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소 (1/2)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

대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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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대정소(1516년~1592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절, 신사
오사카성

오사카성

나가하마 성

나가하마 성

무로마치 시대 후기, 중국의 역사에 비해 전국 시대라고도 불린 시대. 오다가 안에서 소품으로부터 출세해, 천하를 통일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오와리국의 낮은 신분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오다가를 섬기게 됩니다. 이 히데요시를 낳은 것이 대정소(나카)였습니다. 대정소의 아이인 히데요시가 입신한 것으로, 대정소의 다른 아이들과 여동생들이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 대정소를 봅니다.

대정소와 호랑이, 체크 무늬

다이쇼쇼는 에이쇼 13년(1516), 오와리 쿠니 아이치군 고기쇼무라(현재의 나고야시 쇼와구)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은 나카(나카). 일설에는 미노국(현재의 기후현)의 대장장이·관겸정의 딸이라고도 말해지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에게 사카에마쓰인, 대은원, 마쓰운원, 사촌 여동생에게 성림원(이름은 이토 모두)이 있습니다. 후년, 대정소의 아이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인이 됩니다만, 일족랑당이 적은 히데요시는 이 어머니의 여동생들과 사촌 여동생의 혈연을 스스로의 가신으로서 중용했습니다.

다이쇼쇼의 여동생 중 한 명인 에이마츠인은 오다가의 가신이었던 코이데 마사시게와 결혼합니다. 이 에이마츠인과 고데 마사시게 사이에 태어난 것이 코이데 히데마사였습니다. 코이데 히데마사는 일찍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섬기고, 후에 히데요시의 아야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부역의 1명이 됩니다. 나중에 출석번번조가 되어 코이데가는 에도시대 중기까지 출석을 지배합니다.
대은원은 아오키 시게노사와 결혼해, 사이에 태어난 것이 아오키 한사이였습니다. 아오키 카즈히로는 도요토미가 일문중으로서 에치젠 국북의 쇼죠를 지배해 도요토미가를 지지합니다.

마쓰운인은 가게야를 운영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부에 시집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것이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습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세와 함께 봉사했지만, 특히 아이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유명한 ‘오이치, 혹은 시마츠’로 불려 히데요시의 성으로 격려했습니다. 나중에 가게가다케의 싸움에서 일해 「가쓰가다케의 칠본 창」의 1명으로 꼽혔습니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주력으로 용전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정소의 사촌 여동생인 성림원은 검 대장장이인 카토 기요타다에게 며들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것이 가토 기요마사입니다. 그런데 카토 키요타다는 키요마사 3세 때에 사망합니다. 어머니와 키요마사는 우여곡절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의지했습니다. 유명한 「호랑이」로 불려 히데요시의 성이 됩니다. 그리고 「가미가타케의 칠본 창」의 1명에게 이름이 들어갈 만큼 잘 일했습니다. 나중에 히고국(현재의 구마모토현)의 다이묘가 되어, 세키가하라의 싸움 후의 도요토미가 존속에 진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정소의 자매나 종매는 도요토미가의 핵심 집으로서 번성하게 됩니다.

대정소와 장남의 히데요시

대정소는 오다가의 아시가루(혹은 고용병)의 키노시타 야우에몬 아래에 시집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장녀의 히데인(이름은 토모, 혹은 모두)과 장남의 히데요시가 태어났습니다. 또 일설에는, 차남의 하 시바 히데나가, 두녀의 아사히 히메도 키노시타 야 우에몬의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문 12년(1543) 1월 2일에 키노시타 야오에몬이 죽자, 다이쇼쇼는 오다 노부히데(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를 섬기고 있던 차보주의 다케아미와 재혼했습니다.

장남의 히데요시와 계부인 다케아미와는 접이가 나쁘고, 히데요시는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히데요시는 기노시타 후지요시로라고 자칭해, 도카이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이마가와가의 가신 이오씨의 부하로, 도에 국장 카미군 두타지소장(현재의 하마마쓰시 미나미구 두타지마치)의 두타지 성 성주였던 마쓰시타유키 줄타기를 섬깁니다. 히데요시는 이마가와가의 가신의 가신으로서 마츠시타노츠나를 섬기고, 노츠나를 어느 정도 눈을 걸고(후년, 마츠시타노츠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됩니다) 했습니다만 잠시 후 마츠시타가를 그만두고 네.
마츠시타가를 나온 히데요시는 바늘판매 등의 행상이나 미노국의 벌스카당 등 야도에 들어가면서 매일을 보냅니다.

천문 23년(1554) 무렵이 되면 오다 노부나가에게 소자(아시가루보다 아래에서 무가의 집에서 잡무를 담당한다)로서 섬겼습니다. 기요스성의 보청 봉행, 부엌 봉행 등을 솔선해 맡아 큰 성과를 꼽는 등, 점차 오다 가중에서 두각을 나타내 족경에서 무장으로 입신해 갑니다.

히데요시가 오다가에 입신하고 있는 동안, 대정소는 다케아야와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케아미에도 앞서자 나가하마 성주(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에 있던 성)였던 히데요시를 의지했습니다.
다이쇼쿠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족과 보내게 됩니다.

대정소와 차남의 하 시바 히데나가

다이쇼쇼쇼의 장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소품으로부터 입신 출세해, 오다가 중에서도 유수의 무장이 되어 갑니다. 이 히데요시를 지지한 것이 대정소의 차남, 하시바 히데나가(토요토미 히데나가)였습니다.

하시바 히데나가는 천문 9년(1540), 다케아야의 아이(일설에는 히데요시와 같은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 모두)로서 태어납니다. 오다가의 미노 사이토가의 싸움의 무렵에는 형의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어, 성의 유수 거역을 맡는 것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텐쇼 3년(1575) 무렵에는 키노시타 성에서 하 시바 성으로 바뀌고, 하 시바 코이치로를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텐쇼 5년(1577)에는 히데요시에 따라 하리마국(현재의 효고현)의 공략에 종군합니다. 텐쇼 10년(1582)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토벌됩니다. 히데요시는 중국 지방에서 모리가와 싸우고 있었습니다만, 주군의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기 위해 전진. 히데나가도 「중국의 대답」에 따라 야마자키의 싸움에 참전, 텐노야마의 수비에 대해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가의 무장으로부터 독립된 다이묘가 되어, 히데나가는 형을 계속 지지합니다.

텐쇼 13년(1585) 기슈 정벌에 참전, 그대로 기이·이즈미(현재의 와카야마현, 오사카부 남부) 64만석을 영위합니다. 히데나가는 이때, 거성이 되는 와카야마성을 축성했습니다. 게다가 이 해, 총 대장으로서 시코쿠 정토에 가서 나가아베가를 내립니다. 히데나가는 오빠의 히데요시로부터 포상으로서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도 가증되어 100만국을 받았습니다.

요즘 대정소는, 야마토군 산성을 거성으로 하고 있던 히데나가를 자주 방문해, 고야산이나 가스가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더욱 병으로 컨디션 불량이 되면 흥복사의 기도로 회복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형의 히데요시를 정무, 군사로 지지한 하시바 히데나가는 종 2위 대납언에 서임되어 야마토 대납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대정소와 차녀의 아사히 공주

동생의 하 시바 히데나가에게도 지원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인에게 계단을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도상에서 막은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을 다스리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자로서 도카이도에서 신슈에 걸쳐 영지를 넓혔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주 상경해 신하의 예를 취하도록 강요했습니다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응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가 상경해 거기서 토벌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거기서 히데요시는 일계를 방안했습니다, 여동생의 아사히 공주를 이에야스에게 아내가 하고 인사 관계를 쌓아 해의가 없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아사히 공주는 천문 12년(1543) 대정소와 다케아미 사이에 태어났습니다(혹은 아버지는 다케아미가 아니라 히데요시와 같은 기노시타야 우에몬 모두). 오와리의 농민에게 아내, 나중에 남편은 히데요시에 세워져 사지 히나타모리를 자칭했다고 합니다. 히데요시는 이 아사히 공주를 이연시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내가 했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에서도 승낙되어 텐쇼 14년(1586) 4월, 아사히 히메는 오사카성을 나와 쇼라쿠제에 들어가, 거기에서 아사노 나가마사, 도미타 토모노부, 쓰다 시로 사에몬, 타키가와 마스시게 등을 150여 명의 신부 행렬 는 스루후로 향했습니다. 도쿠가와 집에서도 아사히 공주는 환대되어 관을 지어져 스루가 고젠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의리라고는 해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그래도 상경하지 않았습니다. 업을 끓인 히데요시는 같은 해 9월 어머니의 대정소를 아사히 공주님의 편견이라고 하는 것으로 쇼후에 보냅니다, 사실상의 인질입니다.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대정소, 여동생 아사히 공주를 인질로 보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상경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의 신하가 됩니다. 다이쇼쿠소의 하마후 체류는 1개월이라고 합니다만, 이 기간에 경호에 맞고 있던 혼다차는 상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만일의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보복할 수 있도록, 대정소, 아사히 히메의 관의 주위 에 시바를 쌓아 불을 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정소와 장녀의 토모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부하에 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드디어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중추는 대정소의 여동생들과 친족의 아이들, 혹은 히데요시 자신이 본 가신을 중용해 정권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돋보인 것이 대정소의 장녀 토모(모두, 히데니마)의 아이들입니다.

대정소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