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번 (2/2)사나다 노부시게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로 시작
마츠다이라가의 가문 「고산의 오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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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이라 타다아이의 흔적을 이은 것이 장남의 마츠다이라 타다오미입니다. 충순이 번주의 자리에 붙었을 무렵, 우에다번의 재정은 이미 파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충순은, 보력 3년(1753년)에 반지 상납을 행해, 보력 9년(1759년)에 절약령을 내는 등, 번의 재정의 재건에 근무합니다. 그러나, 농민을 직접 지배하고 있던 군봉행이 악정을 했기 때문에, 보력 11년(1761년)에 약 13,000명이 우에다성에 밀어붙인다는 일소가 발생했습니다(우에다 소동).
농민들은 악정을 깔고 있던 군봉행의 파면과 연공의 경감, 농민을 인족으로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는 등을 요구합니다. 송평충순은 일부 비를 인정하고 군봉행을 파면합니다만, 일소의 수모자로 여겨진 농민들은 사죄와 영감을 명하셨고, 일준은 종식했습니다.
번주로서는 명확한 성과를 올릴 수 없었던 마츠다이라 타다오미입니다만, 에도 막부 안에서는 순조롭게 출세를 하고, 메이와 원년(1764년)에 사찰 봉행, 안나가 4년(1775년)에 젊은이 기상석하고 있다 합니다.
천명 3년(1783년), 마츠다이라 타다오미가 죽으면 그 흔적을 이어받은 것이 장남의 마츠다이라 타다시입니다. 충제는, 막명에 의한 보청 도움을 실시해, 사쿠라다 고몬번, 니시노마루 오테몬번 등을 역임했기 때문에, 번의 재정은 한층 더 악화되었습니다. 덧붙여 충제에는 4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만, 장남을 비롯한 남자가 모두 조세해 버렸기 때문에, 가독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충제는 분가의 마츠다이라 타다학을 입양으로 맞이하여 차녀를 정실로 하여 가독을 이어받았습니다. 본인은 78세에 사망합니다.
충제의 흔적을 이은 마츠다이라 타다학은 문화 10년(1813년)에 번교·명륜당을 창설하여 문무를 장려하는 등 문화면의 충실에 노력합니다. 양부와 마찬가지로 자녀에게 축복받지 않고 마츠다이라 타다유를 양자로 합니다. 이 마츠다이라 타다유가, 미일 일본 친친 조약과 미일 통상 우호 조약 때에 노중의 자리에 대해서 있던, 마츠다이라 타다고입니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는, 문정 13년(1830년)에 마츠다이라 타다고에게 번주의 자리를 양도해 은거합니다.
양부의 흔적을 이어 영주의 자리에 앉은 마츠다이라 타다고는 번 안에서 양잠을 장려합니다. 생사산업의 추천이 메이지 시대에 나가노현의 생사산업을 발전시키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마츠다이라 충고는 미즈노 충방 실각과 함께 가나가 원년(1848년), 노중에 발탁됩니다. 첫 번째 노중 취임 중에 우라가에 내항한 미국 동인도 함대 제독 매튜 페리로부터 개국의 요구를 받았습니다. 이때 막부의 내부는 힘든 혼란이 되어 미토번 9대째 번주의 도쿠가와 사이쇼와 마츠다이라 타다고는 정면에서 의견이 대립합니다. 그 결과, 적극적으로 개국을 지시하고 있던 마츠다이라 타다고는 노중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중 필두였던 아베 마사히로가 임명한 노중, 호리다 마사히로에게 거지되어 수년 후의 노중으로 복귀합니다. 충고는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칙허불요론을 주장하고 다른 노중들과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충고는 미·일 수호통상 조약의 체결을 결의합니다만, 조인의 4일 후, 호리다 마사히로와 함께 노중을 파면되어 가게를 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정의 대옥의 시작입니다.
이 시기, 마츠다이라 타다고는 우에다번주로 산물회소를 우에다와 에도에 설치해, 우에다번의 특산품이었던 생실을 에도에 출하하는 체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것에 의해, 우에다번은 요코하마 개항과 동시에 생실의 수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안정 6년(1859년), 충고는 49세에 급사합니다. 병사라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암살설도 뿌리 깊게 주창되고 있습니다.
마츠다이라 타다고의 흔적을 이어받은 것은 3남의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입니다. 충례는 불과 9세 만에 가독을 이어받았으므로 번은 혼란을 극복하고 번내 항쟁이 격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이오 4년(1868년)의 戊辰 전쟁에서는 메이지 신정부 측에 협순하여 아이즈 전쟁 등에 종군했습니다. 메이지 2년, (1869년) 6월, 판적 봉환에 수반해, 충례는 우에다 번 지사가 됩니다. 그러나, 연년 소동이라 불리는 백성 일규가 일어나는 등 번내는 전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메이지 4년(1871년)에 폐번치현이 되어 번지사를 면직되면 망부의 유언에 따라 미국에 유학합니다. 메이지 12년(1879년)에 일본에 귀국해, 메이지 13년(1880년)부터 외무성 어용 걸·외무성 취조국에 근무했습니다만, 메이지 28년(1895년)에 46세로 사망하고 있다 합니다. 이
우에다번에 대한 정리
우에다번은 사나다씨, 센고쿠씨, 마츠다이라씨라는 3개의 집으로 다스려져 메이지를 맞이했습니다. 우에다번은 냉량한 기후에 더해 아사마산의 분화 등 천재에도 휩쓸리고 있기 때문에, 민중의 생활은 엄격하고, 일쏘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부 말기에 마츠다이라 타다고라는 선견지명에 뛰어난 군주에게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사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전전의 우에다시는 일본의 주력 산업이었던 생사를 생산하는 누에 고치의 일대 생산지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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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AYAME(라이터)에도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취미는 사적과 사찰 불각 순회, 그리고 역사 소설의 독서. 궁금한 장소가 있으면 어디에나 날아갑니다. 최근에는 도검난무의 히트 덕분에 도검의 전시회가 늘어난 것을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