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키 일본 철도 「긴테쓰 고리야마」역에서 도보 약 7 분. JR 「고리야마」역에서 도보 약 15분.
HISTORY하 시바 히데나가의 거성이기도 한 고리야마 성
고리야마성은 나라현 야마토군야마시에 있던 헤이죠입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무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부제 羽柴秀長(토요토미 히데나가)의 거성이기도 했습니다. 에도 시대는 고리야마 번의 번청으로서 기능해, 현재는 벚꽃의 명소로서도 유명합니다. 그런 군산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고리야마의 땅은 가마쿠라[미말 1] 시대 후반쯤부터 고리야마중이라고 불리는 토호 집단이 거관을 짓고 있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고리야마」라는 지명은 도다이지의 장원이었던 약원장으로부터 「고리야마소」가 정안 2년(1300년에) 독립해서 탄생했습니다. 당시 고리야마에는 무카이씨, 戌亥씨, 야흥씨 등 복수의 토호가 있어, 참행장에 거관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거관군은 「참진의 성」이라고도 불리고, 군산성의 가장 초기의 모습이라고도 합니다. 그 후, 토호의 세력은 정장 2년(1429년)에 발발한 야마토 나가요시의 난을 계기로 싸우게 되어, 이윽고 츠츠이씨와 에치 지씨의 2대 세력이 대두합니다. 그리고 양가가 화해하면 코리야마의 토호는 츠츠이씨의 부하가 됩니다. 에이로쿠 2년(1559년) 마츠나가 히데히사가 야마토국에 진입해 오면 고리야마에 성을 짓고 있던 「고리야마 타츠미」라는 토호가 츠츠이씨로부터 이반해, 마츠나가 히데히사로 내립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츠츠이씨의 당주였던 츠츠이 준케이와 마츠나가 히데히사의 사이에서 「츠츠이성의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이 싸움은 에이로쿠 11년(1568년)까지 계속되어, 마츠나가 히데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뒷받침을 받고 츠츠이성을 낙성했습니다. 이 때, 고리야마를 비롯한 야마토의 나라는 한번 마츠나가 히데히사의 지배하가 됩니다. 그러나, 모토가메 2년(1571년), 타츠시성의 합전으로 마츠나가 히데히사가 패배하면 츠츠이씨의 당주였던 츠츠이 준케이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취임 없이 오다 노부나가에 귀속해, 츠츠이성에의 귀성을 용서되었습니다. 텐쇼 7년(1579년), 츠츠이 준케이는 거성으로 하고 있던 츠츠이성 확장을 시도합니다만 입지의 불편함으로부터 단념해, 다시 한번 군산성을 본성으로 하는 개수를 개시합니다. 그리고 다음 텐쇼 8년(1580년)에 천수가 완성되어 현재 성지가 남아 있는 군산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또한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는 파성령을 내고 츠츠이성의 파각을 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음 텐쇼 9년(1581년)에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보청목표가 되어 새로운 개축공사에 착수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츠나가 히데히사에게 패했지만 츠츠이성에 다시 귀성을 허락받고, 코리야마의 지배자가 된 츠츠이 준케이는 텐쇼 12년(1584년)에 사망, 그 후 입양의 츠츠이 정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명에 의해 이가 우에노성으로 전봉되었습니다. 지배자가 없어진 코리야마의 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부제 하시바(도요토미) 히데나가에게 주어져 히데나가는 야마토국·이즈미국·기이쿠니 3개국을 다스리는 100만석을 넘는 다이 다이묘가 됩니다. 히데나가는 고리야마성에 들어서자 100만석에 걸맞는 성으로 개축하려고 확대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성곽뿐만 아니라 대규모 성시의 정비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건축 자재로서의 돌이 부족해 천수각의 돌담에는 묘석이나 지장까지 이용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시대의 고리야마성은 천수 외에 비사문 곡륜, 법인 곡륜, 누린 곡륜, 녹색 곡륜, 현무 곡륜 등 많은 곡륜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리야마성은 도요토미가의 중진의 거성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오사카성을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고리야마성의 개축이 일단락되면, 하바시바 히데나가는 나라시내에 흩어져 있던 장사인들을 고리야마성하에 모아, 우오시오쵸, 사카이마치, 야나기쵸, 이마이쵸, 코튼쵸 등 주사마치를 정비해 살게 합니다 . 그러나, 텐쇼 19년(1591년)에 하 시바 히데나가가 몰려, 양자 도요토미 히데호도 분로쿠 4년(1595년)에 사망하면 하 시바 히데나가의 집은 단절해 버렸습니다.
에도시대의 고리야마성
하시바 히데나가의 혈통이 단절된 후, 고리야마성에는 오봉행의 1명인 마스다 나가모리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나가모리는 게이쵸 6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서군에 아군 했기 때문에, 고야산에 추방이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군산성의 건축물의 대부분은 후시미성, 천수는 니조성으로 옮겨졌고, 영지는 나라 봉행소의 관할하에 들어가 오쿠보 장안이 재번했습니다. 그 후, 오사카의 진이 발발했을 때는 고리야마성도 전장이 됩니다. 이때 성을 맡고 있던 것은 한때 군산을 다스리고 있던 츠츠이가의 일족, 츠츠이 정경·경지의 형제였습니다. 두 사람은 도쿠가와 가문에 도착했지만 전통에 익숙한 도요토미 군대에 처해 도주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의 진에서 승리하고, 도요토미가를 멸망시키면 츠츠이 정경·게이유의 형제는 자해했다고도 자살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사카의 진 후, 전투에서 황폐한 고리야마성은 미즈노 카츠나리와 마츠다이라 타다아키, 혼다 마사카츠 등의 다이묘들에 의해 수복되어, 성시는 하 시바 히데나가가 다스렸던 시대보다 소규모이지만,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 3개의 집이 고리야마성을 재건한 후, 측용인 야나기사와 요시호의 장남, 야나기사와 요시리가 번주가 되어, 최종적으로 야나기사와가가 막말까지 번주가 되어 야나기사와가가 고리야마 번을 다스렸습니다.
근세 이후의 고리야마성
메이지 시대가 되면, 폐성령의 발령에 의해 군산성은 폐성이 되었습니다. 성의 부지에는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이전되지만, 쇼와 28년(1953년)부터 추수문 등이 복원되거나, 혼마루·비사문곽·법원곽·진진곽·현무곽 등이 나라현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합니다. 현재는 천수대, 추수문·추수향 망·추수 히가시스미 망이 복원되어 코리야마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또, 고리야마 굴지의 벚꽃 명소로도 알려져 있으며, 「일본 사쿠라 명소 100선」에도 지정되었습니다. 매년 개화 무렵에는 성제가 열리고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요약
고리야마성은 오사카에 가깝기도 했고, 도요토미가의 시게진바 시바 히데나가를 비롯한 유력한 다이묘에게 주어진 시기도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자 마침내 고대 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측근, 야나기사와 요시호의 장남을 조로한 야나기사와가가 번주가 되어 막부 말까지 다스렸습니다. 폐성령의 발포에 의해 메이지 시대에 건물의 대부분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만, 쇼와 28년보다 오랫동안 복원 공사가 행해져 현재는 이시가키나 망토 등 당시를 망치는 건물이 복원되고 있습니다. 헤세이 19년(2017년), 속일본 백명성에도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벚꽃의 명소로도 유명하며, 개화 시기에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합니다.
고리야마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오사카 여름의 진도요토미 종가, 마침내 멸망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를 멸망한 합전이, 「오사카 겨울의 진」 「오사카 여름의 진」의 2번의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오사카의 진」입니다. 게이쵸 19년(1614년)의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는 도요토미가·도쿠가와가 쌍방이 타격을 받는 가운데 평화를 맺었습니다만, 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