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 번 (1/2)우키타 히데야가 기초를 만들어 이케다씨가 다스린다
이케다가의 가문 「비젠 나비」
- 관련된 성
오카야마 번은 비젠 전체와 비중의 일부를 영유한 외양의 번입니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서군에 대해서, 나중에 하치조지마에 유형이 된 우키타 히데야가 정비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거쳐 히메지성을 현재의 형태로 정돈한, 이케다 테루마사의 차남, 이케다 타다시게를 비롯한 이케다가가 막부 말기까지 다스렸습니다.
그런 오카야마 번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이케다가가 다스릴 때까지의 오카야마 번
오카야마의 땅은 도요토미가의 5대로의 일원이었던 우키타 히데야가 오카야마성을 구축해 성시를 정돈했습니다.
우키타 히데야는 시모카미에 의해 전국 다이묘에 올라간 아버지, 우키타 나오야의 소령을 그대로 계승해, 8년의 세월을 걸쳐서 오카야마성을 대개축해, 오카야마의 성시를 정돈했습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우키타 히데야가 세키가하라의 싸움 후에 하치조지마에 흘려 개역된 후, 세키가하라의 싸움의 도중에 서군으로부터 동군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유명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입봉해, 비젠·미작의 51만석을 배령합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오카야마성을 개축하는 등 일정한 실적을 남기지만, 입봉해 불과 2년 후에 급사해 버렸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슈코가 없기 때문에, 코바야카와가는 여기서 단절합니다.
이케다 가문의 통치
다시 다스릴 집이 없어진 오카야마 번의 성주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은 이케다 테루마사의 차남 이케다 타다시게입니다.
이케다 타다시카의 어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녀, 독희이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성주가 된 당시는 불과 5세이었기 때문에, 이모형의 이케다 토시타카가 성주 대행으로서 오카야마에 들어가, 이케다 타다시카는 아버지가 다스리는 히메지성에 그쳤습니다.
여기에 오카야마 번이 정식으로 성립합니다.
게이쵸 18년(1613년)에는 약 10만석의 가증을 받아 38만석이 되어, 외양 다이묘로서는 톱 클래스의 다이 다이묘가 됩니다.
그러나, 이케다 타다시카는, 전 와 원년(1615년)이 흔적이 없는 채 몰렸기 때문에, 아와지국을 다스리고 있던, 동모제의 이케다 타다오가 2대째 성주가 됩니다.
이케다 타다오는 오카야마성을 이시다카에 어울리는 격식으로 개축하거나 성시를 정비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닛타 개발이나 치수 공사에도 임합니다만, 히로나가 7년(1630년), 눈을 돌리고 있던 고성이 번사의 카와이 마타고로에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격노한 이케다 타다오는, 또 고로의 포박을 명령합니다만 그는, 기모토·안도 마사유에 걸려, 오카야마 번 이케다가와 기모토의 멘츠를 건 싸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케다 타다시카는 이 소동의 한가운데에 몰입합니다만, 독살된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습니다.
덧붙여서, 이 오카야마 번 이케다가와 기모토와의 다툼은, 나중에 죽은 코토메의 형이, 카와이 마타고로를 토벌하고 처벌을 이루는 것으로 결착이 붙었습니다.
이것은, 「열쇠 가게의 츠지의 결투」로서 현재도 전해지고 있어, 아카호 나오사의 처치·소가 형제의 처벌과 나란히, 일본 3대 처치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원토는 소성의 형과 함께 원 토에 참가한 「아라키 마타 우에몬」이 유명해져, 그의 이름을 표제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이케다 타다오에게는, 슈코인 이케다 미츠나카가 있었습니다만, 아직 어린 아이 때문에 오카야마번은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되어, 인하 돗토리번에 이봉됩니다.
대신에, 인바토리 토리번의 번주였던 이케다 미츠마사가 오카야마번의 번주가 됩니다.
이케다 미츠마사는 이케다 타다시카로 바뀌어 오카야마 번의 성주 대행이었던 이케다 토시타카의 장남에게 맞습니다.
이 국가 교체에 의해, 이케다 미츠마사의 계보가 메이지까지 오카야마 번의 번주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케다 미츠마사는 오카야마성의 진수로서 도쇼구(현재의 타마이노미야 도쇼구)를 권진합니다.
이어 양명학자 쿠마자와 소야마를 초빙하여 번에 유학을 전파했습니다. 오카야마 번 첫 번교인 번교 하나하타 교장을 개교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미츠마사는, 그 후 관문 10년(1670년)에는 일본 가장 오래된 서민의 학교로 알려진 한곡 학교까지 만들고, 교육의 충실과 질소 절약을 취지로 한 「비젠풍」이라고 불리는 정치 자세를 확립 했습니다.
이 밖에 오카야마군 다이칸쓰다 에이타다를 등용해 간척 사업을 하고 닛타 개발을 하거나 아사히카와의 방수로인 모모타가와를 건설하는 등 토목 공사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 켄군만으로 이케다 미츠마사는 미토 번주 도쿠가와 미츠코, 아이즈 번주 보과 마사유키와 함께 에도시대 초기의 3명군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관문 12년(1672년) 미츠마사는 번주의 자리를 적남의 츠나마사에게 양도하지만, 천화 원년(1681년)에 사망할 때까지 실권은 계속 붙잡았습니다.
4대째 번주 이케다 츠나마사는 오카야마 고라쿠엔을 조원한 다이묘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쓰다 나가타다, 핫토리 도서 등을 등용하여 재정 재건에 착수하거나 간척 사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홍수 대책으로서 백간강이나 쿠라야스강의 치수 공사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츠나마사의 정책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고, 번주가 되었을 때에는 기울고 있던 재정이 일단은 되돌아갔습니다.
이 밖에, 츠나마사는 힘든 아이들로 알려져 있으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 14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식적인 신고도 없는 서자도 있고, 일설에는 70명 이상의 아이가 있었다고도 말해지고 있습니다.
‘토쿠쇼 사키’ 등에서는 ‘암울’이라고도 적혀 있는데, 이것은 츠나마사가 부광정만큼 유교에 흥미를 가지지 않고 공가풍의 문화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습니다.
츠나마사의 자녀는 그 대부분이 조세해, 70세를 넘어 드디어 12세의 17남 계정(공식적으로는 4남)을 자취로 정할 수 있었습니다.
5대째 번주 이케다 계정은 온후하고 견실한 인품으로, 견고한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그 때문에, 인근의 번에서 일반이 잇따랐을 때라도 오카야마 번만은 일원이 일어나지 않고 평온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계정은 쇼토쿠 3년(1713년)에 센다이 번 5대째 번주 다테 요시무라의 자녀, 무라코와 결혼하지만, 4년 후에 갑자기 이혼해 버립니다.
다이묘의 이혼은 전대 미문이며, 게다가 막부나 다테가에게 일체의 상담 없이 갑자기 이연해 버렸기 때문에, 막부의 사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테가와는 절교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케다가와 다테가가 드디어 화해한 것은 천명 4년(1784년)입니다.
흔적을 이은 6대째 번주 이케다 소나무는 38세의 젊음으로 아버지에 앞서 사망, 7대째 번주의 자리에 앉은 이케다 치마사는 노중·마츠다이라 정신이 실시한 관정의 개혁에 반발 , 호화로운 다이묘 행렬을 지어 참근 교체를 위해 에도에 내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문인으로서 몹시 뛰어난 인물로, 회화나 배우말에 몇개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또, 완전히 녹슬고 있던 한곡 학교도 재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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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AYAME(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