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 번 (1/2)에도시대 최대의 내란 「시마바라의 난」의 무대

시마바라 번

아리마 가문의 가문 「고료에 당화」

기사 카테고리
번사
번명
시마바라 번(1616년~1871년)
소속
나가사키현
관련 성, 절, 신사
시마바라 성

시마바라 성

관련된 성

시마바라 번은 히젠 구니시마바라 주변을 지배한 번입니다. 설립 당초는 히노에 번이라고 불렸습니다. 시마바라성을 번청으로 하고, 2개의 외양 다이묘와 4개의 악보 다이묘가 막부 말까지 납품했습니다.
시마바라번은, 에도시대 최대의 내란이라고 불리는 「시마바라의 난」의 무대가 된 곳입니다.
그런 시마바라 번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전국 시대~에도 시대 초기의 시마바라 번

시마바라 번은 전국 시대부터 「히젠 아리마씨」의 소령이었습니다.
1571년에 가독을 이끈 아리마 하루노부는, 텐쇼 15년(1587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규슈 평정으로 도요토미 쪽에 참가해, 소령을 안도됩니다.
아리마 하루노부는 키리시탄 다이묘이며, 텐쇼 10년(1582년)에 오토모 종린이나 삼촌의 오무라 준타다와 함께 텐쇼 송유럽 소년 사절을 파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아리마 하루노부는 게이쵸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을 주고, 소령을 안도됩니다. 에도막부가 열리면서 히노에번이 되어 초대번주가 됩니다.

이 때 아직 일본은 쇄국하지 않았고, 아리마 하루노부는 적극적으로 주인선 무역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13년(1609년), 하루신의 주인선 승무원이 마카오에서 현지 시민과 싸움이 되어, 승무원이나 가신이 48명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싸움을 진압한 것이 마카오의 카피탄 몰(총사령관)이었던 네덜란드인 앙드레 페소아였습니다.

이 원수를 아리마 하루노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원하고 있는 가운데, 안드레 페소아가 이번에는 일본의 카피탄 몰로서 나가사키에 착임합니다.

아리마 하루노부는 게이쵸 14년 자군을 이끌고 앙드레 페소아가 타는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호를 공격하고 앙드레 페소아를 포착하려고 했지만 그는 승무원을 놓친 후 배마다 자침 버렸습니다.
이 사건 후, 아리마 하루노부에 막부로부터 감시역으로서 오카모토 다이하치라는 인물이 보내집니다.
이 오카모토 오오하치가 아리마 하루노부에게 「이에야스에게 구령의 회복을 곁들여 주기 때문에 보답을 되살려라」라고 다가와, 믿은 하루노부가 대금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이라고 불리는 의옥 사건입니다.
아리마 하루노부와 오카모토 오오하치는 포착되고, 아리마 하루노부는 절복, 그리고 오카모토 오오하치는 참수가 됩니다.

그러나, 아리마가가 소유하고 있던 영지는 안도되고, 하루신으로 바뀌고 嫡男의 아리마 직순이 2대째 번주가 됩니다.
아리마 나오쥰은 15세 때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용할 수 있는 태어난 가신이었지만, 키리시탄이기도 했습니다.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막부가 기독교의 금교하는 자세를 보이면, 아리마 나오준은 게이쵸 15년(1610년),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내 몰타와 이연해, 이에야스의 양녀국희를 정실로 하고 합니다.
게다가 영내에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아버지 아마 하루노부와 그 후 아내인 주스타 사이에 태어난 8세와 6세의 이모동생도 살해했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신내를 살해한 양심의 저책을 견디지 못하고, 아리마 나오쥰은 막부에 전봉을 소원해, 그것이 받아들여져 히나타 노부오카에 이봉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아리마씨의 지배가 끝납니다. 덧붙여 아리마 나오 준은 그 후 시마바라의 난으로 막부군에 참가해, 과거의 영민들과 대결했습니다.

에도시대 최대의 내란 시마바라의 난과 마츠쿠라가

아리마씨가 이봉된 뒤, 시마바라번의 번주가 된 것이 마츠쿠라 시게마사입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단신 동군에 참가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정되었습니다.
부흥된 시마바라성을 구축한 것은 이 마쓰쿠라 시게마사입니다.

시마바라 번의 이시다카는 4만 3천석이었지만, 시마바라성은 5층의 천수각과 40개 이상의 망을 가진 10만석의 다이묘가 세우는 성이었으므로, 시마바라번은 금방 재정난에 빠졌습니다.
또,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에도성 개축의 공의 보청역을 이시다카에 맞지 않는 규모로 계약했기 때문에, 점점 번의 재정은 박박했습니다.

이 재정을 세우려고 하면,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농민에게 생활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의 중세를 부과합니다.
게다가 에도막부의 그리스도탄 탄압 정책에 따라 원화 7년(1621년)이 되면 영내의 그리스도인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완만한 것이었지만, 관영 2년(1625년)에 삼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대책의 단맛을 지적되면 그 탄압은 가혹함을 늘립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잔인한 고문과 처형은 네덜란드 상관장과 포르투갈 선장의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작가, 엔도 주작씨의 대표작의 하나인 「침묵」에서도, 시마바라 번이 실시한 키리시탄 탄압의 가혹함이 그려지고 있네요.

이 영민에 대한 가혹한 지배는, 준남 마츠쿠라 카츠야가 번주가 되고 나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거기에 참을 수 없게 된 시마바라의 영민들이 아리마가의 구가신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 시마바라의 난입니다.
여기에 아마쿠사 시로시 사다가 이끄는 아마쿠사의 반란이 더해져 내란이 되었습니다.

이 반란에 마쓰쿠라가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고, 마침내 막부가 13만명 이상의 군을 향해 진압합니다.
반란군은 아리마씨의 거성에서 폐성이 된 원성에 숨어 저항했지만, 난의 시작으로부터 수개월 후에 진압됩니다.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한 후,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시마바라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을 만들었다고 쓰러져 개역의 상참수가 되었습니다. 절복조차 용서받지 못한 다이묘는 에도시대를 통해서 그 혼자였고, 얼마나 무거운 처분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마쿠사를 납입하고 있던 테라자와 히로타카도 영지를 몰수해, 그 후에 정신에 이상을 초래해 자해합니다. 따라서 테라자와가는 단절되었습니다.

이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막부는 기독교의 금교를 한층 강화해, 한층 더 쇄국으로 향합니다.
또, 시마바라에서 영민이 격감했기 때문에, 규슈의 각 번에 대규모의 농민의 이주를 명령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의 시마바라 번

시마바라의 난으로 황폐해진 시마바라번은 4년 정도 막부의 직할지였지만, 그 후 악보 다이묘의 고력 충방에 맡겨집니다. 고력충방은 3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신뢰가 두터운 다이묘이며, 황폐한 시마바라의 부흥을 맡은 것입니다.

시마바라 번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된 성
AYAME
작성자(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