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인(북정소·네네)(2/2)알몸 일관의 천하인을 지지한 아내
고다이인(북정소·네네)
그런데 도요토미가는 무단파와 문지파와의 대립이 표면화합니다. 무단파는 문지파의 필두였던 이시다 미츠나리의 저택을 습격, 미츠나리는 5대로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에야스는 고다이인의 중재를 받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고다이인을 이에야스가 평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이쵸 4년(1599) 9월, 고다이인은 살았던 오사카성을 퇴거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지(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로 섭정관백이라고 불린 인물)가 실각한 후 파각한 류라쿠 제. 그 순락제 뒤에 지어진 교토 신조에서 고다이인은 살기 시작합니다. 타카다이인에는 오쿠나나카 겸 유필의 효장주(가마씨의 가신·가와 부카츠시게의 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이 된 무렵부터 섬기고 있다)가 따랐습니다.
키노시타 가정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게이쵸 5년(1600),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츠나리가 싸운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타카다이인은 교토의 교토 신성에 있었지만, 세키가하라의 합전 직후에는 형의 키노시타 가정이 호위에 달려갈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최종적으로 고다이인은 고양성 천황의 생모, 준후의 권수사 하루코의 저택에 달려들 정도로 싸움 직후는 착綜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동생 고다이인의 위기에 달려온 형의 키노시타 가정. 스기하라 정리의 嫡男로서 태어났습니다만 후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깁니다 반환). 이 키노시타 정가의 5남이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명운을 좌우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였습니다. 히데아키는 고다이인 조카에 해당합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키노시타 정가의 아이로서 태어났습니다만, 코바야카와 타카케이(모리 모토나리 3남)에 입양자로서 들어가 고바야카와가를 이어 드립니다. 히데아키는 소년 시절, 걷어차기나 춤 등의 예술에 재능을 보여, 빈자에게 베풀어 주는 등 뛰어난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 술을 기억하고 친구들과 삼키는 날들을 보냅니다. 한층 더 고대원에 500량의 부채를 하는 등 노예인 생활을 보내게 되어, 고대원을 괴롭혔습니다.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의 싸움 당초,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붙어 있었습니다만 본전 종반, 도쿠가와 이에야스 쪽의 동군에 배신 승패를 결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전후, 도쿠가와 가문에서 영지를 가증했지만 술에 사려 게이쵸 7년(1602)에 21세로 사망했습니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고바야카와가는 단절합니다.
고다이인의 형인 키노시타 정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찍 죽었습니다만, 차남의 이방, 삼남 연준은 다이묘로서 나머지 메이지까지 계속됩니다. 도요토미가 중에서도 몇 안 남은 다이묘가였습니다.
도요토미가의 끝
게이쵸 8년(1603), 고다이인은 양모 7곡전(이모로 아사노 나가카쓰무로)의 죽음과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치희(도쿠가와 히데타다 장녀)의 혼인을 지켜본 것을 한 단락으로 생각해 낙식합니다. 낙식시, 고양성 천황으로부터 원호를 받아 고다이인 쾌양심수(나중에 다시 고다이인 호즈키 신신)라고 했습니다.
게이쵸 10년(1605), 실모(아사히덴, 스기하라 정리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기 위해 교토 히가시야마에 고다이지를 건립합니다. 스스로는 고다이지의 문 앞에 저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되어 갑니다, 오사카의 진입니다. 도쿠가와가는 고다이인을 도요토미가의 오사카성에 들어가게 하지 않도록, 고다이인의 조카(형목시타 정가의 차남) 키노시타 리보를 경비와 감시의 역할로 붙입니다.元和元年(1615) 오사카의 진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만든 도요토미가는 멸망했습니다.
도요토미가의 멸망 후에도 고다이인은 계속 살아 있습니다. 아직 도요토미가와 도쿠가와가가 대립하고 있던 시대,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인질로서 도쿠가와가에서 오사카성의 도요토미가로 옮겨졌습니다. 이때, 히데타다의 돌보기를 고다이인이 실시한 것으로부터 고다이인과 장군인 히데타다와는 특히 관계가 양호했습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에도에서 교토로 상경할 때마다 고다이인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또 공가와의 교류도 활발하고, 교토의 히가시야마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천하를 취한 도요토미가를 남편과 함께 만든 고다이인. 그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지켜본 후의 히로나가 원년(1624) 고다이인 저택에서 사망했습니다, 향년 76. 유해는 고다이지에 안치되어 묘소도 고다이지에 설치되었습니다.
고다이지
고다이지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임제종건인사파의 사원입니다. 절의 이름은 북정소의 낙식시에 조정에서 받은 원호인 고다이인(高台院)을 따서 있습니다. 고다이지가 있는 곳은 원래 운정사가 있었지만 오인의 난으로 소실. 그 터에 고다이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원도 받아 고다이지를 세웠습니다. 타카다이지는 영야(오타마야)의 당내 장식에 모모야마 양식의 도장이 이용되고 또, 고다이인 소장의 도장 조도류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마에의 절」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게이쵸 11년(1606) 조조종의 궁잠선彊을 개산으로 고다이지는 완성됩니다. 관영원년(1624) 7월, 임제종의 건인사에서 미에소익을 중흥개산에 초빙하여 조동종에서 임제종으로 개종했습니다. 이것은 고다이인의 형키시타 가정의 8남주 미나미 쇼우가 미에 쇼익 아래에서 출가하고 있는 것도 이 개종과 관련된다고 합니다.
다카다이지는 막부 말기, 다툼의 무대가 됩니다. 이토 고시타로가 신선조에서 이탈한 후에 고다이지의 탑두·월진원에 들어가 이토 고시타로 일파 “미릉 위사”의 처소로 했습니다. 지금도 고다이지와 '능릉사 처소 흔적'의 비가 있습니다.
또한 고다이지 문 앞의 길은 「네네노 길」로 알려져 지혜의 길, 가미유키도와 함께 마루야마 공원에서 치온원, 야사카 신사로 이어지는 히가시야마 참배길(3개의 길)이라고 합니다. .
다카다이인(북정소·네네)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 작성자하즈키 토모요(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