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1/2)오다에 저항한 종교인
눈에 띄는
- 관련 사건
불교는 아스카 시대에 전래했고, 특히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운 가르침의 종파가 늘어났습니다. 그 하나가 정토진종입니다. 이 정토 마무네의 혼간지는 떠오르는 침을 반복하면서 발전해 갑니다. 그리고 전국시대, 현여가 주직을 맡을 무렵에 최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도약해 온 오다 노부나가와도 대립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시야마 혼간지의 현여에 대해 보고 싶습니다.
원래 혼간지란?
현여가 주직을 맡고 있던 이시야마 혼간지. 이시야마 혼간지는 현재의 오사카성과 오사카성공원에 있던 정토진종의 절입니다.
원래 정토 마무리는 가마쿠라 시대에 생긴 불교 종파의 하나로(가마쿠라 불교), 친무에 의해 일어납니다.親鸞는 정토종의 종조 법연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친무늬의 증손에 해당하는 제3세 각여의 무렵. 각여는 교토에 있던 친무지의 묘소(오타니 묘도)에 절을 세우는 혼간지의 실질적인 시작입니다. 이었다).
교토에 생긴 혼간지.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자 혼간지는 정토진종의 일종파로서 중심적인 사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불교종파의 압력과 같은 정토진종 내 다른 종파와의 확집 등 고난의 역사를 따릅니다. 괴로운 운영을 하고 있던 혼간지는 천대종청련원 아래에 이어지는 절이 되었습니다.
연꽃과 현여 탄생까지의 혼간지
타종파사원 아래에 속했던 혼간지.
오오나가 22년(1415) 혼간지에 한 명의 승려가 태어납니다.혼간지 중흥의 조 8세 연여입니다. 그러나 연꽃이 혼간지의 주직에 붙었을 때에는 몰락을 지극히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연꽃은 교토를 뒤로 하고,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실시합니다. 그 카이 있어 전국에 문도를 획득하고, 특히 가가국(현재의 이시카와현)은 수호 다이묘의 집 소동도 있어 혼간지가 사실상 전유에 이릅니다. 이렇게 많은 문도를 획득한 연여는 문명 10년(1478), 교토의 서 이웃 산과에 혼간지를 만듭니다. 야마시나 혼간지입니다. 더욱 명명 6년(1497) 은퇴한 연여는 오사카에도 절을 조영했습니다, 이시야마 혼간지(오사카 혼간지)입니다.
이렇게 연꽃이 주직이 되었을 무렵에는 야마시나 본원사를 중심으로 전국에 문도를 획득해 비약합니다.
그런데 연꽃이 죽어 현여의 아버지 10세 증여가 주직이 된 향록 5년(1532), 혼간지는 무로마치 막부 관령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 소동에 말려들어 야마시나 혼간지를 잃었습니다. 증여는 거점을 이시야마 혼간지로 옮깁니다(천문법화의 난). 여기에서 혼간지는 섭진국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를 거점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이 태어납니다.
눈에 띄는 탄생
현여는 천문 12년(1543)에 혼간지 제10세 증여의 아이로서 태어납니다.
천문 23년(1554) 현여가 10세의 무렵, 아버지의 증여가 중증이 되어 급거득도(승이 되는 의식)가 행해지게 됩니다. 이때, 증여가 구조가의 유자(양자와는 달리 상속권이 없는 후견을 받는 제도)이 되어 있던 선례에 배워 전 관백, 구조 옻통의 유자가 되어 증여를 스승으로 득도했습니다. 득도를 받은 다음날, 아버지의 증여가 죽어 할머니의 진영아(9세실 여실에서 증여의 어머니)의 보좌를 받고 혼간지 주직을 계승했습니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어린 현여를 주직에 운영합니다.
그런데 혼간지 주직이 된 현여. 히로지 3년(1557), 산조 공뢰의 삼녀 여춘수를 방에 맞이합니다. 여춘니는 육각정뢰의 유자를 받은 후, 현여의 밑으로 아내 왔습니다. 또 누나는 다케다 신겐의 계실 산조쪽으로, 현여와 신겐은 의형제의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할 때에 반오다 세력을 만드는 기초가 됩니다.
혼간지의 문적성과 최성기
그런데 연꽃보다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실시해, 전국에 문도를 획득할 수 있던 이시야마 혼간지. 부유한 본원사는 그 재력으로 조정 등에 기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쇼친쵸 천황의 즉위에 있어서, 다액의 기부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에이로쿠 2년(1559), 쇼친쵸 천황은 현여를 문적에 줄 것입니다. 문터는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있던 절의 등급 중 최고위의 절의 스님으로(문적이 된 스님을 문적, 문적이 주직을 맡는 절을 문적 사원),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가면 문적은 후지와라 오섭가와 황족의 출가한 자제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무의 직계 자손이라고 불리는 현여는 후지와라 고섭가와도 황족과도 소연이 없기 때문에 문적이 될 수 없습니다. 거기서 아버지의 증여와 현여가 출가할 때에 쿠조가의 유자가 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오섭가 쿠조가에 이어지는 자로서 문적이 되었습니다. 후에도 먼저 오섭가, 황족 이외에 문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시야마 혼간지 뿐입니다(혼간지의 문터성). 한때는 타종파(천대종청련원)에 속했던 혼간지는 완전히 독립적인 종파가 됩니다. 더욱이 에이로쿠 4년(1561), 현여는 승정에 임명됩니다.
또 관령 호소카와가나 공가와의 인사관계를 진행해 지반을 굳혀 갑니다. 한편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기내에 혼간지에 속하는 사원을 배치하고, 또 아버지의 증여보다 진행하고 있던 문도에 의한 일규의 장악을 맡고 이시야마 혼간지는 명실을 갖추고 다이묘 수준의 힘을 가진다 이제 왔습니다.
노부나가 포위망에의 참전
그런데 이시야마 혼간지가 힘을 갖게 된 같은 무렵, 에이로쿠 11년(1568).
오와리 나라, 미노국(현재의 아이치현 서부, 기후현)을 영위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기 상가를 완수합니다. 가미가쿠를 완수한 오다가는 교토를 넘어 섭진국이나 가와치국(현재의 오사카부)에도 침공했습니다. 침공한 오다가는 각지에서 약탈이나 화살(기부)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이시야마 혼간지나 사카이에 야전을 요구해, 이시야마 혼간지는 5000관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치령의 사카이는 이 화살을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사카이는 오다가의 관리하에 놓여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다가의 압박을 받은 이시야마 혼간지는 오다가에 반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모토가메 원년(1570), 시코쿠에 소색하고 있던 미요시가가 섭진국에 침공, 오다가와 교전 상태에 들어갑니다(노다성 후쿠시마성의 싸움). 이 싸움 중 9월 12일 자정, 이시야마 혼간지는 일대를 일으켜 오다가에 반항하는, 이시야마 합전의 시작입니다. 또 일소를 일으킨 전날, 아사이가 아사쿠라가와 호니시의 강에 의해 조직된 혼간지의 이치소가 비와코의 서쪽을 남진해 교를 목표로 했습니다.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놀라움 섭진국을 철퇴, 이번에는 오미 쿠니 사카모토에서 아사이 아사쿠라, 혼간지의 이치쇼, 히에이잔 연력사와 노려보고 있습니다(시가의 진). 그동안 현여는 각지에 일규를 촉구해 키타 이세의 절들이 봉기했습니다(이세 나가시마의 일향 일소). 이 모토가메 원년의 싸움(노다성 후쿠시마성의 싸움으로부터 시가의 진, 속에 제1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겨울이 온 것으로 마사모치마치 천황의 철지에 의해 정전했습니다. 이 정전 직후, 현여는 의리의 형에 해당하는 다케다 신겐(이 전 거북이 원년의 여름에 산조 쪽은 죽어 있습니다만)과 서한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이시야마 전투
그런데 이시야마 혼간지나 아사이 아사쿠라의 반항에 맞는 궁지에 빠진 오다 노부나가. 노부나가는 강화를 맺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런데 같은 무렵, 옹립하고 있을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오다가의 영향력을 떨어뜨리고 싶은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독자적으로 현여나 아사이 아사쿠라, 카이쿠니 타케다가에 서장을 보내 스스로를 지지하도록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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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