접근한 것으로부터, 노부오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의지하게 됩니다. 히데요시도 노부오를 오다가 당주로서 담아내는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텐쇼 10년(1582) 12월, 오다 노부오와 하시바 히데요시는 삼법사의 탈환을 명목으로 오다 노부타카가 있는 기후성을 공격합니다. 신효측에 관해 있던 시바타 카츠야는 눈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신효는 삼법사를 인도해 항복했습니다.

다음 텐쇼 11년(1583)에는 하 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야와의 충돌이 격렬해집니다. 그리고 4월, 가게가타케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 싸움을 타고 오다 노부타카도 기후성에서 시바타측으로서 봉기합니다. 그런데 싸움은 시바타 카츠야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자신의 불리를 깨달은 신효는 노부오로부터의 평화의 말을 믿고 성을 나왔지만, 노부오의 가신에 의해 절복을 강요당하고 죽었습니다. 이렇게 오다 노부오는 오다 노부나가의 죽은 후, 오다가 당주의 자리를 수중에 담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와의 대립과 코마키 나가테의 싸움

오다 노부오는 오다 가 당주가 되었지만 하 시바 히데요시에 운영을 맡기고, 주위도 노부오는 하 시바 히데요시의 귀신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오다 노부오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