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가타케 전투 (1/2)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바타 카츠야를 내려 천하취에!
가미가타케 전투
텐쇼 11년(1583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야가 오미국 이카군(시가현 나가하마시)의 가미가타케 부근에서 격돌했습니다. 이것이 '시가가다케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전투입니다. 히데요시와 카츠야의 마지막 싸움이며, 히데요시의 천하 잡기의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게가다케의 싸움입니다만, 「미노 대답」 「마에다 토시야의 철수」 「이치의 자해」라고 신경이 쓰이는 키워드도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가게가다케의 싸움에 대해 해설해 갑니다.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가 세력을 확대
가미가타케의 전투의 원인은, 텐쇼 10년(1582년) 6월 27일에 개최된 기요스 회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6월 2일의 혼노지의 이상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토벌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야마자키의 싸움으로 미츠히데를 쓰러뜨린 것으로 쟁란은 일단락했습니다. 그러나 오다가의 흔적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오다가 필두가로의 시바타 카츠야가 후계자의 결정과 영지의 재분배를 위해 청주성에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것이 기요스 회의입니다.
이 때 모인 것은 카츠야, 히데요시와 단바나가 히데, 이케다 항흥의 4명. 이때 카츠야는 노부나가의 3남의 오다 노부타카를,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였던 노부타다의 타카코로 당시 불과 2세의 삼법사(오다 히데노부)를 추거했습니다만, 노부나가의 적 토벌을 완수한 히데요시의 의견 하지만 강하고, 삼법사가 후계자로 정해졌다고 하는 것이 통설입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삼법사가 있는 청주성에서 회의가 개최된 것 등으로부터, 「삼법사=후계자」노선은 결정하고 있어, 삼법사의 서포트 체제의 토론이 메인이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합니다 . 그 후, 삼법사는 미노국(기후현)을 얻은 신효와 함께 기후성에 들어가, 안토성이 재건한 후 안토성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영지의 재배분에 대해서는, 히데요시가 가와치국(오사카부), 야마시로국(교토부 남부), 단바국(교토부 중부·효고현 북부)의 3국을 얻어 28만국의 가증. 카츠야는 에치젠국(후쿠이현) 안도 후, 히데요시의 영지였던 나가하마성과 기타오미 3군(시가현)을 얻어 12만석의 가증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히데요시가 단번에 힘을 가해, 카츠야와의 힘 관계가 역전하게 됩니다.
히데요시가 여기까지 성과를 얻은 것은 역시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했기 때문. 카츠야는 당시 우에스기 공격을 위해 에치중국(도야마현)의 우오즈성을 포위하고 있어 미츠히데를 싸우고 싶어도 우에스기 측의 저항에 그 자리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또, 이 때의 회의의 승인에 의해, 카츠야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도시와 결혼하고 있습니다. 이 결혼, 실은 히데요시가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주군의 여동생의 아내를 중신의 승가로 하는 것으로, 「오다가를 탈취할 생각은 없어」라고 어필하는 것과 동시에, 승가의 불만을 잡으려고 한 것은 말해지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도시라고하면 전국 제일의 미녀. 카츠야나 히데요시가 시를 둘러싸고 적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소설이나 만화로 나옵니다. 그런 연애 배틀이 정말로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히데요시로서는 동경의 미녀를 적에게 건네준 것이기 때문에, 조용히 분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히데요시와 카츠야의 조약전
기요스 회의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야는 오다가의 2대 거두로서 세력 다툼을 계속합니다. 카츠야는 오다 노부타카나 기요스 회의에 시간에 맞지 않은 것으로 실각한 오다가의 중신·타키가와 일익을 아군에 붙여, 나가소가부 전 부모나 잡가중 등을 받아들입니다.
히데요시는 단바나가 히데와 이케다 항흥, 우에스기 경승과 이나바 카즈테츠 등을 아군으로 했습니다. 게다가 야마자키의 싸움의 터인 텐노야마에 야마자키성을 축성해, 「노부나가의 적을 토한 것은 자신」과 어필하면서, 오다가 산하의 무장들과 개인적으로 동맹을 맺습니다.
히데요시의 움직임에 대해, 카츠야는 무장들과 사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을 비판하는 서장을 보냅니다. 한편의 히데요시는, 기요스 회의에서 결정한 「안토성을 재건해, 삼법사를 안토성으로 옮긴다」라고 하는 약속을 완수하지 않고, 신효가 삼법사를 둘러싸고 있다고 비난하는 서장을 보냅니다. 안토성의 재건이 몇 개월로 끝날 리가 없기 때문에, 이쪽은 말투가군요.
게다가 10월 15일부터 17일, 히데요시는 스스로의 양자로 노부나가의 4남의 히데카츠를 상주로, 교토의 대덕사에서 노부나가의 장례를 대대적으로 실시해, 스스로가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것을 성대하게 어필했습니다. 이때 카츠야는 에치고국(니가타현)의 키타노쇼죠에 있었지만, 눈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일이나, 히데요시측의 무장에 의한 암살의 위험 등으로부터 장례에는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카츠야는 11월에 히데요시에 화목을 일한다. 호쿠리쿠의 에치고국은 눈이 깊어지면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시간 벌기. 사자로서 마에다 토시야와 가나모리 나가키네, 불파 직광을 파견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화목 협상은 시간 벌기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고, 반대로 사자들에게 아군이 되도록 조략을 걸고 있습니다(단 실패).
겨울이 기회! 히데요시, 대군에서 나가하마·기후성 공격
12월, 히데요시는 「카츠야가 눈으로 움직임을 잡을 수 없는 지금이 찬스!」라고 화목을 무시하고 오미에 출병. 「신승이 독점하고 있는 삼방사를 개방한다」라고 하는 대의명분 아래,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하마성과 기후성을 공격했습니다.
나가하마성에는 카츠야의 양자인 시바타 카츠요시가 성주로 꾸려져 있었지만, 실은 카츠야와 카츠요시는 불중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족간의 불화를 히데요시는 교묘에 대해, 오타니 요시카즈에게 조략을 명합니다. 그 결과, 카츠 토요는 나가하마 성마다 히데요시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눈 때문에 가쓰야로부터의 원군이 바라지 않고 고립되어 있던 기후성의 신효도 히데요시에 항복. 신효는 삼법사를 히데요시에게 인도하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와 딸을 인질로 받아 버렸습니다.
카츠야, 타키가와 카즈시와 되감기
텐쇼 11년(1583년) 1월, 이번에는 시바타 카츠야 측이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세의 타키가와 일익이 거병해, 가메야마성이나 고쿠분성을 비롯한 히데요시측의 성을 탈취. 일익 자신은 이세쿠니 쿠와나군의 나가시마성에 농성하여 히데요시를 맞아 쏘는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여러 세력에 대한 조약을 위해 교토에 병사를 끌고 있었습니다만, 2월에는 7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세에 침공합니다. 가메야마성이나 고쿠부성은 되찾았지만, 일익이 있는 나가시마성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익을 돕기 위해 마침내 카츠야가 움직입니다. 눈이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2월 말에 오미를 향해 출진하는 것입니다. 가미가타케의 싸움의 시작입니다.
'가쓰가다케의 싸움' ①카츠가군이 선제공격, 요새를 떨어뜨린다
3월 12일, 시바타 카츠야는 3만의 군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야, 사쿠마 모리마사 등과 함께 오미국의 야나기가세에 포진합니다. 대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만강의 군을 나가시마성 대책으로서 이세에 남겨, 약 5만의 병을 이끌고 기노모토에 포진했습니다. 잠시 동안 양군 모두 요새를 만들어 자군의 방어 라인을 구축하고 적을 정찰하면서 전투에 대비했습니다. 히데요시측의 탄바나가 히데도 쓰루가(후쿠이현)와 카이즈(기후현)에 출병해 카츠야 측을 견제했기 때문에, 전은 교착 상태가 됩니다.
- 작성자쿠리모토 나오코(라이터)전 여행 업계 잡지의 기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세계사 불문하고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 평상시부터 사찰 불각, 특히 신사 순회를 즐기고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을 테마로 한 「성지 순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은 이시다 미츠나리, 좋아하는 성은 구마모토성, 좋아하는 성터는 하기성. 전쟁 성터와 성터의 이시가키를 보면 마음이 설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