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말기, 도이 코바야카와씨의 조라고 불리는 코바야카와 원평의 거성이 오다와라성의 시작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오다와라는 도이 코바야카와 씨의 지배하였습니다만 오오나가 23년(1416년) 우에스기 선수의 난으로 선 히데카타였던 도이 씨가 실각하면 스루가국에 근거를 두고 있던 오모리씨가 영지를 빼앗아 네. 그 후, 오모리씨는 하치만산(현·현립 오다와라 고등학교 부근의 고대)에 산성을 구축합니다. 공식적인 축성 연수는 불명하지만, 15세기 중반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호조 조운의 오다와라성 강탈
아키타 4년(1495년), 이즈국을 지배하고 있던 호조 조운이 오모리 후지노리로부터 하치만산의 산성을 빼앗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호조 사쿠모는 오모리 후지요리와 우호 관계를 맺고 방심시키고 나서, 사슴 사냥의 세자에게 위장한 군세를 오다와라 성하에 보내, 성을 탈취했다고 합니다. 호조 사쿠모는 이 산성을 대폭 확장했다고 합니다만, 본인은 평생 운산성을 거성으로 유지했습니다.
호조씨 지배 후의 오다와라성
오다와라성이 본격적으로 오다와라씨의 거성이 된 것은 호조 조운의 아들인 호조씨 줄다리의 시대부터입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호조씨 정이 칠 때까지 오다와라성은 호조씨의 거성이 되었습니다. 오다와라씨는 현재 오다와라성의 천수가 있는 근처에 저택을 짓고, 오모리씨로부터 빼앗은 하치만산의 성을 채우는 성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오다와라성은 호조씨의 관동 지배의 중심지로서 대대로의 영주가 확장해 갔습니다. 오다와라성이 호조씨의 거점이 된 이래, 우에스기 켄신이나 다케다 신겐으로부터의 침공을 받습니다. 에이로쿠 4년(1561년)의 우에스기 켄신에 의한 오다와라성 포위, 에이로쿠 11년(1568년)의 다케다 신겐에 의한 스루가 침공입니다. 호조 씨는 둘 다 격투 끝에 물러났다. 또 에이로쿠 9년(1566년)부터 동 12년(1569년)에 걸쳐서 오다와라성을 대개축했다는 기록도 다수 남아 있어 우에스기, 다케다의 양 군세의 침공에 호조씨가 성을 견고하게 해 준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오다와라성을 무대로 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이라고 하면, 텐쇼 18년(1590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오다와라 정벌입니다. 이 싸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 통일의 총 마무리로서 관동을 지배하고 있던 호조 씨 마사토와 그 아들 씨에게 굉장히 시행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호조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뿐만이 아니라, 사타케 요시시게 우츠노미야 쿠니츠나 등 관동을 다스리고 있던 다이묘들의 연합군과도 싸우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에 대해, 호조씨는 성하를 9km에 이르는 총구로 둘러싸고, 농성을 하고 대항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15만의 대군을 가지고 오다와라성을 둘러싸는 것과 동시에 호조씨의 부하가 다스리고 있던 성을 각 개격파하는 것으로 호조씨를 몰아넣었습니다. 오다와라 정벌은 개전으로부터 약 3개월 후, 오다와라성의 무혈 개성으로 끝납니다. 오다와라 정벌 후, 씨정은 절복, 씨 나오루는 고야산에 가문이 되어, 호조씨의 관동 지배는 끝을 고했습니다.
에도시대의 오다와라성
오다와라씨가 멸망한 후, 그 영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어졌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정이 대장군에 맡겨 에도 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16신장의 1명인 오쿠보 타다세에게 오다와라의 통치를 맡겨 4만 5천석을 준다. 이것이 오다와라 번의 시작입니다. 오다와라성은 호조씨의 손에 의해 거대한 총초가 만들어졌지만, 오오쿠보 타다세는 그것을 파기해, 성의 규모를 대폭 축소합니다. 또, 오쿠보씨가 개역된 대로, 오다와라성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만, 이나바씨가 입성했을 때에 재정비되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오다와라성의 유구는 모두 이때의 것입니다. 오다와라성은 에도시대를 통해서 오다와라번의 번주 거성이며, 하코네의 관소 앞, 관동 지방의 방어의 요점으로서 막부의 요소로 계속 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의 오다와라성
메이지 3년(1870년)에 폐성이 된 오다와라성은, 메이지 5년(1872년)까지 많은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그 터에는 오다와라·아시가라현청·가나가와현 지청이 세워져 시정의 중심지가 됩니다. 메이지 34년(1901년)에는 니노마루터에 어용 저택도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은 다이쇼 12년(1923) 9월의 관동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받고 파괴되어 버립니다. 또, 관동 대지진에서는 남아 있던 이시가키도 붕괴해, 에도시대의 오다와라성의 모습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오다와라성의 재건
폐성에 의한 건물의 철거와 관동 대지진에 의해 에도 시대의 모습을 모두 없애 버린 오다와라성입니다만, 쇼와 9년(1934)에 스미야구라가 재건된 것을 시작으로, 쇼와 35년 (1960)에는 천수각이 재건됩니다. 게다가 쇼와 46년(1971) 3월에 토키와키몬이, 2009년 10월에 동문, 2019년 3월에는 마출문이 재건되어, 오다와라성은 지금도 오다와라시의 상징이며, 관광 명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오다와라 성터는 쇼와 13년(1938) 니노마루·산노마루의 일부, 쇼와 34년(1959)에는 쇼와 13년에 지정되지 않은 부분 모두가 나라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대 오다와라성
현재의 오다와라성은 성지 공원이 되어 있어, 재건된 천수각이나 구석망·마출문·동문·조반기문을 견학할 수 있습니다. 천수각의 내부는 자료관으로 되어 있는 것 외에 역사 견문관(NINJA관)·조반 기문 SAMURAI관, 뮤지엄 숍 등이 있어, 역사를 즐겁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원내에는 유원지가 있어, 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오다와라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오다와라 정벌히데요시가 천하 통일! 호조가를 내린 마지막 대전
텐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씨 마사와 그 아들의 씨직이 이끄는 호조가와 싸운 것이, 「오다와라 정벌」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싸움입니다. 히데요시의 지배에 끝까지 드러난 호조가가 전쟁에 패하고 멸망하고, 히데요시는 천하통