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다이 번 (1/2)다테가가 계속 다스리다
다테가의 가문 「대나무에 참새」
센다이번은 센다이성에 번청을 두고 현재의 미야기현 전역과 이와테현 남부, 후쿠시마현 신치쵸, 더욱 날아가기로 이바라키현과 시가현에 총 62만석의 영지를 다스린 번입니다. 번이 열리고 나서 막부 말까지 다테 마사무네를 초대하는 다테가가 번주를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센다이 번의 역사를 풀어 봅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경계당하면서도 신뢰받은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
센다이 번이 열린 것은 게이쵸 6년(1601년)입니다. 이 때의 도호쿠 지방은 다테 마사무네와 우에스기 경승이 2대 세력으로서 각각 광대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처치에 의해 아이즈령의 대부분을 잃고 있었던 것에 대해. 우에스기 경승은 도요토미가의 5대로의 혼자로서 권세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테 마사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접근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경승을 정벌하는 대신 히데요시에 몰수된 영지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역사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백만석의 먹이 첨부"입니다.
그러나 야심가인 다테 마사무네는 시라이시성의 싸움에서 우에스기세를 깨고 이에야스에 대한 의리를 완수하는 한편, 이에야스를 지지하고 있던 남부 이리나리의 영지 내에서 와가 타다토모를 지원해 이와사키 카즈히로를 일으킨다. 했습니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는 척을 하면서 도호쿠 지방에서 도쿠가와세를 몰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이 노골적인 야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크게 경계시켜, 결국 백만석의 먹이 첨부는 백지에 돌아갔고,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논공 행상으로서 이에야스가 마사무네에게 준 영지는 가모군이었습니다. 그 결과, 다테번은 62만석 정지가 됩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테 마사무네의 정치적인 수완과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아군한 유력 외양 다이묘 중에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장 긴 에도에 머물러 천하 보청 등을 명하고 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에도에 있으면서, 가신들을 지시해 센다이성을 축성시키고, 스페인과 센다이번의 무역을 개시하려고 경장견 유럽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게이쵸 18년(1613년)에 지쿠라 죠나가 등이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대서양·태평양을 횡단해 로마에 건넜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막부는 금교령을 내고 기독교 선교사들의 탄압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센다이번과 스페인의 무역은 시작되지 않은 채 종료한 것입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평생 은거하지 않고 번주로서 키타가미 강의 하천 개수 등의 치수 사업 등, 성시를 정비하면서 오사카 여름의 진·겨울의 진에도 참가해, 무장으로서 활약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관영 13년(1636년)에 사망하고, 그 흔적은 차남인 다테 타다무네가 이어집니다.
에도 중기까지의 센다이 번
2대째 번주가 된 다테 타다무네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진희(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내로 하고, 번주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센다이의 땅을 밟습니다.
덧붙여 다테 종충에는 형, 다테 히데무네가 있습니다만 어머니가 측실에서 서자였기 때문에, 형은 이요국 우와지마 번의 번주가 되었습니다.
다테 타다무네는 번주가 되자마자 번정의 집행체제를 제치고, 중신들을 이동시키거나 유임시키려고 대담한 인사를 합니다. 또, 새롭게 관직을 마련해, 법을 정비해 센다이번의 정치의 기초를 구축했습니다.
또한 관영 검지라고 불리는 대규모 검지를 실시하여 지행을 재편하고 번이 잉여 쌀을 사들여 에도에서 팔기 '매미제'라는 제도를 만듭니다. 이를 통해 센다이 번은 안정적인 현금 수입 수단을 얻을 수 있었고, 농민들은 잉여 쌀을 팔린 금으로 닛타 개발을 진행할 수있었습니다. 종충은 이밖에 센다이성의 니노마루를 건축, 한층 더 아버지, 다테 마사무네를 모시기 위한 서봉전·서봉사를 비롯한 다수의 사찰 불각도 건축합니다. 덧붙여 총 마무리로서 행한 도쇼구를 권진하자마자 실시한 제례 「센다이 축제」는 현재의 아오바 축제의 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센다이번의 기초를 쌓은 충종이었지만 후계에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의 흔적을 이어받은 것은 6남에 해당하는 다테츠나무네였지만, 3대째의 번주가 된 츠나무네는 술색에 빠져 정치를 생략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백부에 해당하는 「다테 종승」으로부터의 정치적 간섭을 초래해, 가신단의 대립도 심각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번주로서 부적합하다고 여겨져 21세 때에 억지로 정착하게 됩니다. (다테쓰나무네 은거 사건)
덧붙여 다테츠나무네는 그 후에도 번저택에서 70세를 넘을 때까지 서화를 모는 풍류적인 생활을 해 몰았습니다.
다테 츠나무네의 그림은 지금도 센다이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작성자AYAME(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