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키번한번은 폐번이 되었다
혼다가의 가문 「마루에 서 아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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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키번은 오타키성을 번청으로 가미총국이구군에 존재했던 번입니다.
첫번째 번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폐번이 되어, 그 후 불과 2만석의 번으로서 호소보소와 존속해 갑니다.
그런 오타 키번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혼다가의 통치
오타 키번을 열었던 것은 도쿠가와 시텐노의 1명으로 유명한 혼다 타다카츠입니다. 혼다 타다카츠는 어릴 적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고, 13세에 초진을 장식한 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참전한 전의 대부분에 참전하고 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나 오다 노부나가에게도 타케시 용감을 인정받아 「이에야스에 지나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해진 무장으로서 수많은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아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
혼다 타다카츠는 텐쇼 18년(1590년)에 10만석으로 상총의 나라를 주어져 원래 있던 오다키성을 대개축해 오타키성을 구축했습니다. 혼다 타다카츠 자신은 게이쵸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기 때문에, 새롭게 이세국 쿠와나 번을 주어졌습니다. 혼다 타다카츠는 장남을 동반하여 쿠와나번으로 옮겨, 2대째의 번주에게는 차남의 혼다 타다사카가 취임합니다.
이 무렵, 필리핀 임시 총독이었던 「로드리고 데 비벨로(돈 로드리고)」라고 하는 인물이, 마닐라로부터 아카풀코를 향한 항해 중 태풍에 맞서, 대다희 번 영의 이와와다무라에 표착한다는 사건 발생합니다. 로드리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혼다 충조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그와 면회하고 주군 이에야스에게 관대한 처치를 요구했습니다.
로드리고는 게이쵸 15년(1610년) 윌리엄 아담스(미우라 안침)가 세운 배를 타고 무사히 출국했습니다만, 일본에 체재한 사이의 기록을 기록한 책은 현재도 「일본 견문록」으로서 읽을 수 있습니다.
혼다 충조는 게이쵸 20년(1615년)의 오사카 여름 진에서 전사, 준자가 어렸기 때문에 조카인 혼다 마사아사가 3대째 번주가 됩니다. 혼다 마사아사는 번주가 되어 불과 2년 후인 겐와 3년(1617년)에 하리마 류노번 5만석에 입봉되어 혼다가의 통치는 끝났습니다.
한번 눈의 폐번부터 마츠다이라의 통치까지
혼다 마사아사가 하리마로 이봉된 후, 아베 마사지가 3만석으로 번주가 되지만, 불과 2년 후에 사가미국 오다와라번으로 이봉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대다희번은 폐번이 됩니다.
모토와 9년(1623년), 아오야마 타다토시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감기를 입고 노중을 파면되어, 무사시국 이와츠키번으로부터 감이봉이 되어 2만석으로 오타키번으로 옵니다. 아오야마 타다 슌은 노중까지 맡은 막부의 중신입니다만, 3대째 장군의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자주 말씀을 했기 때문에, 드디어 노중을 파면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도 곧바 시모총국 망토로 이봉되어 버렸기 때문에, 또 오타키번은 폐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한 번은 사가미국 오다와라번에 이봉된 아베 정차의 손자에 해당하는 아베 정령(정능)이 1만석을 분여되어, 오타 키번을 재립번합니다. 이때 번청이었던 대다희성은 황폐해져 버려, “하나의 담도 없는 곳까지 문이나 망치도 없다”고 기록에 남을 정도의 황폐상이었습니다.
막부는, 아베가에게 자주 성의 개수를 명령합니다만, 대개수가 행해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소규모의 회수를 하기 때문에 손 가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덧붙여 아베 마사노는 에도 막부의 노중을 맡을 때까지 출세했습니다. 그 후, 오타 키번의 번주는 아베 마사하루라는 인물로 옮깁니다. 정춘은 아베 정차의 차남, 아베 정중의 아이로 아베 정령의 종형제에 해당합니다. 아베 마사시게는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망에 따라 순사를 한 가신입니다. 드라마 등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아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아베 마사하루는 겐로쿠 15년(1702년)까지 번주를 맡은 후 미카와 카리야 번으로 이봉됩니다.
덧붙여 이 시대에 오타키번은 성 이외 영지가 통째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베가가 사가미국 오다와라번 이외에, 오타키번을 비롯해 몇개의 날아가는 영지를 가지고 있어, 아이나 손자에게 분할 통치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와 손자가 번주가 되면 그때까지 다스렸던 영지를 그대로 대다희번의 영지로 하고 그때까지의 영지를 다른 혈족이 다스렸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도 드문 사례입니다.
그 후, 미카와 카리야 번번주였던 이나가키 시게토미가 오타 키번으로 이봉되어 왔습니다만, 착임 후 불과 21일에 성지가 너무 좁다는 이유로 시모노 카라스야마 번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너무 어리석은 이유입니다만, 그는 5대 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젊은 나이를 10년 정도 근무한 정도가 높은 인물이므로, 용서받은 것이겠지요.
대하우치 마츠다이라의 통치
오타키번은 혼다가가 이봉된 후, 다스리는 집이 점점으로 침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혼다 타다카츠로부터 세어 9대째의 번주, 마츠다이라 마사히사로부터 대하우치 마츠다이라가 막부 말까지 2만석으로 번을 다스립니다. 마츠다이라 마사히사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젊은이를 부적격이라는 이유로 파면된 후, 오타키번에 이봉되고 있습니다.
오카와치 마츠다이라씨는 도쿠가와씨의 가신·오카와치 히데즈나의 차남, 마츠다이라 마사츠나를 조로 하는 집입니다.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시대는 노중도 내놓은 명문의 가문으로, 오키타번의 성주가 되고 나서도, 오사카성 카반이라고 하는, 요직을 대대로 맡았습니다.
그만큼 번정은 어떤 번주도 눈에 띄는 공적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마쓰다이라가에서 7대째의 번주, 마츠다이라 마사요시가, 오타키성 산노마루에 망안당이라는 학문소를 창설한 정도입니다. 이 학문소가 나중에 번교·명선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은 8대째 번주 마츠다이라 마사카즈의 시대, 오키타성이 소실, 홍수에 의한 타바타의 손해 등 고난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대하우치) 정질은, 게이오 4년(1868년)에 발생한 도바·후시미의 싸움에서는 총독으로서 구 막부군을 지휘했습니다만, 패배해 버립니다. 그러나 패배 후에는 신속하게 오키타성을 개성하여 번을 신정부군으로 돌려주었기 때문에 번의 존속이 허용되었습니다.
메이지가 되면, 마츠다이라 정질은 「대하우치」라고 성을 개정해, 귀족원에서 정치가를 맡았습니다.
덧붙여서, 그의 장남이 무명 시대의 다나카 가쿠에이를 돋보이게 한 오카와치 마사토시입니다.
오타 키번 정리
오타 키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가 열린 번이지만, 에도 시대 중반까지 다스리는 집이 안정되지 않았고, 오카와치 마츠다이라가도 막부의 요직을 맡는 번주가 많았기 때문에, 영지로 돌아갈 기회도 적었다고 생각 됩니다.
번주가 무언가를 했다는 일화가 적은 번입니다만, 마지막 번주 대하내 정질은 막부 말기를 무대로 한 드라마 등에 등장하는 일도 있으므로, 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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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AYAME(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