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성은 오이타현 다케다시 오아자 다케다시에 있던 산성입니다. 텐진산의 산정에 만들어져, 「와규성(가규우죠)」, 「분고 타케다성(부분고타케타조)」라고 하는 별명을 가지고, 난공 불락의 견성이라고 불렸습니다. 또, 작곡가의 타키야 타로씨가 성터에서 명곡 「아라기의 달」의 착상을 얻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수많은 일화가 남는 오카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오카성은, 문치 원년(1185년)에 히라시게 모리의 가신이었던 오가타 유우요시가 겐요리 아침에 쫓겨난 겐 요시츠네를 맞이하기 위해서 축성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겐 요시츠네는 헤이케 멸망 후 형인 겐토요 아침과 대립하고, 한번은 규슈로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라시에 의해 쏟아져, 이번은 오슈 후지와라씨를 의지해 도호쿠로 향했습니다. 만약 오카성에 겐요시게가 입성했다면 겐지케이가 규슈를 평정한 미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이 팽창합니다만, 현재는 조사에 의해 오쿠성은 14세기 무렵이 축성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있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으로 이름을 든 토사쓰 합전
오카성의 이름이 일약 유명해진 것은 텐쇼 14년(1586년)에 일어난 시마즈씨와의 싸움입니다. 현재는 「토요사쓰 합전(텐쇼의 역, 텐쇼의 전)」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싸움은, 분고국의 오토모씨와 사츠마국・오스미국・히나타국을 평정해, 규슈 통일을 목표로 하는 시마즈씨의 사이에서 행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평정을 실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성주는 약간 20세의 시가 친지였지만, 그는 불과 1500의 병사를 이끌고 오카성에 세워 37000의 시마즈군을 물리쳤습니다. 또한, 후일 발발한 오니가성의 결전에서는, 수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상대에게 500의 병사로 승리하고 있습니다. 이 전투가 평가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이타현 히타시에 소령 1000석을 주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덧붙여서, 시가 친차는 돈-파울로의 세례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며, 후년, 주군인 오토모 종린의 적남, 오토모 요시츠네에 희미해지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덧붙여 이 당시, 아직 오카성은 현재도 남아 있는 이시가키는 쌓여 있지 않고, 수호의 요점은 토루나 공보리등이었습니다.
전국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의 오카성
현재도 남아있는 오카성의 이시가키가 세워진 것은 분로쿠 3년(1594)입니다. 전년의 문록 2년(1593년), 문록의 역으로 오토모 요시츠네가 히데요시로부터 봉산 철퇴를 비난받아 소령을 몰수된 것을 계기로, 그의 가신이었던 시가 친차도 오카성을 떠난다 됩니다. 덧붙여서, 시가 친지는 성에서 나온 후에 벌스가 가정, 후쿠시마 마사노리, 모리 테루모토를 섬기고, 세키가하라의 싸움에도 참가해 95세의 장수를 완수했습니다. 시가 친지가 성을 나온 후 대신 성주가 된 것은 나카가와 히데나리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고 야마자키 전투와 가츠가다케 전투에서 활약한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차남에 해당합니다. 덧붙여 나카가와 키요히데는 섭진국의 기리시탄 다이묘, 다카야마 우근의 종형제에 해당하는 인물로, 나카가와 히데나리 자신도 기리시탄이었습니다. 나카가와 히데나리는 3년의 월일을 걸쳐 오카성을 대개수합니다. 오카성의 건물은 메이지 유신 후에 붕괴되어 현재는 이시가키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소산의 용결 응회암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시가키는, 야면 적재·타입 접기·절입 접기 등 다양한 기법이 이용되고, 마치 이시가키의 박람회와 같은 훌륭한 구조입니다. 또, 돌의 쌓는 방법도 난적·포적·골짜기·산목 적재 등이 이용되어, 보기의 가치 있습니다. 이 밖에, 대도로에는 다른 성에는 볼 수 없는 「가마보코돌」등이 있어, 나카가와 히데나리의 미의식이나 나미나미라면 엄선을 느끼게 합니다. 이 밖에, 조바리 설계에 이시다 츠루 우에몬, 미야케 로쿠로 효에, 이시가키 보청에 야마기시 긴우에몬 등이 종사해, 시가씨가 지은 성역의 서쪽 텐진산에 혼마루·니노마루·산노마루 고텐·타케를 조영해, 성 의 서쪽을 확장, 중신 저택군을 마련했습니다. 나카가와씨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 속했기 때문에 소령이 안도되어 에도 막부가 열린 후에도 오카성의 성주를 맡습니다. 에도시대 초기에는 시미즈몬의 정비, 니시노마루의 축성 등이 행해졌고, 오카성은 전쟁을 위한 성에서 「번청」으로서의 성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오카성은, 암반의 대지 위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태풍이나 지진, 화재 등의 피해를 받기 쉽고, 특히, 메이와 8년(1771년)에는 혼마루, 니시노마루, 미묘 등 성의 대부분을 굽는 큰 화재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메이지 후의 오카성
메이지 시대가 되면, 폐성령에 의해 오카성은 이시가키를 남기고 모든 건물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쇼와 11년(1936년)에는 「오카성지」로서 나라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덧붙여서, 오카 성지에는 작곡가의 타키 히로 타로 씨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에서 보낸 것에서 유래합니다. 타키렌 타로씨의 대표곡의 하나 「아라기의 달」은 오카성을 비롯해 복수의 성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현재의 오카성지는, 「오카성공원」으로서 일본 사쿠라 명소 100선, 일본의 백명월, 일본의 성백선이라는 3개의 명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봄은 벚꽃, 가을은 단풍과 달을 사랑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습니다.
요약
오카성은 규슈 통일에 관련된 중요한 전투의 무대가 되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깨는 드라마틱한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현재의 오카성은 벚꽃이나 단풍, 달의 명소로서 관광 명소가 되고 있는 동시에, 다양한 기교를 거친 이시가키가 남는 사적이기도 합니다. 다리가 불편한 분을 위해 오카성 요금소에서 성내의 히가시나카 구간까지는 「등성 버스」도 운행중입니다.
오카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규슈평정히데요시가 시마즈를 내려 규슈를 지배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대의 라이벌·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텐쇼 12년(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계기로 신종시키고, 텐쇼 13년(1585년)에 나가소카베 모친을 내려 시코쿠를 평정한 히데요시가
오카번은, 현재의 오이타현 다케다시 대자 다케다시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번입니다. 분고 국내에서는 이시다카가 최대의 번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였던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차남, 나카가와 히데나리가 초대 번주가 되어, 메이지 유신까지 한 번도 국가 교체가 없었던 드문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