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 번 (2/2)우에스기 가·아이즈 마츠다이라가 다스린다
마츠다이라가의 가문 「삼개 아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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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이라 요시호는, 만연 원년(1860년)에 사쿠라다 문외의 변이 일어난 후, 막부와 미토번과의 조정역을 맡고, 14대 장군 도쿠가와 가모의 뒤 방패를 받아 무혈로 사태를 수렴시킵니다 . 분쿠 2년(1862년), 마츠다이라 용보가 28세 때 교토 수호직으로 임명됩니다. 이 인사를 용보는 재삼사퇴했다고 합니다만, 막부의 사자가 에도 저택에 닛신하고, 쌍으로 아이즈 마츠다이라가 초대 보과 마사유키가 정한 가훈까지 꺼내, 설득에 맞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마츠다이라 요시호는 신센구미의 전신인 나미조를 맡고, 임생랑사조를 만든 인물로서 소설·만화·드라마 등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타카메이 천황에 몇번이나 면회해, 조정과 막부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도 맡았습니다. 이 밖에 아이즈 번사를 에도에 상경시켜 도쿠가와 가모의 신변 경호 등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송평용보는 “나라를 하나의 정리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신념으로 외교방침을 굳히고 막부와 조정의 의견통일에 부심합니다. 그러나 그 진의는 막부에 전해지지 않았고, 의견은 한결같이 듣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에도에 담고 있던 아이즈 번사의 불만도 높아지고, 마츠다이라 용보는 몇번이나 교토 수호직을 사직하고 싶다고 막부에 소원합니다. 하지만 그 희망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마츠다이라 용보의 분투도 허무하게 원치 원년에 이케다야 사건이 발생해, 조슈 번이 거병합니다. 교토에서 추방되고 있던 조슈 번병이 마쓰다이라 용보의 배제를 목적으로 교토시 안에 무장해 엎드려, 시가전도 발생했습니다. (나가미몬의 전투)
이러한 카즈카스의 어려움에도 어떻게든 견디어 온 마츠다이라 용보였지만, 게이오 2년(1867년)에 친교가 두꺼운 효명 천황이 붕괴하면, 마침내 공무 합체 정책을 포기해, 게이오 3년(1868년에 ) 교토 수호직을 사임, 아이즈로 귀국합니다. 게이오 4년(1868년) 戊辰 전쟁의 시작이 되는 도바·후시미의 싸움이 발발.
마츠다이라 요시호는 막부군으로서 아이즈번사·쿠와나 번사를 출진시킵니다만, 막부군이 패퇴합니다.
이 패배에 의해, 아이즈·쿠와나를 조적으로 하는 칙명이 내렸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도호쿠 제번 34번으로 구성된 오우고시 열번동맹이 결성되어 메이지 정부군과 대결하는 자세가 나타납니다.
메이지 원년(1868년)에 시작된 아이즈 전쟁은, 시라카와구치의 싸움·니혼마츠의 전투와 모두 메이지 정부군이 승리해, 아이즈번은 와카마츠 성하로의 철퇴를 강요받게 됩니다. 그리고 한 달에 걸친 쓰루가사키성의 농성전 이후 드디어 무혈개성을 한 것이었습니다. 덧붙여 아이즈 전쟁에서는 많은 소년병이 희생되고, 그 중에서도 니혼마츠 소년대와 백호대의 비극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아이즈 번사도 다수의 전사자를 치고, 농성전시에 "아시테마토이가 되지 않게"라고 자해한 번사의 아내나 아이는 239명에 오릅니다. 이 아이즈 농성전의 유양은 대하 드라마 「야에노 벚꽃」에서도 그려졌습니다.
덧붙여 아이즈 번사가 철저히 항전의 자세를 보인 것에 대해, 아이즈의 농민들의 반응은 심하게 냉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이즈번이 메이지 정부와 싸우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중세를 부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에게 아이즈번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며, 메이지 정부를 지지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즈번이 메이지 정부군에 항복해, 무혈개성을 한 후, 아이즈번은 일시적으로 정치적인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 때를 노리고, 농민들은 검지장·연공장·분한장의 파기, 선거제의 도입, 전매제의 폐지, 연공의 감면을 요구해 일안을 일으킵니다. (아이즈 세이치시 히로시・야야 일소)
메이지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았고, 농민들은 새롭게 선임된 마을 관리에게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 마츠다이라 용보가 아이즈에서 에도로 보내질 때, 농민들은 호송의 행렬을 봐도 넘어지지 않고, 야라 일을 하고 무관심을 관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마쓰다이라 용보는 무혈 개성 후, 에도에 호송되어 이케다 저택 보관이 됩니다. 그 후, 메이지 2년(1689년)에 친자송 평용대가 탄생, 가명 상속이 허용되어 3만석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송평용대가 번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송평용보가 마지막 번주가 됩니다. 마츠다이라 요시호는 와카야마번이나 아오모리의 두남번 보관 등을 거쳐 도쿄에서 교토를 명할 수 있습니다만 그 생활은 곤궁하고, 사관한 구아이즈번사가 생활을 지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메이지 13년(1880년)에 드디어 닛코 도쇼구 미야지 겸 우에노 도쇼구에 임명되어 급여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26년(1893년)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향년 56세였습니다.
그 후 아이즈 마츠다이라
아이즈 마츠다이라가는, 그 후에도 화족(자작가)로서 집명이 존속해, 마츠다이라 용보의 6남으로 외교관의 마츠다이라 쿄오의 딸, (마츠다이라 요시호의 한손에 해당한다) (지치부 미야비세 쓰코). 그러나 치치부궁은 사망할 때까지 아이에게 축복받지 못했기 때문에 황실에 아이즈 마츠다이라가의 혈통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덧붙여 치치부궁은 쇼와 천황의 남동생에 있어서, 스포츠의 진흥에 걸리기 때문에 「스포츠의 미야님」으로서 국민으로부터 인기를 모았습니다. 현재도 "지치부 미야 잔"등에서 그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치치부 미야비세 츠코도 오랜 세월에 걸쳐 결핵 예방 총재를 맡아 결핵 예방 활동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편, 아이즈 마츠다이라가는 아직 가명이 존속하고 있어, 일본 TV의 프로 데 유서를 맡은 마츠다이라 호쿠 씨는, 제14대째 당주에 해당합니다.
후쿠시마현 아이즈시에서 매년 개최되는 아이즈 축제에서는, 아이즈번 공행렬이 행해지고 있어, 2019년에 아이즈번 주송 평용보역을 맡은 것은, 마츠다이라 호쿠씨의 장남, 마츠다이라 친보씨였습니다.
아이즈 번의 기사를 다시 읽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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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AYAME(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