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도성은 나가사키현 히라도시에 있던 히라야마성입니다. 히라도는 옛부터 국외 무역의 창구이며, 에도 시대 초기까지는 네덜란드나 영국 등 유럽의 상관도 존재했습니다. 히라도성은 한 번 파각된 후 재건되었다는 이색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히라도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히라도는 옛날에는 헤이안 시대보다 중국과의 무역항의 [검선 아야메 1] 하나로 발전해 왔습니다. 고대~중세까지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라고 하면 하카타가 유명합니다만, 히라도도 중국에 가는 배가 정박하는 기항지로서 활기찼습니다. 천문 19년(1550년), 네덜란드 상선이 히라도에 처음으로 내항합니다. 선원에게 미사를 실시하기 위해 전년에 가고시마현에 상륙한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도 히라도에 맡겨, 이후 히라도는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 히라도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도 상선이 와서 차례로 상관을 건축해 갑니다. 안도 복숭아 [검선 아야메 2] 산 시대 후기부터 에도 막부가 열리고 쇄국이 시작될 때까지, 히라도는 남만 무역과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덧붙여 현재도 전해지는 숨어 그리스도인의 기도 「오라쇼」도 히라도가 발상입니다. 히라도에 지어진 유럽의 상관은, 관영 10년(1633년)부터 쇄국령이 시작된 것에 의해 차례차례로 폐쇄되어 갔습니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네덜란드 상관만으로, 그 후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옮겨져 쇄국한 일본에서 유일하게 무역을 계속하는 유럽의 나라가 됩니다.
초대 히라도성
유럽·중국(명),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의 중심지였던 히라도에 성이 만들어진 것은 경장 4년(1599년)입니다. 축성한 것은 히라도를 지배하고 있던 마츠우라씨의 당주였던 마츠우라 진신입니다. 그는 텐쇼 14년(1586년)에 규슈의 다이묘로서는 재빨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순종의 의사를 나타내, 소령을 안도되었습니다. 성의 건축에 착수한 다음 해의 게이쵸 6년(1600년)에,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발발합니다. 이 때, 장남의 마츠우라 히사노부가 서군에 주었지만, 마츠우라 진신은 건축중의 히라도성을 파기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순종의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이 행위에 감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키와 마쓰우라군 6만 3,200석의 소령을 안도합니다. 마츠우라 진신은, 그 후 히라도성의 재건축을 시도합니다만 게이쵸 12년(1607년)에 히라도는 대불에 습격되어, 건축중의 히라도성은 전소했습니다. 이 화재로 마츠우라씨는 히라도성 건축을 포기하고, 히라도 무역의 재흥에 힘을 다해, 히라도는 남만 무역의 중심으로서 쇄국이 완료될 때까지 번창했습니다.
히라도성 재건
화재에 의해 전소한 건축중의 히라도성이 재건된 것은 제4대 번주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무렵입니다. 하고 싶었지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야마가 고기·의창이라는 혈족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겐로쿠 16년(1703년)에 히라도성의 재건축이 허가되었을 때, 야마가 유병법의 사고방식에 따라 성은 재건됩니다. 덧붙여서, 야마가 유병법의 생각에 따라 지어진 또 하나의 성으로, 충신장 [검선 아야메 3]로 유명한 아카호번의 번청, 아카호성을 들 수 있습니다. 히라도성의 재건이 허락된 이유는 마츠우라씨가 도쿠가와가와 혼인을 맺고 있었던 것과 동중국해의 보호를 굳힐 필요성이 나왔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추측되고 있습니다. 5대 번주 마쓰우라동 시대에 겐로쿠 17년(1704년) 2월에 착공되어 호나가 4년(1707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천수는 쌓이지 않고, 니노마루에 세워진 3중 3층의 건망이 천수의 대신이 되고 있습니다. 의뢰 메이지 시대까지 히라도 성은 히라도 번의 번청으로 기능했습니다. 히라도성은 히라도 세토에 돌출한 구릉에 만들어져 있어 히라도 항뿐만 아니라 대안의 규슈 본토까지 엿보았다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성의 삼방을 바다가 둘러싸고 천연의 해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또, 히라도성에 수많은 망 속에는 성의 수호신인 「타누키」가 살고 있다고 하는 전설이 남아 있어, 「기몬」이라고 명명되어 있었습니다.
메이지 이후의 히라도성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면 히라도성은 폐성이 되었고, 타쿠마와 북호구문(搦手門)을 남기고 다른 건물은 모두 파기되었습니다. 쇼와 37년(1962년)이 되면 모의 천수각이나 부흥의 견주망, 건망, 지조자카 망, 회유망이 재흥되어 히라도시의 관광 명소가 됩니다. 덧붙여, 타쿠마와 북호구문(搦手門)은 현재도 그대로 남아 에도시대의 모습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또, 천수내는 히라도 번의 개번에서 메이지 유신까지 번을 다스린 마츠우라씨의 자료관입니다. 성내에는 히라도 경유로 일본에 담배가 전래한 것을 나타내는 담배의 비와 메이지 천황의 할머니에 해당하는 마츠우라가의 자녀 아이코 코끼리 등이 있습니다. 히라도 성이 폐성이 된 후, 성의 부지 내에 지어진 가메오카 신사에서는, 매년 「히라도 군치」가 봉납됩니다.
요약
히라도 성은 아카호 번과 마찬가지로 야마가 유병법을 따라 지어진 특이한 성입니다. 에도시대 중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천수는 존재하지 않고, 성내는 야마가류 제곱의 생각에 빼앗아 줄바닥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히라도성의 유구로서 남아 있는 것은 다쿠마와 북호구문, 이시가키뿐입니다. 그러나, 천수 내에 설치된 박물관이나 유럽에서 온 물건의 도착 장소라고 나타내는 비석 등, 당시를 조롱하는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히라도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배틀렌 추방령히데요시가 내놓은 기독교 제한령
천문 18년(1549년)에 기독교가 전래한 이래 일본 기독교도, 이른바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탄압에 시달려 왔습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기독교에 큰 제한을 가한 것이 텐쇼 15년(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