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카즈키 잇코 (1/2)노부나가가 2만명을 학살
나가시마 일향 일소
오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비롯한 수많은 일향 종문도들과 싸워 왔습니다. 이 중 일향 일규를 처음으로 철저하게 탄압한 것이, 모토가메 2년(1571년)부터 텐쇼 2년(1574년)에 걸쳐 3회에 걸쳐 이세 나가시마(현 미에현 쿠와나시)에서 일어난 “나가시마 일향 일소 "입니다. 이시야마 혼간지를 중심으로 한 10년에도 걸친 “이시야마 합전에 따라 일어난 이 싸움에서, 노부나가는 일향 종문도 약 2만명을 학살했습니다. 한편, 오다 쪽도 노부나가의 동생·신흥을 비롯해, 노부나가의 친족이나 많은 무장들이 죽음을 이루고 있습니다.이번은 그런 나가시마 일향 일규에 대해서 「노부나가 공기」등을 참고하면서 상세히 정리해 갑니다.
나가시마와 일향종
나가시마 일향 일규가 일어난 나가시마는 오와리국(아이치현 서부)과 이세국(미에현의 북중부·아이치현과 기후현의 일부)의 국경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기소가와와 나가라가와, 가이가와가 합류한 나카슈가 많이 흩어져 있어, 이윽고 해상교통의 요소로서 발전해 갈 것입니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 그 나카스의 하나인 나가시마에 정토 진종 본원사파, 즉 일향종의 간증사가 건립되었습니다. 이후는 많은 일향종문도가 나가시마에 살게 되어, 이윽고 간증사는 오와리국·미노국(기후현 남부·아이치현의 일부)·이세국의 문도를 통괄하는 일향종의 일대 거점까지 성장합니다. 문도의 수는 약 10만까지 부풀어 오르고, 문도들에 의한 종교적인 자치구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 나가시마의 일향 종문도와 오다 노부나가는 원래, 거기까지 적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토지를 둘러싼 싸움이 일부였지만 노부나가는 나가시마의 일향 종문도를 탄압하기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이나바야마성의 싸움에서 노부나가가 사이토 류싱을 깨뜨렸을 때, 류싱은 나가시마로 넘어졌습니다. 그 때 노부나가는 용흥을 추격하고 있습니다만, 나가시마 일향종과의 본격적인 싸움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나가시마 일향일규는 왜 일어났는가?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마의 일향 종문도와 본격적으로 싸웠던 것은, 모토가메 원년(1570년)의 제1차 나가시마 일향 일소가 최초였습니다. 그건 그렇고, 일원이라는 것은 뜻을 똑같이하는 집단의 일치 단결한 행동이다. 나아가 권력자에 대한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저항운동을 가리킵니다.
왜 이 타이밍에 양자가 다투었는가. 그것은 나가시마 일향일규와 「이시야마 합전」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야마 합전은 모토가메 원년(1570년) 9월 12일부터 텐쇼 8년(1570년) 8월 2일까지,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를 비롯한 혼간지 세력이 싸운 싸움으로, 그 계기는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의 토지의 새벽을 요구한 것에 있었습니다.
이시야마 혼간지가 건립된 오사카의 우에마치 대지(오사카부 오사카시)는 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토지였습니다. 강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인 이시야마 혼간지의 땅을 손에 넣으려고 노부나가는 물론입니다. 이시야마 혼간지의 터에 나중에 오사카성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이시야마 혼간지의 입지가 중요시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노부나가의 일방적인 새벽 요구에 이시야마 혼간지의 문주·현여는 노부나가에 대항하는 것을 결의. 「불법의 등불을 지키기 위해, 오다가와 일향종에 적하는 자와 싸워. 순종하지 않는 것은 파문한다」라고 전국의 일향 종문도에게 분문을 날려, 반신장의 자세를 명확하게 내세웠습니다. 이에 나가시마의 간증사도 호응.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파견된 시모마 요시노부에 의해 이끌린 문도들이 봉기합니다. 게다가 키타이세의 소호족의 일부도 일향 일규에 합류한 것으로, 일섭세는 수만 규모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일향일보세는 우선, 북이세의 소호족·이토씨가 다스리는 나가시마성을 탈취해 거점화. 이어 노부나가의 세력 범위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일향종문도의 움직임을 예상한 노부나가는 물론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습니다. 나가시마에 가까운 오와리 쿠니카이니시군(아이치현 아이니시시)의 오기에성에 4번째의 동생 오다 노부오키를 두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요새에 병사를 배치해 나가시마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토가메 원년 11월 16일, 코기에성은 일향 일보세에 공격받습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아사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 연합군과 히에이야마에서 교활한 한가운데(시가의 진)로 몸짓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근처의 쿠와나성(미에현 쿠와나시)에는 타키가와 일익이 있었습니다만, 이쪽도 일규세에 공격받아 있어 움직임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신흥은 자해에 몰려 11월 21일에 코기에성은 낙성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받은 노부나가는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과 화목. 다음해 5월에 나가시마 일향일규의 공략을 개시합니다.
제1차 나가시마 일향일규: 노부나가가 참패
모토가메 2년(1571년) 5월 12일,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공격을 위해 총 5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후성(기후현 기후시)을 출진했습니다. 노부나가는 군을 3개로 나누어 진군. 스스로가 이끄는 본대는 쓰시마(아이치현 쓰시마시)에 착진합니다. 그리고 사쿠마 노부모리가 지휘하는 오와리중 중심의 군은 코기에 방면의 나카스지구(아이치현 아이니시시)로부터, 시바타 카츠야가 이끄는 미노중 중심의 군은 니시카와안의 오타구치(기후현 카이즈시)로부터 나가시마 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의 나가시마 일향 일보세는 고기에성을 비롯한 10개 곳의 요새에 들어가 방어를 굳히고, 오다군을 기다렸습니다. 각 요새는 강으로 막혀 있으며, 오다군은 좀처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결국 노부나가는 주변의 마을들에 방화한 후, 5월 16일의 밤에 퇴각을 결정합니다만, 그 오다군에 습격당한 것이 땅의 이익을 알게 된 일호세였습니다.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이 힘을 쏟고 있던 시바타군. 왼쪽은 산, 오른쪽은 강이라는 좁은 길로 일렬이 되어 퇴각하면서, 활화살과 철포로 습격하는 일규세와 싸웠습니다.
시바타군은 대고전하고, 카츠야는 부상당한 깃발 손가락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이 때문에 씨가전전(직원)이 가쓰야를 대신해 힘차게 맡고 있습니다만, 일탄세의 기세는 강하고, 지휘관의 전전을 비롯해 많은 병사가 죽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나가시마 일향일규는 노부나가의 참패로 끝납니다.
제2차 나가시마 일향일규: 노부나가, 공격할 수 없이 반격에 맞는다
제1차 나가시마 일향 일규 후,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나 이시야마 혼간지, 아사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노부겐 등에 의한 노부나가 포위망과 싸움을 펼칩니다. 그리고 1573년(모토가메 4년) 8월에 오타니성의 싸움으로 아사이씨를, 이치타니성의 싸움으로 아사쿠라씨를 멸망한 후, 9월에 다시 나가시마에 침공했습니다. 이것이 제2차 나가시마 일향일규입니다.
노부나가가 기후성으로 돌아온 것은 9월 6일. 키타이세를 향해 출진한 것은 9월 24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키타이세의 토호들이 나가시마 일향일규에 호응해 반신장의 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나가시마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노부나가는 곧바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당초, 노부나가는 나가시마를 공격하기 위해 오미나토(미에현 이세시)에서 배를 조달해 쿠와나에 모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회, 나가시마 일향 일규세가 쿠와나 방면으로부터 해로에서 인원 물자의 보급을 행하고 있었던 것을 받은 것으로, 수운을 누르고 일반세의 힘을 깎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미나토의 자치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던 회합중이 좀처럼 협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노부나가는 회합중의 협력을 얻지 않고 수만의 군세와 함께 출발합니다.
노부나가는 우선 오타성(기후현 카이즈시)에 착진합니다. 여기에 시바타 카츠야나 사쿠마 노부모리, 하시바 히데요시(나라노 도요토미 히데요시)·단바나가 히데·벌집 요시타카 등이 합류해, 나가시마의 서쪽에 있는 일향 일쏘사이드의 성을 공격합니다. 오다군은 9월 26일에는 니시베츠소성(미에현 쿠와나시)을, 10월 6일에는 사카이성(미에현 쿠와나시)을 낙성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 후, 노부나가는 10월 8일에 동쪽 별소로 본진을 이동시킵니다만, 이 때 萱生城, 이사카성, 아카호리성, 쿠와베 남성 등 쿠와나군이나 미에군의 국인중들이 참진해 잇따라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시라야마성(미에현 쿠와나시)의 나카지마 장감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쿠마 시게모리·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출병해 공략하고 있습니다.
주변 지역을 누른 후는 드디어 나가시마 공략! 로 진행해야했지만, 중요한 오미나토의 배가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공격을 포기하고 나가시마에 서쪽에 위치한 야다성(미에현 쿠와나시)에 타키가와 일익을 배치해 귀로에 붙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가면 이 싸움은 끝이었습니다만, 일향일보세는 이 귀로에서 오다군을 추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제1차 나가시마 일향 일규로 시바타 카츠야가 대고전한 것 같은, 산이나 강에 둘러싸인 가는 길. 일소세는 활과 철포를 사용한 기습으로 오다군을 괴롭힙니다. 이때 일호세에는 무려 이가나 고가의 철포의 명수도 더해지고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꽤의 강적이군요. 그 후, 맹렬한 풍우의 영향으로 백병전으로 옮겨졌습니다만, 쌍방이 흐트러진 격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힘을 쏟고 있던 임통정이 죽어 버립니다. 노부나가는 일탄세를 어떻게든 뿌리치고, 10월 26일에 기후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나가시마 일향일규는 노부나가가 나가시마를 공격하지 못하고 종료했습니다. 이번 패인은 오미나토에서의 배의 조달에 실패한 것. 실은 오오미나토의 회합중은 일향 일규세와 통하고 있어, 잇쇼 쪽의 무장·히네노 히로사키의 요청에 따라 나가시마의 여자나 아이등을 옮기기 위해 배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대격노. 「적에게 준 선주들을 반드시 성패하라!」라고 명령하고 일향 일섭세에 통하고 있던 후쿠시마 부모와 자식을 처형합니다. 후쿠시마 부모와 자식을 보여주기 위해, 일향 일보세에 협력하는 선주들을 강하게 견제한 것입니다.
제3차 나가시마 일향일규 ①총력전, 개시
그리고 다음 텐쇼 2년(1574년) 7월, 오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마 일향일반에 대해 총력전을 맡습니다. 무엇이 무엇이든 나가시마 일향 일규를 멸망시키려고, 6월 23일에는 오다 영 전역에 「대동원령」을 발포. 병사를 모은 결과 총수 약 8만이라는 대군이 모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육군을 3개로 나누었고, 바다에서는 구귀가 다카시 등의 수군으로 나가시마를 공격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각 군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작성자쿠리모토 나오코(라이터)전 여행 업계 잡지의 기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세계사 불문하고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 평상시부터 사찰 불각, 특히 신사 순회를 즐기고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을 테마로 한 「성지 순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은 이시다 미츠나리, 좋아하는 성은 구마모토성, 좋아하는 성터는 하기성. 전쟁 성터와 성터의 이시가키를 보면 마음이 설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