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쇼장지(1/2)하리마국의 용장
벳쇼장지
- 기사 카테고리
- 인물기
- 이름
- 벳쇼장지(1558년~1580년)
- 출생지
- 효고현
- 관련 사건
무로마치 시대, 하리마국에서 전국 다이묘가 된 집이 있었습니다, 별소가입니다. 별소가는 하리마국 수호인 아카마츠씨와 독립적으로 전국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했을 때부터 오다가에 속하고 있었습니다. 벳쇼장지의 대가 되어도 하리마국에서 오다카타에 대해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다른 국인중과 함께 배신합니다. 거기에서 거성에 세워 농장 오다가에 저항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리마국의 별소장치를 살펴보겠습니다.
별소가란?
벳쇼장지가 탄생한 벳쇼가.
별소가는 헤이안 시대, 하리마국(현재의 효고현 남서부) 아카마츠씨의 조인 아카마츠 계방, 이 계방의 손자에 해당하는 아카마츠 요시요시가 나뉘어 쌓았다고 합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본가의 아카마츠 가문에서 아이를 맞이하는 등 아카마츠 가문의 일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가요시 원년(1441) 사직(무로마치 시대, 군사, 경찰권을 다루는 장관의 사무소를 낼 수 있는 4개의 집, 산명, 쿄고쿠, 잇시키, 아카마츠)의 하나이며 하리마·비젠·미작의 수호 다이묘 아카마츠 만유가 6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유키를 저택에서 암살하는 가요시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장군을 암살한 것으로 아카마츠가는 토벌의 대상이 됩니다. 아카마츠가도 일각을 담당하고 있던 별소가도 쇠퇴합니다. 그런데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무렵에 아카마츠가는 복권, 오히토의 난의 무렵에는 구령의 하리마 등 3개국도 되찾았습니다. 이 아카마츠가가 복권했을 무렵, 히가시하리마의 수호대가 된 별소 노리치가 미키성을 구축해, 별소가의 중흥의 조가 되었습니다. 미키성을 거성으로 하는 별소가는 이렇게 흥분합니다.
별소가의 독립
아카마츠가에 속해 있던 별소가.
그런데 오닌의 난도 끝나 전국 시대에 들어가기 시작했을 무렵. 주가의 아카마츠가는 중신인 우라카미무라무네와 대립해 쇠퇴해 갑니다. 미키성을 구축한 벳쇼 노리치, 그 노리치의 손자에 해당하는 벳쇼 취치(베츠쇼 장지의 할아버지)는 아카마츠가의 쇠퇴에 따라 세력을 확대해 서 점차 아카마츠가에서 멀리 독립해 갑니다. 별소가의 전국 대명화입니다.
주가의 아카마츠가로부터 독립한 별소가. 히가시 하리마는 기내(킨키)에서 보면 동쪽 끝, 중국 지방과 기내와의 경계에 있습니다. 끝이라고 하는 것으로 변경과 같이 파악하기 쉽습니다만, 동쪽에는 아카마츠가를 대신한 우라카미가, 서쪽에는 기내를 누르는 호소카와 고국이나 고국의 뒤에 패권을 잡은 미요시 나가케, 북서쪽에는 역시 새롭게 대두한 아마코가와 강국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들 대국에 둘러싸여 있어 벳쇼 취치는 하리마국의 국인중과 손을 잡고, 한때는 미키성을 빼앗기면서도 별소가 최성기를 맞이합니다.
별소가는 히가시하리마에서 미키성을 거점으로 하는 전국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전국시대의 별소가
벳쇼 취치는 주위의 대국과 싸워 동쪽 하리마에 기반을 쌓습니다. 그리고 취치의 남남인 벳쇼 안지(벳쇼장지의 아버지)가 히로지 2년(1556)에 가독을 이어받습니다. 안지가 별소가의 가독을 이어받을 무렵, 기내에서는 미요시 나가요시가 패권을 잡고 기내 밖으로 침공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안지는 아버지 못지않고 무용이 뛰어나 미요시가를 격퇴합니다.
단지 벳쇼 안지가 활약하고 있던 같은 무렵의 에이로쿠 11년(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을 완수합니다.安治는 일찍부터 오다 노부나가와 보류를 하는 것으로 관계를 구축해, 병사를 내는 등 해 오다가에 속합니다.
이렇게 오다가에 속한 전국 다이묘의 별소가는 벳쇼장지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나가지의 탄생과 가독 상속
벳쇼 나가하루는 에이로쿠 원년(1558)에 벳쇼 안지의 적남으로 태어납니다, 유명은 고사부로.
그런데 모토가메 원년(1570) 장지가 12세 때 아버지의 안지가 몰리면 벳쇼 요시부모, 벳쇼 중종을 후견역으로 가독을 이어받습니다.
별소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상경시에 연락을 잡는 등 일찍부터 오다가에 속하고 있었습니다. 벳쇼 나가하루도 텐쇼 3년(1575) 노부나가에게 속견, 그 후도 자주 가미 노부나가에게 인사하고 있습니다.
텐쇼 5년(1577) 봄, 오다가는 기슈(현재의 와카야마현)에 침공하면 별소가도 숙부의 별소 중종을 파견해 가세하고 있습니다.
기슈 침공을 한 같은 해의 가을, 오다가는 하리마국을 평정하기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를 보낼 수 있습니다. 도카이, 킨키를 지배하에 다스리고 있던 오다가는 중국 지방을 소 귀하는 모리가 침공의 발걸음으로서 우선 하리마국을 평정하려고 시도합니다.
하리마국은 별소가가 일찍부터 오다가에 붙어, 또 나카하리마의 어착성 주코지 정직도 모리가와 싸움 오다가에 붙는 등 오다가 가까이의 지역이 되고 있었습니다. 하 시바 히데요시는 하리마국의 국인중으로부터 인질을 취해 아군에게 붙이면 우에즈키성이나 후쿠하라성 등(하리마 니시바타, 효고현 사용초)을 공략, 오다가는 하리마의 대부분을 점령해 갔습니다.
오다가는 중국 지방 침공의 단서로 하리마국을 잡습니다. 그 중국 지방 침공의 일각을 벳쇼 장지는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미키 전투
그런데 다음 텐쇼 6년(1578) 벳쇼 나가하루는 갑자기 오다가를 떠나 모리가에 붙는 것을 결정합니다.
오다가 이반의 이유는, 가고가와에서 행해진 평정(회의)에서 별소가의 의견을 하시바 히데요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히데요시에 의해 평정된 하리마국이 히데요시의 영지가 되면 소문이 나온 것, 무로마치 막부 사무소가 될 수 있는 4직의 일가 아카마츠씨의 일문인 별소가라는 명문 의식, 또 모리가로부터의 적극적인 이반의 작용이 있었던 등이 생각되고 있습니다.
토끼에 모퉁이도 오다가를 떠난 별소가였지만, 별소가의 영향하에 있던 히가시하리마, 오다가와 적대하고 있는 이시야마 혼간지의 문도를 많이 안고 있는 나카하리마의 에가 성 성주였다 미키도리 아키, 니시 하리마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우노 씨가 반오다의 입장을 지지. 하리마국 전체가 반오다가 일색으로 물들어, 정세는 일변했습니다. 오다 가문은 중국 지방 침공의 논란이 좌절합니다.
벳쇼장지는 모리가가 병사를 이끌고 내원할 때까지를 미키성에 처치하기로 했습니다. 이 별소가에 주변의 세력도 가세해 미키성에 7500명이 모였습니다. 이만큼의 병사를 안고 농성했기 때문에 많은 식량이 필요합니다. 세토나이카이의 제해권을 가진 모리가나 하리마탄에 접한 에가성의 미키가의 협력도 있어 세토나이카이의 해상 수송으로 미키성에 운반했습니다. 벳쇼 나가하루는 미키성에 곁들여 오다가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하 시바 히데요시는 미키성 주변의 별소가 지성을 공략해 미키성을 고립시킬 방침을 취했습니다. 봄부터 노구치성을 공략, 오다 노부나가의 적남 오다 노부타다의 원군도 얻어 카미요시성·시호성·타카사성 등을 떨어뜨려 갑니다.
차분히 미키성의 지성을 떨어뜨린 하시바 히데요시는 미키성 주변에 감시용의 부성을 쌓아 포위해 갔습니다. 텐쇼 6년(1578)의 봄부터 시작된 농성은 식량이 부족해져 가을이 되면 힘든 싸움이 되었습니다.
미키의 건살과 장지의 마지막
주변의 지성을 떨어지고 궁지에 서는 벳쇼장지.
그런데 같은 텐쇼 6년(1578) 가을, 미키성과 롯코산지를 사이에 둔 섭진국 아리오카성(현재의 효고현 이타미시) 성주 아라키무라시게가 오다가를 배신하고 벳쇼 나가지와 같은 모리방에 속합니다. 벳쇼장지는 섭진국에서 크게 북쪽으로 우회하여 미키성에 양식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보급로만으로는 식량 부족이 되는 별소가는 다음 텐쇼 7년(1579)부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와 자주 싸웁니다. 오다 노부나가도 하리마국의 국인이 배신 교착 상태가 된 것으로부터, 아케치 미츠히데를 하리마국의 북쪽에 위치한 단바국에 파견해 모리방에 붙은 야가미성의 하타야가를 멸망에 몰아넣었습니다.
하리마국은 교착 상태였지만, 그 주변의 나라에서는 차분히 오다가가 침공합니다. 그리고 모리에 대해서 있던 벳쇼 나가지나 아라키무라 시게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텐쇼 7년(1579) 가을, 모리가에 속하고 있던 비젠국(현재의 오카야마현 남동부)의 우키타 나오가가 이반해 오다쪽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다가에 저항하고 있던 섭진국의 이시야마 혼간지나 아라키무라시게, 하리마국의 별소 장치는 우키타 나오야에 의해 모리가와 분단되었습니다. 오다가를 배신한 아라키무라 시게시는 성을 전전하면서 저항했습니다만, 몰락해 갑니다.
벳쇼 나가하루는 미키성에 곁들여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식량의 반입로도 없어져, 고립 무원이 되었습니다. 단지 식량 부족이 되고 있던 미키성에 굶주림이 습격합니다. 「미키의 건살」이라고 불리는 싸움입니다. 미키성에는 싸울 만큼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텐쇼 8년(1580년) 1월, 미키성내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붙였습니다만 병량공격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 하 시바 히데요시에 의한 권고에 의해 벳쇼 장지와 그 일족의 절복을 교환해 성병의 조명이 결정됩니다. 17일 나가지는 절복, 개착은 가신의 미야케 치타다가 실시했습니다, 향년 23. 사세는 “지금은 단지 우라미도 아라지 여러분의 생명에 걸친 가신과 주로”라는 구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키성의 1년 10개월에 이르는 농성전은 종료되었습니다.
그 후의 별소가
미키 합전에 의해 멸망한 전국 다이묘의 별소가.
- 관련 사건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