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키 · 나가쿠테 전투 (1/2)도요토미 히데요시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 기사 카테고리
- 사건부
- 사건명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1584년)
- 위치
- 아이치현
- 관련 성, 절, 신사
고마키야마성
이누야마 성
국보 천수마츠모토성
국보 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대결한 유일한 전투라고 하면, 텐쇼 12년(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의 전투」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토벌한 텐쇼 10년(1582년)의 「혼노지의 이상」으로부터 약 2년.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히데요시가 유리하다고 생각했고, 이에야스도 꾸준히 세력을 늘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2명이 싸운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에 대해서, 합전에 이른 배경에서도 겨우 결과가 된 결말까지 봅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이란?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자꾸 설명하면, 텐쇼 12년(1584년) 3월부터 11월까지, 약 9개월에 걸쳐 일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오의 전투입니다. 오와리(아이치현) 북부를 중심으로 미노(기후현)나 이세(미에현) 등 각지에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호쿠리쿠, 시코쿠, 간토 등에서도 코 마키 나가 쿠테 전투에 연동 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전반이 코마키에서의 양진영의 싸움 중심의 소경쟁으로, 후반이 대격전이 된 「나가쿠테의 싸움」입니다.
코마키 · 나가쿠테 전투 배경
그럼,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이 일어난 배경을 봐 갑시다. 텐쇼 10년(1582년) 6월, 아케치 미츠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이상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미츠히데를 토벌한 것은, 당시 모리가와 싸우고 있던 히데요시였습니다. 모리가와 화의를 맺고, 중국에서 서둘러 잠자리 돌아와, 이른바 「중국 대답」을 하고 미츠히데를 「야마자키의 싸움」으로 내립니다.
그 후, 오다가의 후계자나 영지의 재분배를 결정하기 위해서 개최된 것이, 청주성(아이치현 기요스시)에서의 「기요스 회의」입니다. 시바타 카츠야, 단바 나가히데, 하 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항흥의 4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카츠야가 추구하는 오다가 3남의 오다 노부카츠가 아니라, 히데요시가 추구하는 노부나가의 손자의 삼법사(오다 히데노부)가 후계자 로 결정했습니다. 한층 더 영지의 재분배가 행해져, 히데요시가 지금까지 노부나가의 가신 필두였던 카츠야를 웃도는 넓이의 영지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히데요시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카츠야와의 권력 싸움이 격화해 갑니다. 그리고 일어난 것이 텐쇼 11년(1583년) 4월의 「간케다케의 싸움」입니다. 이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카츠야를 깨고 천하 통일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히데요시가 카츠야와 싸우는 동안, 이에야스는 무엇을 했는가? 이에야스는 혼노지의 변 직후, 노부나가의 죽음에 의해 공백지대가 된 구 다케다 가영지의 카이(야마나시현)와 시나노(나가노현), 나아가 우에노(군마현)를 호조씨 마사·씨 나오나 우에스기 경승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속에 말하는 「텐쇼 임오의 난」으로, 텐쇼 10년 6월부터 10월까지 계속, 우선은 호조가가 경승과 화목. 그 후 이에야스가 호조가와 화목해 종결했습니다.
텐쇼 임오의 난의 결과, 이에야스는 카이와 시나노를 얻은 것 외에 구 다케다 가신단도 얻게 됩니다. 또한 호조씨와 화목할 때, 중개역이 된 오다 노부오와의 관계도 깊어졌습니다. 이 오다 노부오가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의 계기는 “오다 노부오”
오다 노부오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기요스 회의에서의 후계자 다툼에 패했지만, 오와리와 이가(미에현), 미나미 이세의 약 100만석을 상속. 가게가타케의 싸움에서는 히데요시 측에 붙은 것을 계기로 키타 이세 등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3세의 삼법사의 후견역으로서 아즈토성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곧바로 노부오를 안토성에서 쫓아버립니다. 삼법사를 잘 조종하고 싶은 히데요시에게, 노부오는 방해였던 것일까요… 이로써 히데요시와 노부오의 관계는 악화.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보고 「히데요시에 오다가를 탈취되는 것은?」라고 위기감을 기억한 노부오는, 히데요시의 라이벌인 이에야스를 의지하게 됩니다.
한편의 히데요시는, 쓰가와 요시유키와 오카다 시게타카, 아사이 장시의 오다가 미야오를 통해 어떻게든 노부오를 회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텐쇼 12년(1584년) 3월, 노부오는 히데요시에 내통했다고 삼가로를 살해. 이에야스와 함께 히데요시에게 선전 포고합니다. 노부오의 행동에 화난 히데요시는, 타도 노부오를 걸려 출병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의 시작입니다.
이에야스에게, 노부오는 주인 노부나가의 차남이기 때문에 주가 근육에 해당합니다. 노부오로부터 「히데요시를 토벌하라」라는 대의를 얻었기 때문에, 이에야스로서는 정당히 당당히 라이벌의 히데요시를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를 몰아내고 세력을 확대하는 큰 기회였습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전투 ①양군의 세력도
드디어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입니다만, 그 전에 전제가 되는 양군의 무장을 억제해 둡시다.
- 【히데요시군】 10만명(※더 적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지・히데나가(※당시는 하 시바 성이지만, 본고에서는 「토요토미」로 통일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
이케다 항흥
카토 키요마사
가모 씨향
구로다 칸베에
탄바씨 시게
하스카 마사카츠
호소카와 충흥
호리 히데마사
모리나가 가능
야마우치 이치토요 등
유명한 무장들이 즐비하게 나란히 있네요. 이 밖에 호쿠리쿠에서는 마에다 토시야와 우에스기 경승, 관동에서는 사타케 요시시게, 중국에서는 모리 테루모토 등이 히데요시와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한편 이에야스군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에야스군】2만~3만명
-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오
사카이 타다시
사카키하라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
등
이에야스의 부하가 중심이 되어, 히데요시군보다 소규모입니다. 이 때문에 압도적으로 히데요시군이 유리하게 보입니다만, 이에야스는 이때, 관동의 호조씨 마사, 기이 북부의 잡가중이나 근래중, 시코쿠의 장종가부 전친, 호쿠리쿠 방면에서는 에치중(도야마현) 의 사사 나리마사들과 「히데요시 포위망」을 형성. 각지에서 동시에 전쟁을 일으켜 히데요시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② 코마키에서의 전투
그럼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봅시다. 텐쇼 12년 3월 13일, 이에야스는 노부오와 합류하기 위해 약 1만 5000병과 함께 청주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오다가의 가신으로 노부오를 따르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던 이케다 항흥이 히데요시측에 대해서, 오와리와 미노의 국경에 있는 이누야마성을 점거해 버립니다.
- 작성자쿠리모토 나오코(라이터)전 여행 업계 잡지의 기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세계사 불문하고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 평상시부터 사찰 불각, 특히 신사 순회를 즐기고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을 테마로 한 「성지 순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은 이시다 미츠나리, 좋아하는 성은 구마모토성, 좋아하는 성터는 하기성. 전쟁 성터와 성터의 이시가키를 보면 마음이 설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