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와라 번 (1/2)역대 번주의 대부분이 막각으로 활약
오쿠보가의 가문 「나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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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와라는 에도시대 이전에 고호죠씨가 다스린 토지였습니다. 에도시대가 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복심 오쿠보 타다세가 번주로 봉해집니다. 오다와라번도 타번과 같이, 복수의 집이 다스렸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오쿠보씨가 메이지까지 번주를 맡았습니다.여기에서는, 오다와라번의 역사를 끈으로 갑시다.
고호죠씨의 통치
오다와라 번의 역사를 해설하기 전에, 5대 100년에 걸쳐 오다와라를 다스린 후 호죠씨의 통치를 간단히 해설합니다.
고호죠씨는, 이세 신구로 모리시(호조 사쿠모)를 시조로 하는 씨족입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호조씨와는 혈연이 없는 것으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 「후」가 붙여지고 있습니다. 또, 사가미 호조씨, 오다와라 호조씨라고 하는 별명도 있습니다.
고호조씨는 군사뿐만 아니라 내정에도 뛰어났습니다. 오다와라는 당시로서는 가장 세율이 낮은 4공 6민의 세제를 하고 있습니다. 대신 대체 시에는 반드시 대규모 검지를 실시함으로써, 쌀의 잡음의 증감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또, 중세에서는 일반적이었던 국인에 의한 세금의 징수의 위탁을 단계적으로 폐지해, 다이묘가 직접 세금을 세우는 것으로 중간 착취를 없애줍니다. 따라서 세금이 적어도 경제가 박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에도시대에 일반화하는 마을청 제도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 기근시에는 감세를 하고 때로는 대체를 함으로써 빚을 막대기로 하는 덕정령도 내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농민의 이산 등이 거의 없고 후호조씨는 안정된 수입을 장기간에 걸쳐 할 수 있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멸망될 때까지 관동의 패자로서 군림을 계속했습니다.
오쿠보 씨의 통치
오다와라성의 역사에서도 언급했지만, 호조씨가 멸망된 오다와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었고, 그 후 오쿠보 타다세에게 통치가 임명되었습니다. 오쿠보 타다세는 텐쇼 18년(1590년)에 4만 5천석으로 오다와라에 들어갑니다. 그 후, 충세가 분로쿠 3년(1594년)의 몰락하면, 타카코의 오쿠보 충근이 흔적을 이어갑니다. 오오쿠보 다다시는 게이쵸 15년(1610년)에는 노중이 되어,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근원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노중에 취임하고 겨우 1년 후의 게이쵸 16년(1611년)에 준코 오쿠보 충상을 잃으면 의기 소침해, 종종 정무를 결석하게 됩니다. 이것이, 히데타다・이에야스, 그리고 다른 노중들의 불흥을 사, 경장 19년(1614년)에 개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로써 오다와라성은 파각되어 이후 5년간 번주가 없는 '번성'이 됩니다.
아베 정차의 통치
모토와 5년(1619년)이 되면, 카미총국 오타키번의 번주였던 아베 마사지가 5만석으로 새로운 오다와라 번주로서 부임합니다. 그러나, 특히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지 않고 원화 9년(1623년)에 이와츠키번에 전봉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베 마사지는 동년에 오사카 성대에도 명령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을 근무합니다. 아베 마사지가 떠난 후, 오다와라성은 다시 번주 부재가 되었습니다.
이나바가의 통치
히로나가 9년 1(1632년)이 되면, 이나바 마사카츠가 8만 5천석을 가지고 오다와라 번의 번주에게 맡겨집니다. 이나바 마사카츠는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인 카스가국의 친자로 하여 장래를 약속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쿠마사에서의 격무가 응했는지 관영 10년(1633년)경부터 컨디션을 무너뜨리기 시작해, 관영 11년(1634년)에 38세의 젊음으로 병몰합니다. 그 후를 이은 차남 이나바 마사노리는 어렸기 때문에, 사촌 형제에 해당하는 호리타 마사모리 등의 후견을 받고 있습니다. 이나바 정칙은 그 후 노중에까지 출세해, 4대 장군 도쿠가와 가즈나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번주였던 오다와라 번에서는 닛타 개발에 힘을 다했습니다.
정칙의 뒤를 이은 것은 嫡男의 이나바 정왕입니다. 정칙과는 반대로 당시로서는 고령의 44세가 되고 나서의 가독 상속이었습니다. 이나바 마사오키가 가독을 이어받았을 때, 오다와라 번의 이시다카는 10만 8천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나바 마사오키가 오다와라 번주가 된 후 친척인 젊은 기세바 마사무키가 오오보리 호리타 마사토시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나, 마사오키는 연좌로서 사양 처분이 되어 오다와라번에서 에치고 타카다번으로 이봉 되었습니다. 이제 이나바 가의 통치는 끝을 말합니다. 덧붙여서, 이나바 마사오키는, 그 후 에도 유모리 거역을 거쳐 노중에 복귀했습니다. 아카호 나미시가 요시라 저택에 토벌했을 때의 후시말을 실시해, 나니들이 즉시 처분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시 오쿠보 씨의 통치로 돌아온다
이나바 마사오키가 고다카다 번으로 이봉된 후, 오다와라 번주의 자리에 자리잡은 것은 오오쿠보 타다시의 손자에 해당하는 오쿠보 타다아사입니다. 그는 사다유 3년(1686년)에 오다와라 번으로 돌아갔고, 이후 12년에 걸쳐 오다와라 성주를 맡았습니다. 덧붙여 이시고는 수시로 가산되어 최종적으로 11만석을 넘고 있습니다. 오오쿠보 타다아사가 오다와라 성주가 된 후, 이후 10대에 걸쳐 오쿠보 씨가 막부 말까지 오다와라 번주를 계속 맡았습니다.
천재와 재정난
오오쿠보 타다사카의 남남 오쿠보 타다마사가 성주를 이은 후, 호나가 4년(1707년)에 후지산이 대분화를 일으킵니다. (보력의 대분화) 이로써 오다와라 번은 번령인 아시가라가미군과 스루토군이 대타격을 받았습니다. 오오쿠보 타다마사는 번의 부흥에 진력을 다했지만 자신이 노중의 자리에 앉고 에도에서 떠날 수 없었던 것과 분화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기 4년 전에 발생한 겐로쿠 대지진의 흉터 하지만 아직 남아 있던 것이 일부러, 부흥은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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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AYAME(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