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세 번에 걸쳐 축성된 성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지막을 맞이한 성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에도시대 초에 폐성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건물의 일부는 니조성 등으로 이축되었습니다. 그런 후시미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시즈키 후시미성은, 텐쇼 19년(1591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카의 도요토미 히데지에 관백의 자리와 교토의 류라쿠제를 양도한 후, 은거 장소로서 현재의 교토부 하치만시에 세운 저택이 원형으로 되었습니다. 분로쿠 2년(1593년)에는 이 저택에서 다테 마사무네와 면담하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토시야 등과 다과회를 열거나 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쇼라쿠제의 성시에서도 다수의 읍인이 이동했다고 생각되고 있어, 현재도 주변에는 「소라쿠쵸」「주작쵸」「진센엔쵸」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어, 명의 사자에게 지배자로서의 위광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던 것나,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 등으로 사정이 바뀌어, 저택은 성으로 개수됩니다. 기즈키 후시미성의 정식 축성은 분로쿠 3년(1594년)부터 시작됩니다. 동시에, 오사카에 다니는 항구를 만들고, 거북이 연못 안을 종단하는 오구라 제방을 쌓아 올려, 그 위에 길을 정비해 「나라 가도」를 만드는 등, 성하의 정비도 행해졌습니다. 보청 봉행에는 사쿠마 정실이 임명되어 전국에서 석재와 목재가 모입니다. 천수와 망치는 요도코성에서 이축되었습니다. 시즈키 후시미성 축성의 도중,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히데지가 절복하는 사건이 발생해, 류라쿠제가 파기됩니다. 거기에서도 건물이 이축되어, 무코지마에 후시미성의 지성인 무카지마성이 건축되었습니다. 분로쿠 5년(1596년) 시즈키 후시미성은 거의 완성되어, 다이묘 저택을 비롯하여 성시의 정비도 진행되었을 무렵, 게나가 후시미 지진이 발생해, 천수의 위 2층이 도괴하는 큰 손해가 발생해 합니다. 성내에서 다수의 죽은 자도 나왔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은 시즈키 후시미성에서 북동쪽 1km에 있는 고다이, 기만산에 임시의 거주지를 만들었습니다. 여기가 나중에 기만산 후시미성이 됩니다.
기만산 후시미성
기만산 후시미성은, 게이쵸 후시미 지진으로 도괴한 시즈키 후시미성에서 건축재료를 이축하는 형태로 급피치로 축성이 진행된 성입니다. 덧붙여 후년의 자료를 근거로 기만산 후시미성에의 이축은 지진전부터 계획되고 있었다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만산 후시미성은 게이쵸 2년(1597년) 5월에는 천수각과 전사가 완성되어, 같은 해 10월에는 차정이 완성되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으므로, 쓰키성에서 1년 조금으로 주된 건물이 완성된 것입니다. 덧붙여 이 시기 쇼라쿠제의 파기, 나고야성의 축성, 교토의 쪽 히로지 대불전의 건축, 오사카성 산노마루의 축성이 동시 진행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천하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배력과 재력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아는 사례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수각이 완성된 게이쵸 2년(1597년)에 후시미성으로 옮겨 살고, 오사카성과 후시미성을 오가거나 하는 생활을 시작합니다만, 만년에는 후시미성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 게이쵸 3 년(1598년)에 후시미성에서 몰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건한 후시미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몰하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으로 옮깁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유수 거역으로 한때 후시미성에 들어갑니다만, 게이쵸 4년(1598년) 9월에 오사카성으로 옮겨지면, 다른 다이묘들도 모여 오사카로 옮겨, 후시미의 마을은 외로워 갔습니다. 게이쵸 5년(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에 출립하면,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전초전으로 알려진 후시미성의 전투가 발발합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시마즈 요시히로련의 연합군은 도리모토 타다시가 성대를 맡는 후시미성을 공격해, 도리모토 타다시는 토사했습니다. 전의 지휘를 맡은 이시다 미츠나리는 후시미성을 불태웠다고 기록에 있습니다만, 현재도 도쿠가와 가신의 혈흔이 남는 마루판을 천장에 유용했다고 전해지는 「혈천장」이,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양원원 등 복수 사원에 남아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게이쵸 6년(1601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의 재건과 니조성의 축성을 개시합니다. 보청봉행에는 축성의 명인이라 불리는 후지도 타카토라가 임명되어 같은 해 연말에는 거의 재건이 끝났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성의 규모는 다소 축소되어 지붕 타일에는 도요토미가의 키리몬이 들어간 것이 재이용되었습니다. 후시미성의 재건과 함께 다이묘 저택도 다시 정비되어 새롭게 다이묘에 맡겨진 사람들이 후시미로 옮겨 살 수 있습니다. 게이쵸 8년(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시미성에서 정이 대장군의 선하를 받고, 그 후 3대째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까지는 후시미성에서 장군 선하를 계속 받습니다. 게이쵸 10년(1605년) 후시미성에서 조선사절과 면담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출병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같은 해, 니조성이 완성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단 니조성으로 옮겨 살고, 또 후시미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게이쵸 11년(1606년) 스루후성이 개축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루후성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그와 함께, 후시미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부제, 마츠다이라 정승이 성대가 됩니다. 오사카의 진이 도쿠가와 쪽의 승리에 끝나자 후시미성은 잠시 니조성과 함께 장군이 상경했을 때의 체류 장소로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국 일성령을 막부가 발령한 것과, 유지가 곤란해진 것을 이유로, 후시미성은 폐성이 되어, 천수는 니조성에, 그 외의 건물도 후쿠야마성, 요성 등에 이축 후시미 성은 철거되었습니다. 덧붙여 니조성의 천수는 관연 3년(1707년)에 낙뢰에 의해 소실해, 현재는 천수대만이 남아 있습니다. 덧붙여 폐성에 따라 일시적으로 있던 후시미번도 폐번이 됩니다만, 그 후 이 땅은 「후시미 봉행」이 놓여져 메이지 시대까지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습니다.
현재 후시미성
메이지 45년(1912년) 메이지 천황이 무너지자 시신은 후시미성 혼마루 유적지에 묻혀 후시미 모모야마릉이 되었습니다. 쇼와 39년(1964년) 후시미성 꽃밭 뒤에 후시미성의 고텐모리와 망문 등을 철근 콘크리트제로 복원해, 롤러코스터나 수영장도 갖춘 「후시미 모모야마 캐슬 아일랜드」가 탄생합니다. 유원지는 2003년에 폐원했습니다만, 터지는 「후시미 모모야마성 운동 공원」이 되어, 시민의 휴식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현재의 모의 천수각은 내진 강도를 채우지 않기 때문에 내부에는 넣지 않습니다만, 영화의 촬영 등에도 사용되고 있어, 봄은 숨은 벚꽃의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요약
후시미성은 히데요시가 몰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 대장군의 선하를 받는 등 역사의 무대가 된 성입니다. 에도 시대 초기에 폐성이 되었고, 혼마루 자취에는 메이지 천황의 후시미 모모야마릉이 되었으므로, 당시를 조롱하는 건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후시미의 땅은 에도시대 주조의 명소로서 발전해, 현재도 황벚나무 등 유명한 주조 메이커가 주조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후시미 모모야마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후시미성 전투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이라는 격전
게이쵸 5년(1600년) 7월 중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도리 모토타다가 지키는 후시미성(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 우키타 히데야 등이 이끄는 서군 4만이 공격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후시미성의 전투」입니다. 모토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