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항흥 (1/2)오다 노부나가의 유형제

이케다 항흥

이케다 항흥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이케다 항흥(1536년~1584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이누야마 성

이누야마 성

국보 천수
오가키성

오가키성

관련 사건

전국 시대, 무장에게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일족이라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형제들 사이에서 흔적을 다투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많은 유능한 무장을 부르는 가운데, 유형제로서 옆에 있던 이케다 항흥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노부나가에게 소성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섬기고, 노부나가의 사후는 하 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나가쿠테로 흩어진 이케다 항흥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탄생부터 이누야마 성주가 될 때까지

천문 5년(1536), 오와리 오다씨의 가신인 이케다 나리의 아이로서 오와리국에서 탄생했습니다. 어머니는 양덕원입니다. 아버지의 항리는 빨리 사망했다고 합니다만, 그 후 어머니의 양덕원은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가 되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유모의 젖꼭지를 사이에서 곤란하게 하는 아카코였다고 합니다만, 신기와 양덕원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진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중에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의 측실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노부나가의 유모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노부나가 근처에서 소성으로 섬기게 됩니다.
야산을 뛰어 다니는 노부나가에 대해 가는 등, 유형제나 소성의 관계를 지나, 어느 의미 진짜 형제인 것 같았다고도 전해집니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은 후에는 노부나가와 동생의 노부카치(노부유키)와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자주 두 사람 사이에는 이사카이가 일어나고 있으며, 신수 사망 후의 오다가도 노부나가파·신승파와 헤어지고 있었습니다. 생모의 츠치다 고젠은 노부카츠를 귀여워, 노부카치파였다고 합니다만, 항흥은 유형제로서 자랐던 것도 있어, 물론 노부나가파였습니다.

그리고 히로지 3년(1557),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모반을 기획한 노부카츠를 노부나가가 병이라고 보여주고 뛰어오르고, 항흥이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다가 내부의 싸움은 종지부를 치지만, 요즘 오다가는 아직 오와리 전체를 통일 할 수 없습니다. 에이로쿠 3년(1560) 5월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사이 협간의 싸움이 일어납니다만, 절대적인 수적 불리와 전경험의 차이로 불리 속, 이긴 것은 항흥들 가신단의 결속의 결과도 있었습니다. 그 후도 미노 공략 등에서 싸우고 노부나가 근처에서 신뢰를 얻으면서 실적을 올립니다. 그 결과, 모토가메 원년(1570년)의 누나가와의 싸움에서 활약한 포상으로서, 이누야마 성주가 되어 1만 관을 주어졌습니다.

이누야마 성주에서 혼노지 직전까지

이누야마성을 주어져 노부나가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던 항흥은, 그 이후에도 히에이야마 구이 토벌, 나가시마 일향 일규, 마키시마성의 싸움 등 노부나가에게 중요한 싸움에는 반드시 참진해 노부나가를 지킵니다.

텐쇼 2년(1574)에는 다케다 카츠요리에게 빼앗긴 아케치성의 압류로서, 토노의 고사토성에 들어갔습니다.
항흥은 그대로 오다 노부타다의 여력 취급이 되어, 텐쇼 6년(1578) 11월, 아리오카성의 싸움에 종군합니다. 텐쇼 8년(1580) 7월, 섭진국 아마가사키성·하나쿠마성(하나쿠마성)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하나쿠마성의 싸움). 이 전투 후, 이타미성을 주어졌습니다 또, 같은 해 6월, 아라키무라시게의 부하였던 나카니시 신하치로 등을 여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텐쇼 10년(1582) 3월에는 다케다 신겐 사망 후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의한 고슈 정벌에서는 두 명의 아들을 출진시켜 본인은 섭진의 유수를 맡도록 노부나가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5월, 비나카 타카마쓰성을 공격중인 히데요시의 원군으로 향하도록 명령받고 있습니다.

혼노지의 이상과 야마자키의 싸움·기요스 회의

텐쇼 10년(1582) 6월 2일, 혼노지의 이상으로 주군의 노부나가가 중신의 1명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에 의해 토벌됩니다. 히데요시의 원군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항흥은, 6월 11일에 중국 공격으로부터 되돌려 아마자키에 도착한 하시바 히데요시와 합류합니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지구를 항흥의 사위로, 차남 테루마사(테루마사)를 히데요시의 양자로 하는 것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또, 이때 항흥은 면발(출가)해, 승입이라고 호하고 있습니다. 야마자키의 전투에서는 병사 5,000을 이끌고 노부나가의 승전에 출진, 우익 선봉을 맡아 미츠히데를 깨고, 오다가의 숙로에 열었습니다.

오다가의 후계를 둘러싸고 오다가의 중신이 모여 논의된 기요스 회의에서는, 시바타 카츠야 등에 대항해, 히데요시·단바 나가히데와 함께 노부나가의 준손의 삼법사(오다 히데노부)를 옹립했습니다.

이때, 일설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아군해 주었을 경우는, 보답으로서 영지의 재분배로 편의를 도모한다」라고 하는 밀약이 있었다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만, 진위는 불명합니다.

기요스 회의 후, 영지의 재분배에서는 섭진국 오사카·아마가사키·효고 12만석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항흥은 오사카로 옮겨, 모토스케는 이타미에, 휘정은 아마가사키에 들어갔습니다.

텐쇼 11년(1583)의 하 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야가 부딪힌 가츠가다케의 싸움에는 참전하지 않았지만, 같은 해 5월, 미노 국내에서 오다 노부타카의 구령 13만석을 배령해 오가키성에 들어 있습니다. 기후성에는 모토스케가 들어갔습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과 최후

텐쇼 12년(158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인으로 차분히 돌진하는 자세에 불만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오의 연합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립해,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항흥은, 어느 쪽에 주는지 거취가 주목되었습니다만, 결국은 히데요시 쪽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이케다 문서」에서는, 이 싸움에 승리가 이루어진 아카키에게는 오와리 일국을 히데요시로부터 약속되고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전에서 이누야마성을 공략한 후, 도중에 카미죠성에 들러 미요시 노부요시·모리나가가(모두 항흥의 사위)·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국으로 향했습니다.

4월 9일, 이와사키성을 공격(이와사키성의 싸움), 그 후, 이에야스군과 충돌해, 원조, 나가가와 함께 싸우는 것도 토벌되어 버렸습니다. 항흥은 나가이 나오카츠에게 토해졌다고 합니다. 향년 49. 법명은 호국원 유다케 무네 히데오 거사, 가독은 휘정이 상속하고 있습니다.

그 후의 이케다가

항흥의 차남 휘정은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접근해 딸사가 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 이후, 이케다가는 외양이면서도 도쿠가와가 일문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 등, 서서히 파격의 대우를 받게 되어 갑니다.

이케다 항흥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