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소 (2/2)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

대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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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대정소(1516년~1592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오사카성

오사카성

나가하마 성

나가하마 성

대정소의 장녀, 토모는 히데요시와 같은 아버지의 키노시타 야에몬의 아들로서 태어납니다. 오와리 국해동군 을지촌의 농민 야스케에게 며느리, 장남에게 히데지(치베에), 차남에게 히데카츠(코요시), 3남에게 히데호(다쓰치요)를 벌었습니다. 남편의 야스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키노시타 성으로 섬기면 키노시타 야스케로서 히데요시를 섬겼습니다. 토모와 야스케의 장남 히데지는 기내의 명문 미요시에 입양하여 미요시 성을 자칭 미요시 히데지라고 자칭합니다. 또한 만년까지 아이가 할 수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요시 히데지를 자취로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지입니다.

그런데 토모의 아이들은 그다지 좋은 삶을 걷지 않았습니다.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입양자로 맞이해 아사이 나가마사의 딸 오에(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다시 며느리합니다)를 부탁했습니다만 조선 출병으로 전사, 히데호는 하시바 히데나가의 딸랑으로서 히데나가의 흔적을 이어 하지만 병사, 히데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절복을 명령받았습니다.

대정소의 장녀 지치는 도요토미가의 절정과 함께 스스로의 아이들을 잃어 갑니다. 그런데 토모는 더 오래 살 것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스님이 된 부야스케도 사망, 오사카 여름의 진으로 도요토미가가 멸망하고, 히데요시의 츠마키타 정소(고다이인)가 죽은 다음 해, 히로나가 2년(1625)에 죽었습니다. 향년 92. 아마도 대정소의 아이들 중, 장남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도요토미가의 최후까지를 지켜본 것은 대정소의 장녀 토모였습니다.

그런데 야스케와 토모의 혈맥이 계속되었습니다. 차남의 히데카츠와 오에와의 사이에는 딸이 1명 태어난, 도요토미 완자입니다. 완자는 관백이 되는 쿠조 유키야에게 시집고, 쿠조가는 혈맥을 넓혀 현재의 황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정소의 유일한 혈근은 장녀의 지의 자손뿐이었다.

대정소와 그 죽음

그런데 이야기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사히 공주가 며느리, 다이쇼쇼소가 쇼후에 인질로서 보내졌을 때까지 되돌립니다. 다이쇼쿠소는 1개월을 슨푸에서 보내고 오사카로 돌아왔습니다.

텐쇼 15년(1587)에는 교토의 락악제가 완성되었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쇼라쿠제로 옮겼습니다만 잠시 후 대정소만 오사카로 돌아갑니다.

텐쇼 16년 6월경부터 자주 병으로 엎드려 경향이 있었습니다. 텐쇼 18년(1590)에는 아사히 공주가, 다음 텐쇼 19년(1591)에는 하 시바 히데나가가 잇따라 죽어 심로가 겹쳤습니다.
그러나 하시바 히데나가가 죽을 무렵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나라(중국 대륙 원정)을 생각해 규슈의 나고야성으로 옮깁니다. 다이쇼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몸을 안고, 히데요시의 도해를 제지했습니다. 히데요시도 어머니의 제지는 무시할 수 없고, 자신의 원정은 중지했습니다만 문록·게이쵸의 역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텐쇼 20년(1592)에는 대정소의 모습이 악화되어 7월 준락제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77. 어머니 위험의 소식을 듣고 규슈에서 돌아온 히데요시였지만 죽음을 보지 못하고 졸도했다고 합니다. 요시는 8월에 다이토쿠지에서 법요를 하고, 소바에 붙었습니다. 고양성천황은 칙사를 보내 대정소에 준삼후를 추호했습니다.

다이쇼쿠지의 묘소는 다이토쿠지 텐즈지에, 유골은 텐즈지의 수탑에 담겼다고 합니다. 고야산 아오간지, 야마시나 본국사에도 무덤이 있어, 야마시나 본국사에는 최초의 남편인 키노시타야 우에몬이나 조카의 미요시 요시보, 손자의 도요토미 히데호와 합사된 공양탑이 있습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와 소문

교토시 후시미구에 있는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이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정면에 있는 누문(지붕이 있는 큰 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텐쇼 17년(1589)에 세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대정소가 병에 걸렸을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이나리타이샤에, 대정소의 병이 낫으면 1만석을 기진한다고 기원하면 평치해 누문이 세웠다고 말해졌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문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쇼와 48년에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누문의 해체 수리가 행해졌더니, 히데요시의 기원과 같은 이야기인 「텐쇼 17년의 묵서」가 발견되어, 전승의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단지 실제로 기진된 것은 5000석이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하나님께 가격이 삭감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누문은 교토시내의 신사의 누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최대라고 불리며 나라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히노미야 신사와 히데요시의 탄생

천하인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히데요시를 낳은 대정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 장소는 엄밀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와리국 아이치군의 나카무라(현재의 나고야시 나카무라구)까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나고야 경륜장에 인접하는 나카무라 공원의 장소라고도 불려, 나카무라 공원의 동쪽 옆 상천사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나카무라 공원에는 “도요코 탄생지”의 비가, 죠센지 절의 경내에는 히데요시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미테메의 히카리”나 산탕의 우물 등이 있습니다. 엄밀한 장소는 어쨌든 나카무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탄생했습니다.

이 나고야시 나카무라에 히노미야 신사는 있습니다. 히노미야 신사의 원래 이름을 히요시 권현으로 하고, 대정소는 히데요시가 태어나기 전에 히요시 권현에 닛신하고, 남자의 탄생을 바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문 5년(1536년) 설날, 강력한 산성과 함께 탄생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의 유명, 히요시마루는 이 히요시 권현으로부터 붙여졌다고 합니다.
대정소의 소원을 이룬 히노미야 신사, 천하인을 낳은 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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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