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라성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겨울의 오구라성 1겨울의 오구라성 2겨울의 오구라성 3겨울의 오구라성 4겨울의 오구라성 5겨울의 오구라성 6겨울의 오구라성 7겨울의 오구라성 8겨울의 오구라성 9겨울의 오구라성 10
고쿠라성 DATA
별칭카츠야마성, 사츠키성
축성1569년
주소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 기타구 성내 2-1
전화번호093-561-1210
개관 시간9:00~18:00(4월~10월), 9:00~17:00(11월~3월)
입관은 30분 전까지
휴관일연중무휴
등각료어른 350엔/중고생 200엔/초등학생 100엔
오구라성에의 교통 액세스
JR「고쿠라」역 도보 15분

HISTORY당나라 만들기의 천수각을 가진 「고쿠라성」

고쿠라성은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에 있는 해성입니다. 히고 호소카와가의 초대이며 호소카와 가라샤의 남편으로도 알려진 호소카와 타다오키에 의해 7년의 세월에 걸쳐 건축되었습니다. 당나라 천수가 있는 성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 고쿠라성의 역사를 끈다.

교통의 요소였던 오구라
오구라는 규슈의 입구이며, 가라쓰[검선 아야메 1]가도·나가사키 가도·아키츠 가도·나카츠 가도 등 규슈의 각지를 잇는 가도의 집약 지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쿠라는 분영년간(1264년~1274년)의 무렵에는 오가타 다이젠 료유중이라는 인물이 성을 쌓아 거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가타씨는 30년 정도 오구라를 다스렸습니다만 연경 연중(1308년~1311년)에 수원 비중 수정 루에 멸망됩니다. 그 후도 20~30년 단위로 오구라를 지배하는 인물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오구라에는 소규모의 성과 요새가 계속 쌓여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가 되면, 타카하시 감종이라는 인물이 모리씨와 짜서 오토모씨에게 반란을 일으킨 결과, 패해 오구라의 땅으로 영지 바꾸게 됩니다. 그 후, 규슈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 카츠노부(모리 카츠노부)에게, 타시로군의 6만석도 주어 오구라의 땅을 다스렸습니다. 타카하시 감종이 고쿠라의 땅에 영지 바뀌었을 무렵부터 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이 성이 어떠한 성이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리 카츠노부는 게이쵸 5년(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서군에 아군한 탓에 개역이 되었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에 의한 오구라성의 축성부터 막부 말기의 소실까지
개역이 된 모리씨를 대신해 고쿠라의 땅을 다스린 것은 호소카와 타다오키입니다.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에게 도요젠국 1국, 분고국 하야미군, 국동군 합쳐 39만9천석을 세키가하라 전투의 온상으로 줬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처음 쿠로다 씨의 거성이었던 도요젠국의 나카츠성에 입성했지만, 게이쵸 7년(1602년)부터 7년의 세월에 걸쳐 모리 카츠노부의 거성이었던 오구라성을 대폭 에 개축해, 현재에 전해지는 고쿠라성을 축성했습니다.
오구라성은 혼마루의 남쪽에 마쓰마루, 북쪽에 북쪽의 동그라미를 구축해, 이 3개를 둘러싸도록(듯이) 니노마루, 산노마루라고 하는 외곽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평망 117, 이중 망 16, 망문 12, 틈 3271이 있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특필해야 할 것은 천수각으로, 4중 5층의 대천수와 소천수로 이루어지는 연결식 층탑형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최상층의 입모점 파풍 이외에 파풍이 없는 구조는 전례가 없고, 「당조(남만조)」라고 하는 말까지 태어났을 정도입니다. 덧붙여 현재 복원되고 있는 오구라성 천수는 복수의 파풍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당시의 기록에 근거해 그려진 일러스트를 보면, 심플하고 모던한 인상을 보는 사람에게 안게 만드는 제작입니다.
덧붙여 후년 쓰야마성이나 다카마쓰성이 오구라성의 대천수를 참고로 만들어졌습니다. 호소카와 충흥의 고집과 미의식이 담긴 천수는, 유감스럽게도 덴포 8년(1837년)에 소실해 버려, 이후 재건될 것은 없었습니다. 이 밖에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오구라성 축성과 동시에 성시의 정비도 진행되어 성의 동쪽을 흐르는 시라카와를 천연의 해자로 활용하여 성내에 마을을 도입한 총 자세로 합니다. 에도시대를 통해서 오구라성은 오구라번의 번청이 되어, 호소카와가와 악보 다이묘의 오가사와라가의 2가가 막부 말까지 성주를 맡았습니다.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오구라번은 조슈번과 전투가 되어 열세에 몰린다. 오구라번은 오구라성에서의 철퇴를 결정, 오구라성은 소각되어 버립니다. 번주는 구마모토 번으로 철수, 가로들은 후쿠오카현 다가와군 카하루에 번정의 거점을 옮겼습니다. 이때 사실상 오구라번은 소멸하고 세상은 메이지를 맞이합니다.
메이지 이후의 고쿠라성
메이지가 되면 오구라 성터에는 육군의 보병 제14 연대와 보병 제14 연대를 관할하는 보병 제12 여단 본부가 놓여져 사령부 청사 등이 세워졌습니다. 쇼와 34년(1959년)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천수가 외관 부흥됩니다. 이것이 현재의 고쿠라장입니다만, 복수의 파풍이 있어 역사상의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부는 향토 자료관이 되어 있어, 헤세이 2년 1990년에 리뉴얼되어 체험형 시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헤세이 10년(1998년)에 고쿠라성 정원 및 기타큐슈 시립 마쓰모토 기요하리 기념관이 개관해, 2017년(2017년)에는 일본 백명상에 선택되었습니다. 현재의 오구라성은, 천수각에서 바나 다이닝을 즐길 수 있는 “고쿠라성 나이트 캐슬” 등 오리지널의 이벤트 등도 하고 있어, 국내의 관광객은 물론 해외에서 일본을 방문한 분들에게도 인기의 관광 명소 되어 있습니다. 또, 3월 하순에는 벚꽃 축제, 9월 하순에는 장작, 10월에는 기타큐슈 고쿠라성 축제라고 하는 이벤트도 개최되고 있어 기간중은 많은 분들에 붐비고 있습니다.
요약
옛부터 규슈 각지를 잇는 가도의 집약점으로 혼슈와의 현관구였던 고쿠라는 옛부터 지배권을 둘러싸고 많은 무장들이 다투어 왔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축성한 오구라성은 에도시대를 통해서 오구라의 땅을 다스리는 오구라번의 번청으로서 기능해 왔습니다만, 막부 말기, 조슈번과 오구라번의 전쟁에 의해 소실해 버립니다. 현재 재건된 오구라성의 천수는 사실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왕년의 우아함과 용장함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천수각에서 식사와 술, 카페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 등도 열려 있기 때문에 하루 즐길 수 있는 장소입니다.

고쿠라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규슈평정히데요시가 시마즈를 내려 규슈를 지배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대의 라이벌·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텐쇼 12년(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계기로 신종시키고, 텐쇼 13년(1585년)에 나가소카베 모친을 내려 시코쿠를 평정한 히데요시가
규슈평정

고쿠라성과 관련된 인물기 읽기

호소카와 타다리갈라샤의 아들
전국 시대,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의 이상으로 자해에 몰아넣은 것이 아케치 미츠히데였습니다. 미츠히데에는 구슬(가라샤)이라는 딸이 있습니다. 구슬은 호소카와 충흥의 아내가 되었고, 둘 사이에는 몇몇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구마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호소카와 타다리
호소카와 충흥히데요시코 키치의 칠장
싸움에 새로워진 전국 시대, 그런 거친 시대에도 문화의 꽃은 크게 피었습니다. 차의 탕이나 연가입니다. 전국의 세상에서 문화를 키우면서 무로마치 막부에서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섬긴 다이묘가 호소카와 타다오키입니다. 충흥은 호소카와 후지 타카의 아이로
호소카와 충흥

오구라성을 번청으로 하는 오구라번의 역사

고쿠라 번악보 다이묘가 다스린 규슈의 요지
고쿠라번은 토요젠국(현재의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 있으며, 오구라성을 번청으로 한 번입니다. 전국 시대를 무대로 한 드라마와 소설, 만화 등에도 잘 등장하는 호소카와 타다 흥이 초대 번주를 맡고 그 후 마츠모토 번을 다스리고 있던 오가사와라 씨가 막부 말기
고쿠라 번
오구라 번 DATA
번청고쿠라성
구지역도요젠 국가
이시타카15만석
악보·외양외양·보대
주요 번주호소카와가, 오가사와라가
추정 인구24만명(메이지 원년)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